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조명

미국·EU, 중국 포위 겨냥한 무역기술위원회(TTC) 출범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사진한경DB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의기투합했다. 반도체 공급망 문제만이 아니라 투자심사, 수출통제, 비시장 요소와 무역왜곡 관행, 인공지능(AI)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사안에 대서양 양측이 긴밀하게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미국·EU 무역기술위원회(TTC; Trade and Technology Council)가 바이든 브랜드의 통상 동맹의 위력을 과시하게 될지 아니면 단순한 지역주의적 이기주의에 머물지가 주목된다.

지난 9월 29일 미국 피츠버그에서 열린 미·유럽연합(EU) 제1차 무역기술위원회(TTC)에서 미국과 EU는 10개 실무작업반을 구성해 협력을 강화하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미국과 EU는 17년간 끌어온 항공기 보조금 분쟁, 즉 보잉과 에어버스에 대한 양국의 보조금 지급 분쟁을 중단하기로 지난 6월 합의했다. 지난 10월 말 바이든 행정부는 무역확장법 232조 안보조항에 근거해 2018년 3월부터 부과해왔던 EU 철강과 알루미늄에 대한 각각 25%와 10%의 관세조치를 연간 330만 톤 수입량 내에서는 부분적으로 철회했다. EU도 미국산 오토바이, 청바지, 위스키 등에 부과하던 보복관세를 철회했다. 쌍방이 관세 ‘찔러대기’를 종결하기로 한 것이다. 또한 미국은 지난 10월 30일 로마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EU가 강하게 주장해온 디지털세 도입을 2023년부터 발효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디지털 서비스 기업만이 아니라 글로벌 제조업체도 포함됐으며, 최소 15%의 글로벌 최저법인세율을 적용하기로 한 수준에서 타협했다.

EU와 중국의 전략적 관계에 파고든 TTC 출범

사실 독일, 영국, 프랑스 등 EU 중심국들은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16년 중국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출범에 적극 동참했다. EU의 2015년 통상백서 ‘통상 및 투자전략(Trade for All)’에서는 중국의 개혁과 개방을 지원하고 다자무역체제에서 중국의 역할을 강조했다. 중국과 투자협정을 체결하겠다고 밝혔으며 트럼프 행정부 당시 첨예한 미·중 패권경쟁 속에서도 2020년 12월 투자협정 체결을 실행했다. 올 초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인권탄압 문제가 전격적으로 대두되지 않았더라면 EU 의회의 협정 비준 절차는 진행됐을 것이다.
EU 집행위원회가 2019년에 발간한 <중국 보고서(EU·China: A Strategic Outlook)>에 의하면 EU는 4가지 측면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명시했다. 먼저 EU가 밀접하게 연계된 사안에 대해서는 ‘협력 파트너’ 관계를 설정했다. 이익의 균형을 추구하는 측면에서는 ‘협상 당사자’ 관계, 핵심기술 분야에서 주도권을 추구하는 경우에는 ‘경제적 경쟁자’ 관계, 대안적인 거버넌스 모델을 추진하는 측면에서는 ‘체제 라이벌’ 관계를 각각 규정했다.
EU의 ‘전략적 자율성’ 준칙은 5세대(5G) 이동통신 장비의 보안문제로 미국이 화웨이를 제재하는 과정에서도 여실히 활용됐다. EU는 중국과의 경제적 협력 파트너 관계에서 화웨이 5G 사안에 접근했고, 미국의 전면적인 제재 동참 요청에 대해 점진적이고 전략적으로 대응했다. 화웨이 5G 네트워크의 사이버 보안문제를 기술적 조치와 전략적 조치를 통해 리스크를 관리한다는 원칙을 적용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보면, 미국의 대(對)중국 공략은 명확한 반면 EU는 미·중 패권경쟁에서 전략적 자율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온 것으로 판단된다. EU의 견지에서는 트럼프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섣부른 입장 표명보다는 포스트 트럼프를 기대하며 전략적 인내를 선택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올해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고 신장위구르의 인권문제와 홍콩의 민주주의 위협 사안이 심각하게 대두되면서 EU와 중국의 관계에 정치경제적 전환점이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EU의 무역기술위원회(TTC) 출범은 미국과 EU의 경제적 동맹 관계뿐만 아니라 EU와 중국의 전략적 관계의 변화 측면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TTC는 대서양 양안 거대 경제권의 경제협력 차원을 넘어 대(對)중국 공동전선의 야전사령부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전망된다.

