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정준 강남대 글로벌경영학부 교수
무역구제제도의 핵심인 반덤핑, 상계관세, 세이프가드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바로 ‘공정성’이다. 자유무역에 반함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 한해 용인된 것이기 때문에 공정성이 사라진 순간 해당 조치는 보호무역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미국 정부가 상무부를 중심으로 해외의 덤핑 관행에 반덤핑으로 대응하는 것은 외관상 전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이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국가가 불공정무역에 취할 수 있는 정당하고 공정한 무역구제조치이며 심지어 본고에서 다루고 있는 한·미 WTO 세탁기 분쟁(DS464)과 관련해서 2011년 당시 미국은 나름의 절차를 거쳐 2013년 2월 우리나라 세탁기에 대한 반덤핑관세를 결정했을 터였다. 그러나 여기에 ‘제로잉(Zeroing)’과 ‘표적덤핑(Targeted Dumping)’이라는 불공정요소가 가미되면서 미국이 취한 조치의 성격이 180도 달라졌다. 그에 따라 같은 해 8월 우리나라는 미국이 우리 세탁기에 취한 반덤핑 조치를 WTO에 제소했다.
미국이 수입과정에서 덤핑마진 산정 시 제로잉을 사용해온 것은 상대국들로부터 많은 반발을 사고 WTO 제소를 통해서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해 미제로 남아 있었다. 제로잉이란 미국이 덤핑마진을 계산하면서 수출국의 내수가격과 수출가격을 비교하고 후자가 전자보다 높은 정상적 상황에서의 마진은 ‘0’으로 처리하면서도 후자가 전자보다 낮은 경우만을 인정해 수출국에 불리하도록 하는 방식을 말하는데, 이미 WTO에서 위반이라고 판정을 받은 바 있다. 그럼에도 미국은 이를 준수해 해당 관행을 포기하기는커녕 특정한 시기와 지역에 수입, 판매된 물량에 대해서 마진을 산정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발했는데 바로 표적덤핑이다.
그리고 이것이 추수감사절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세일이 이뤄지는 미국 블랙프라이데이(Black Friday)라는 특정 기간에 우리나라 세탁기의 할인가격을 표적 삼아 첫 적용된 것이다. 이전까지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에서 우리 가전제품의 시장점유율 확대에 대한 견제가 이미 있던 터라 이번 역시 미국 월풀(Whirlpool)사가 주도하고자 한 노골적 무역장벽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과거 WTO 분쟁을 통해 미국의 제로잉은 위반 판정을 이미 받은 터라 이번 세탁기 분쟁에서 미국은 특정 기간에 해당하는 덤핑에 대해서만큼은 여전히 제로잉을 적용할 수 있다는 논리와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1심을 담당하는 패널은 2016년 3월 이러한 제로잉과 표적덤핑을 혼합한 미국의 덤핑마진 부과 방식이 여전히 문제의 소지를 가진 것으로 판결 냈다. 이에 미국이 항소했지만 이어진 상소기구의 판단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해 9월 WTO 최종심을 담당하는 상소기구에서도 미국의 제로잉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WTO 반덤핑협정에 위반된다며 용납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우리나라의 최종 승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판정 이행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해당 분쟁의 패소국인 미국에 주어진 판정 이행의 기한은 2017년 12월 말까지였지만 미이행으로 일관한 것이다. 이에 우리나라는 미국의 표적덤핑 불공정무역구제제도로 피해를 봤던 대미수출액을 계산해 WTO에 양허정지 방식의 보복조치 승인을 요청(중재판정)했고 미국이 그 규모에 대해 반대했음에도 결국 연간 최대 약 905억 원 수준의 보복관세 부과권한을 얻었다. 이처럼 끝나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미국의 제로잉 관행이 제로잉(‘0’) 될 때 비로소 끝나지 않을까.
자료 : <WTO SPS 특정무역현안(STC) 제기 현황 및 사례>(한국농촌경제연구원, 2018),
<육가공스크랩>(한국육가공협회, 1995) 및 인터넷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