지난 7월 14일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순배출량을 1990년 대비 55% 수준으로 감축하기 위한 기후 대응 입법안 패키지 ‘핏 포 55(이하 Fit for 55)’를 발표했다. 이는 ‘유럽 그린딜(European Green Deal)’의 2050년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한 정책 수단이다. 유럽의회와 EU 이사회의 논의를 거쳐 최종 확정될 예정이다. 향후 회원국별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치열한 토론이 예상된다.
Fit for 55는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ETS) 적용 대상을 확대하고 기준을 강화한다. ETS란 정부가 기업에 온실가스 배출 허용량을 부여한 뒤 기업이 허용량 이하의 온실가스를 배출할 경우 잔여분을 시장에서 거래하도록 한 정책이다. 할당량을 초과해 온실가스를 배출한 기업은 시장에서 배출권을 사서 부족분을 채울 수 있다.
할당량 크기와 각 기업의 탄소 감축 노력에 따라 배출권의 가격이 결정된다. 기존 ETS는 철강·알루미늄·전력·화학·시멘트 업종과 역내 항공 등 온실가스 배출 업종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2005년 첫 시행 후 온실가스 배출량을 42.8% 감소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다. 이번 입법안에서는 항공 분야에 주어지던 배출권 무상 할당을 2026년 말까지 단계적으로 폐지하는 계획을 포함했다.
해운·육상운송·건축물 분야로도 ETS 적용이 확대될 전망이다. 2023~2025년 사이 점진적으로 확대되는 해운 분야는 국적에 상관없이 EU 지역 내 항구 사용을 요청한 대형 선박이 대상이다. 육상운송·건축물 분야에선 2026년부터 연료 생산자에게 탄소 감축 의무를 점진적으로 부과해나간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탄소배출을 막기 위해 ETS와 연계해 2026년부터 역내 수입품에 탄소배출량에 따른 비용을 부과하는 제도다. EU가 ETS를 강화할 경우 역내 기업의 가격경쟁력이 약화돼 환경 기준이 느슨한 역외로 생산설비를 이전할 가능성이 생긴다.
이때 국내 정책의 탄소 감축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는 게 CBAM 도입의 한 요인이다. CBAM은 2023년 잠정 발효를 통해 EU 역내 수입품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신고하게 할 계획이다. 실제 비용 부과는 2026년부터 시행된다. EU 수입업자는 매년 5월 31일까지 전년도 수입품에 내재된 탄소배출량을 신고하고, CBAM 인증서를 구매해야 한다. CBAM 적용대상은 철강·알루미늄·시멘트·비료 산업 등이다.
당초 계획과 달리 제조공정에서 사용된 전기를 생산할 때 발생한 탄소배출량(간접배출량)은 일단 제외됐다. EU 집행위원회는 CBAM을 통한 추가 세금 수입이 연간 50억~140억 유로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번 법안에는 2035년부터 하이브리드카를 포함해 내연기관 자동차 출시를 금지하는 내용이 추가돼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 충격을 줬다.
2030년까지 탄소 감축 목표를 승용차 부문 37%에서 55%로, 승합차 부문 31%에서 50%로 상향했다. 또 2035년까지 탄소배출량을 100% 감축키로 했다. 탄소제로 차량 출시는 EU 전역의 충전 인프라 구축과 연계해 진행된다. 이를 위해 대체연료 인프라 확충 규정도 새롭게 마련했다. 탄소배출량이 많은 항공 및 해운 부문에서는 친환경 연료 사용을 독려하기 위해 관련 지침을 신설했다. 우선 EU로 가는 모든 항공기에 바이오연료와 같은 지속 가능한 항공연료를 혼합하는 것을 의무화했다. 혼합비율을 2030년 5%, 2035년 20%, 2040년 32%, 2050년 63%로 확대할 계획이다. 현재 항공업계의 지속 가능한 항공연료 사용은 1%에 불과한데, 이 연료를 사용하면 기존 항공유보다 비용이 3배 정도 더 들어간다. 또 유럽의 모든 항구에서 선박이 사용하는 에너지의 온실가스 총량을 규제키로 했다.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원 사용 비중 목표를 기존 32%에서 40%로 확대했다. EU의 재생에너지원 사용 비중이 증가 중이지만, 에너지 생산부문은 여전히 EU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75%를 차지하고 있다. EU의 최종 에너지 소비 기준 재생에너지원 비중은 2004년 9.6%에서 2019년 19.7%로 증가해왔다. 이를 10년 뒤 40%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선 재생에너지 기술투자 확대 및 친환경 에너지 생태계 구축을 위한 인프라 투자가 수반돼야 할 전망이다.
에너지 사용량도 줄여나가기로 했다. 2030년 에너지 사용량 절감 목표를 기존 예측치 대비 32.5%에서 36~39%로 높이고, 모든 회원국에 매년 1.5% 에너지 절감 의무를 부여했다. 비용 효율적 연료 사용, 건물 리모델링, 정보통신기술(ICT) 분야 에너지 소비 절감 등 에너지 효율 개선을 통해서다. 특히 국가별 에너지 절감 기여분 측정지표 도입을 통해 구속력을 강화한다는 구상이다.
EU는 이번 입법안 패키지에서 사회적으로 공정한 에너지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사회 전반의 친환경 에너지로의 전환 과정에서 탈락하는 산업, 지역, 공동체, 노동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사회기후기금, 현대화기금 등 지원대책을 마련했다.
기후중립 달성을 위한 구조적 전환은 화석연료, 내연기관 차량 관련 산업의 쇠퇴와 그로 인한 일자리 상실을 수반한다. 파리기후협정과 국제노동기구 등 국제사회 역시 공정전환을 강조하고 있다.
신설되는 사회기후기금은 2025~2032년 약 722억 유로를 편성키로 했다. 건축물 및 육상운송 관련 ETS 도입으로 인해 영향을 받은 가구, 차량 이용자, 소상공인 등에 대한 지원이 이뤄질 전망이다. 에너지 효율 목표 달성을 위한 건물 리모델링, 청정 냉난방, 재생에너지 사용 등에 관한 투자 지원도 이 기금에서 이뤄진다. 취약가구에 직접 소득 보전 및 금융 접근성 제고의 역할도 맡게 된다. 현대화기금도 확대해 청정에너지 사용을 지원하고, ETS 무상 할당량을 저소득 회원국에 더 많이 제공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