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정준 강남대 글로벌경영학부 교수
123일.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고 미국이 우리나라를 냉장 및 냉동 식품 유통기한 문제로 제소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미국은 마치 WTO의 설립과 분쟁해결제도 개시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기구 설립 이후 불과 4개월 남짓 지난 시기에 우리나라를 국제분쟁의 피소국 자리로 불러냈다.
미국과 우리나라는 WTO 출범 초기 분쟁해결제도에서 자주 만났다. 본고의 한·미 식품유통기한분쟁(DS5)이 기구 설립 이후 123일 만에 정식 제소되었다지만 앞서 지난 7월에 다룬 한·미 자몽분쟁(DS3)은 심지어 그보다도 전인 4월 4일, 94일 만에 제소됐던 건이다.
우리나라의 식품유통기한 조정은 미국의 우선 과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해당 제도 변화를 위해 무려 세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는 사실로 보아 그렇다. 미국은 1994년 11월부터 1995년 6월까지 반년여 동안 우리 식품유통기한에 문제를 제기했는데, 골자는 일부 냉장 및 냉동 식품 유통기한을 업계 자율책정으로 하고 자율화까지 잠정 유통기한을 조율하는 것이었다.
미국이 꺼내든 첫 번째 카드는 자국의 1974년 통상법 301조였다. 미국 돈육생산자협회, 전국축산인협회, 육류협회 등은 우리의 육류수입에 불공정 행위가 있다는 청원을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제출했다 한 차례 철회 뒤 재제출했다. 현재 기준으로 미국의 이런 일방적 압박은 분명 부당하나 당시는 1994년 11월로 WTO가 출범하기 전이었다. 미국이 이의제기를 위해 선택한 두 번째 공식적인 통로는 바로 WTO였다. 1995년 1월 1일 WTO와 그 분쟁해결제도가 정식으로 출범하자 5월 3일 우리나라를 제소했다. 자몽 관련 농산물 통관문제로 제소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마지막 수단은 WTO 특정무역현안(STC; Special Trade Concern) 제기였다. 1995년 6월 미국은 우리나라의 냉장·냉동육, 냉동식품 등의 유통기한 문제로 STC를 제기하고 나섰다.
1994년 말 미국의 일방주의(Unilateralism)적 301조 조사 압박이 시작된 것을 생각하면 그사이 WTO가 등장한 것은 우리에게 호재였다. WTO는 다자주의(Multilateralism) 성격의 국제기구이니만큼 국가 간 통상마찰에 대해 분쟁해결제도를 거치지 않은 일방적 조치와 해결모색은 국제규범에 어긋나는 것으로 판단한다.
그럼에도 미국의 제소는 우리가 한·미 무역실무위원회와 위생 및 식물위생(SPS) 정례위원회 등에서 1998년까지의 자율화 강화를 약속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추진된 것이었기에 당시 상황에서 적극적인 합의 노력은 불가피했다. 게다가 WTO도 1심 패널심 회부 전 협의를 의무화하고 있다.
이 시기 우리나라는 수용 가능한 제도 개선 폭에서 미국과 접점을 찾고자 노력했다. 미국의 입장에 따라 1996년 7월부터의 유통기한 업계 자율화에 합의하면서도 진공포장냉장육에 대해서는 45~90일의 잠정유통기한이라는 우리 측 주장을 관철시켰다. 덕분에 1995년 7월 양국은 빠른 합의로 분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국가 간 통상분쟁은 당사국들의 정치·외교·경제 모든 면에서 비용을 수반한다. 그나마 WTO의 분쟁해결기능이 원활하면 자구적 일방주의 대응보다 덜 소모적이다. 그러나 분쟁을 통해 제도 개선의 합리적 가속화와 선진화가 보장되는 것은 생산적인 부분이다. 통상분쟁의 이런 양면성을 고려해 정부정책은 늘 생산성 도모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WTO의 제기능이 전제된다. 현재의 분쟁해결제도 마비가 다시 한 번 고민으로 다가오는 대목이다.
자료 : <WTO SPS 특정무역현안(STC) 제기 현황 및 사례>(한국농촌경제연구원, 2018),
<육가공스크랩>(한국육가공협회, 1995) 및 인터넷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