2020년 12월 30일 유럽연합(EU)과 중국은 ‘EU-중국 포괄적 투자협정(CAI)’의 원칙적 타결을 공식 선언했다.
EU 측은 제조업·금융·통신 등 여러 분야에서 높은 수준의 시장 접근을 확보했고 지속 가능한 개발의 가치 등을 협정에 반영했다.
5가지 의제와 10개 실무작업반

미국과 EU는 TTC 발족 선언문에 5가지 의제를 명시했다. 차기 회의까지 구체적인 성과를 산출하기 위한 10개 작업반도 구성했다. 첫째, 글로벌 무역에서 비시장적 관행, 강제노동이나 아동노동 등 노동권 위반 행위, 기후 및 환경 이슈가 글로벌 무역을 왜곡시키는 관행을 해소해 경쟁력과 기술 주도권을 강화하는 목표를 결의했다. 당사국뿐만 아니라 제3국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하기로 한 것이다. 또한 신기술을 활용한 상품이나 서비스의 무역 활성화를 위해 불필요한 무역장벽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둘째, 반도체 공급망의 회복력을 높이기 위해 국내 연구개발(R&D)과 공급 생태계를 강화하려는 목표를 설정했다. 생산 단계뿐만 아니라 유통의 투명성과 소통력을 강화해 공급 시차를 해소하려는 조치도 강구하기로 했다.
셋째, 안보, 산업 트렌드, 투자 원천, 거래 방식 등을 포괄하는 투자 정보와 민감한 기술과 데이터 관련 투자 리스크도 고려하는 투자심사 체계를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넷째, 이중용도(Dual-use) 품목 거래에 대한 효과적인 수출통제 협력의 강화다. 요컨대 안보와 관련된 첨단기술의 유통에는 민감한 우려가 있으므로 미국과 EU뿐만 아니라 제3국도 이러한 리스크를 인지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역량구축을 지원하고자 한다.
다섯째, 인공지능(AI) 시스템의 개발과 응용이다. 보편적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를 존중하고 개인영역 보호를 향상시킬 수 있도록 AI 협력을 도모하려고 한다.
이러한 5가지 의제를 구현하기 위한 10개 실무작업반은 구체적 사안을 다루도록 구성됐다. 이를테면 기술표준은 AI, 사물인터넷(IoT), 블록체인, 바이오기술(BT) 등 최첨단 기술의 표준화를 위한 협력을 추진한다. 안전한 공급망은 반도체, 배터리, 핵심 광물류 등 글로벌 공급망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원자재와 부품의 공급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협력체계를 이끌어내려는 것이다. 또한 투자심사는 국내 첨단기술 부문에 대한 외국인 투자의 데이터 심사를 강화함으로써 기술 탈취나 유출을 예방하려고 한다. 수출통제를 위한 협력도 민감한 이중용도 기술의 오남용 방지에 초점이 맞춰진다.
TTC는 무역과 기술의 양 축을 세우고 있지만 실무작업반의 임무를 살펴보면 실질적으로는 ‘기술’ 관리 관련 부분이 중추적이다. 작업반 2의 기후변화와 청정기술과 작업반 9의 중소기업의 디지털 기술 접근성과 사용 촉진을 제외한 나머지 8개 작업반은 첨단기술의 공급, 보호, 관리, 규제를 다루며 국제무역과 투자를 통제하려고 한다. 즉 미국과 EU가 기존 기술과 무역 협력의 차원을 넘어 기술력의 글로벌 우위를 유지하고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를 지킬 수 있도록 대외적으로 데이터와 기술을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중국의 기술 탈취를 봉쇄하고 배제하기 위한 목적이 고스란히 내재되어 있다고 판단된다.

