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사진한경DB
2012년 3월 15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됐다. 양국 간 FTA 논의가 처음 시작된 것은 2005년으로 당시 국내 FTA 추진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협정이 타결된 이후에도 세계 최대 경제국가이면서 글로벌 통상규범 제정을 이끌어나가는 미국과의 FTA에 대한 국내의 반발이 컸다. 그러나 한·미 FTA 발효 10년을 돌아보면 당시의 우려가 현실화된 것은 거의 없다.
한·미 FTA는 10년 전인 2012년 3월 발효됐다. 2021년 말 기준 우리나라는 22건의 FTA 타결로 59개 국가와 자유무역체제를 구축했고, 오늘날 우리 국민 대부분에게 FTA는 친숙한 용어가 됐다. 그러나 한·미 간 FTA 논의가 시작되던 2005년 당시 국내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따라 외국 농산물이 수입되는 상황에서 FTA로 추가 개방이 되면 우리 농업은 황폐해지고 농업 기반을 상실하게 될 것으로 걱정하는 농업계의 반발에다가 상수도·전기 등과 같은 서비스 분야가 개방되면 외국 사업자가 이들 부문을 독점함으로써 국민 생활이 피폐해질 것이며, 투자자-국가 분쟁해결(ISDS; Investor-State Dispute Settlement) 등 미국식 FTA에 포함된 새로운 통상규범으로 우리나라의 정책권한이 제약받을 수 있어 식물정부가 될 것이란 우려에 이르기까지 반대 논리가 다양했다.
한·미 FTA가 발효된 지 10년이 됐지만 농업 기반 상실, 외국기업의 상수도 독점, 식물정부 어느 하나 현실화된 것이 없다. 개방 범위가 늘어나면서 산업의 구조조정이 가속화돼 산업 재편이 발생함으로써 승자 산업과 패자 산업 간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경우는 더러 있다. 하지만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재배치함으로써 경제 전체의 생산성을 높여야만 소득이 증가하고 경제성장이 가능해진다. 여기서 정부의 역할은 패자 산업의 구조조정을 지원하고, 실직자가 재취업할 수 있도록 소득보전과 직업훈련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미국과의 FTA는 우리나라 통상정책의 체계와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1998년 2월 집권한 김대중 국민의 정부는 늘어나는 통상정책 수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정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당시 여러 부처에 산재해 있던 통상정책 기능을 신설된 외교통상부 내 통상교섭본부에 집결시켰다. 우리나라 최초로 체계화된 통상정책 기관이 만들어진 것이다. 통상교섭본부 첫 5년은 한·칠레 FTA 협상과 비준에 투입됐으나, 이것을 제외하면 조직 및 국가 차원에서 특별히 주목받을 만한 통상정책이 없었다.
당시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우리나라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때 통상 당국은 미국과의 FTA 협상을 추진했다. 우리나라와의 FTA 협상에 냉담하던 미국무역대표부(USTR) 고위관계자가 2004년 중반 관심을 표명했고, 우리 통상 당국은 그해 연말 칠레에서 개최된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에 양국 간 협의를 성사시켰다.
한·미 FTA는 이전에 체결한 FTA와는 차원이 달랐다. 먼저 협상 참가자의 숫자가 크게 늘어났다. 공식 협상에 참여하는 우리나라 통상 당국자와 전문가가 보통 50~100명인 데 비해 한·미 FTA 협상에는 협상 의제에 따라 300여 명이 참여하기도 했다. 다음으로 협상 분야가 크게 늘어났다. 대부분의 경우 상품, 농업, 서비스, 무역규범, 투자, 지식재산권 보호, 분쟁해결 등에 대한 작업반을 주축으로 세부 의제에 대한 소규모 작업반을 만들어 협상하게 된다. 한·미 FTA에서는 자동차·의약품·노동·환경 등 특정 산업 및 신통상 의제 등에 대한 별도 작업반을 구성해 협정문을 협의했다. 또한 언론과 기업은 물론이고 지방자치단체 등에서도 높은 관심을 보였고, 국민의 알 권리 차원에서 협상 당국은 보안유지를 하면서도 협상의 진행상황을 알리는 데 적극성을 보였다.
이전에도 더러 통상협상이 있었지만 주세법 분쟁 등 대부분 특정 사안에 관한 것이었다.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을 했지만 개도국으로서 특별지위를 인정받아 우리가 챙겨야 할 협상의 범위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과의 FTA 협상 과정에서 우리나라 통상 당국자들은 사상 처음으로 우리나라 통상제도 전반을 검토하고 협상전략을 수립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통상교섭본부는 조직을 확대하고 전문인력을 대거 확충했다. 한·미 FTA 협상 전 통상교섭본부는 100여 명의 인원으로 구성됐으나 협상 타결 시점에는 200명대로 늘어났다. 그리고 분야별 담당자와 전문인력 충원으로 거의 대부분의 협상 분야를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게 됐다. 이로 인해 이후 유럽연합(EU)·캐나다·호주 등과의 다수 양자 간 FTA 협상을 차질 없이 수행할 수 있게 됐다.
2005년과 2006년 상반기에 수차례 탐색전을 가지면서 상대국의 관심사항과 협상전략을 파악하고 상대국 정책에 대한 이해수준을 높여 2006년 6월 양국은 공식 협상에 돌입했다. 2007년 4월 초 협상을 타결했으나 2008년 미 대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면서 전임 공화당 정부가 타결한 협정에 대해 수정을 요구했다. 2010년 10월 추가협상을 벌여 이듬해 2월 합의문에 서명하고 2012년 3월 15일 공식 발효하게 됐다.
한·미 FTA 시련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2016년 미 대선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FTA가 미국에게 불리하게 체결됐다고 주장하며 개정협상을 요구했다. 반중국 통상정책, 보호무역주의, FTA 반대 등의 공약으로 미 유권자의 표심을 잡은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우리나라를 압박했다. 미국이 이미 발효된 협정을 일방적으로 개정할 것을 요구하면서 통상분야 조치 외에 안보 관련 사항까지 거론하자 우리나라는 협상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내 정치·경제적 부담이 컸던 우리나라 통상 당국은 2017년 말 개정협상 공청회를 2회 개최하고, 이듬해 미국에 수출하는 화물자동차(픽업트럭) 관세 20년 연장, 국내 수입하는 미국 자동차의 안전기준 등에 대한 미국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는 선에서 협상을 마무리했다. 미국의 핵심 관심사항은 미국이 부과하는 픽업트럭 25% 관세였다. 포드(Ford)·지엠(GM) 등 미국 자동차 회사들은 승용차 부문에선 적자를 내지만 픽업트럭 부문에선 흑자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25% 관세는 미국이 FTA에서 크게 양보한 사례가 적어 미 자동차 회사들의 불만이 컸다. 결국 우리나라는 미국의 픽업트럭 25% 관세 20년 연장(2021~2041년)에 동의했다. 한·미 FTA에서는 미국의 안전기준에 따라 제조된 미국 자동차가 연간 제작사별 최대 2만5,000대까지 우리나라로 수출될 수 있도록 제한돼 있었다. 미국은 규모의 경제를 들며 상한선을 올려줄 것을 요청했고, 결국 5만 대로 합의해주었다. 자동차뿐 아니라 몇몇 라벨 표시 규정 등 무역거래에 가해지던 한국의 규제부담이 줄어들게 됐다.