TTC의 5가지 의제와 10개 작업반의 임무

5가지 의제
  1. 1. 비시장 관행과 무역 왜곡 관행 해소
  2. 2. 반도체 공급망
  3. 3. 투자심사
  4. 4. 수출통제
  5. 5. 인공지능(AI)
10개 실무작업반의 임무
  1. 1. 기술표준
  2. 2. 기후변화와 청정기술
  3. 3. 안전한 공급망
  4. 4. 정보통신기술 서비스 보호와 경쟁
  5. 5. 데이터 관리와 기술 플랫폼
  6. 6. 안보와 인권 위협 기술의 오남용
  7. 7. 수출통제
  8. 8. 투자심사
  9. 9. 중소기업의 디지털 기술 접근성과 사용 촉진
  10. 10. 글로벌 무역 현안
자료: 미국 상무부 보도자료(2021. 9. 29) 필자 재정리
TTC는 대(對)중국 기술 봉쇄의 관문 역할

TTC가 중국을 겨냥한 대서양 동맹의 일환이라면 장기적인 안목으로 들여다봐야 한다. 양국의 협력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작업반의 임무는 기술과 무역의 전략적 활용도를 높이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미국과 EU의 거대 경제권이 디지털 기술 표준화를 추진하면서 반도체와 배터리, 의약품 원료 등 전략물품의 공급망을 안정화하고,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를 추구하는 무역체계를 구축하려는 목표들은 뚜렷한 전략적 방향성을 나타내고 있다. 기술과 무역의 글로벌 규범을 주도하려는 국제경제적 방향성과 중국의 패권 진격을 제어하고 압박하는 국제정치적 방향성이 내포되어 있다.
TTC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쿼드 플러스)과 연계될 수 있다.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이 정체되어 있고 쌍순환 전략의 가변성이 커진 상황에서 글로벌 대중 봉쇄 연대가 구축되고 있다. TTC가 차기 회의에서 작업반의 성과를 어느 수준에서 제시하느냐에 따라 확장성과 연계성을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EU 의회의 적극적인 행보에도 주목할 부분이 있다. EU 의회는 2020년 9월 ‘외국의 EU 민주주의 모든 절차에 대한간섭 대응의 특별위원회’를 발족했다. 올 11월 3일에는 위원 13명이 대만을 공식 방문했다. 대중 관계의 악화를 무릅쓰고 미국과 다차원적인 대(對)중국 공동전선을 전개하는 양상이다.

반도체의 국가별 글로벌 생산과 소비 비중(2019년) (단위: %)
한국 산업과 무역에 양날의 칼이 될 TTC

바이든 행정부는 EU에 이어 일본산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에 대해서도 고율 관세를 철회했으나 한국산에 대해서는 아직 미온적이다. 일본은 2019년 쿼드 발족 논의에서부터 참여하였고 한국은 쿼드 플러스(Quad plus)에 초대받았으나 아직 유보적인 입장이 현저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TTC를 통한 미국과 EU의 대중국 압박은 우리 경제에 득도 되고 실도 된다.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산업 부문에서 중국의 추격을 멈칫하게 하는 시간벌이는 도움이 된다. 우리 경제도 중국 의존도가 높은 공급망을 재편할 수 있는 계기로 활용할 수 있다. 반사이익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미국과 중국, EU와 중국의 통상관계가 위축되거나 민감해짐에 따라 우리나라의 중국에 대한 중간재와 서비스 수출에는 부정적인 영향이 초래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전략적 모호성을 견지할 경우 중국의 직접적인 압력이 증대될 수도 있다.
TTC의 글로벌 첨단기술과 무역관리체계는 중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바이든 행정부도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계승하고 있으므로 TTC의 예봉은 언제든지 우리 산업과 무역을 겨냥할 수 있다. 기술 표준, 안전한 공급망 구축, 수출통제, 투자심사 등의 협력 목표는 우리 산업과 기업의 전략적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변수가 될 수도 있다.
TTC의 출범은 우리의 산업통상 정책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체력 단련과 전략적 선택으로 나아가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