우리나라 통상정책 의제 가운데 한·미 FTA만큼 경제효과에 대한 논란이 컸던 사례를 찾기 어렵다. 이미 협상 과정에서 경제효과에 대한 논란이 제기됐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이 발표한 경제효과 추정치 크기가 달랐기 때문이다. 분석방법이나 분석대상에 따라 추정치 크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지만, 한·미 FTA에 대한 관심이 높다 보니 추정치 차이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협상 당시 시점에서 동태적 모형을 이용해 파급영향을 추정하는 사전적 파급영향에 대한 추정치는 최대 7%(10년간 동태 누적치)까지 제시됐다. 이는 시장개방·자본축적·규제완화 등 협정 내용의 전 분야의 영향을 추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상품시장 개방만을 정태적인 모형으로 추정한 연구가 제시하는 경제효과는 0.3% 내외로 낮게 나와 장기 동태 추정치의 정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FTA 발효의 경제효과를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FTA 효과는 무역·투자·서비스 등에 대한 양국 간 거래로 인한 대외적 파급영향과 국내 제도 개선으로 인한 대내적 파급영향으로 나눌 수 있다. 문제는 개방화와 세계화로 대내경제와 대외경제가 서로 연관돼 있고, FTA 발효 이후 수많은 통상 의제와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에 FTA 파급영향을 특정해 추정하기 어렵게 된다.
무역이론 및 FTA 경제통합론에 따르면, 상대국의 경제규모가 크고 보호무역 수준이 높다면 FTA 체결로 높은 경제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물론 어떤 형태의 협정을 체결하는가가 관건이 될 것이다.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22조9,000억 달러로 우리나라 1조8,000억 달러의 13배다. 보호무역 수준은 낮은 편이지만, 미국은 많은 상품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FTA 체결에 따른 무역자유화는 높은 경제효과를 발생시키게 된다. 이로 인해 많은 국가가 미국과의 FTA 체결을 희망하고 있다.
FTA의 영향을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미국과의 FTA 발효 이후 우리나라는 미국과의 교역에서 1,800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협정 발효 전인 2011년 우리나라의 대(對)미국 수출액은 562억 달러였으나 10년 후인 지난해엔 959억 달러로 늘어났다.
더구나 FTA 경제효과는 선점효과가 중요하다. 경쟁국보다 앞서 체결함으로써 특혜적 지위를 누리는 기간이 길수록 경제효과는 커지게 된다. 미국과의 FTA를 우리나라는 10년 전에 발효시켰으나 일본은 2020년 발효시켰다. 일본 기업들이 자국 통상 당국에 한·미 FTA와 같은 협정을 미국과 체결하도록 요청했다. 2013년 일본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통해 미국과의 FTA를 우회 체결하려고 했지만, 2017년 초 트럼프 대통령이 TPP에서 탈퇴하면서 이 구상이 물거품됐다. 일본은 부랴부랴 미·일 FTA를 추진하면서 자동차·농업·디지털 통상 등에서 대폭 양보하고 미국과의 협상을 타결했다.
한·미 FTA는 앞으로 더 중요해질 수 있다. FTA는 흔히 경제분야 동맹을 체결한 것으로 해석되는데, 오늘날 미·중 패권 갈등이 심화되고 있고 미국은 중국에 대해 경제분리(디커플링)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동맹국과의 연대를 통해 중국을 압박하는 구상을 추진 중인데, 이러한 상황에서 한·미 FTA는 양국 간 경제협력에 중요한 장치가 될 것이다.
또한 코로나19 팬데믹과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안정적 수출시장 확보와 중간재 확보는 각 국가의 핵심 통상과제가 되고 있다. 미·중 디커플링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한 ‘팩토리 아시아’가 재조정되고, 우방 중심의 공급망으로 재편되고 있다. 세계에서 대중국 의존도가 가장 높은 우리나라는 중국과의 관계 및 리스크 관리를 하면서 새로이 재편되는 글로벌 공급망에 빨리 편승해야 한다. 미국과의 FTA는 불확실성이 상존하는 오늘날의 글로벌 통상환경을 헤쳐나갈 수 있게 만드는 핵심적인 통상수단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미국은 FTA 이행을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상대국에게 시정을 요구한다. 2015년 10월 한·미 정상회담 후 공동기자회견에서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한·미 FTA 첫 3년에 대해 양자 간 무역이 증가했지만 원산지 검증, 한국 내 금융정보의 해외 이전 등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다. 또한 한국 공정거래위원회가 미국 기업의 불공정행위 여부 조사에서 충분한 방어권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이의를 제기했다.
원산지 검증 문제는 한·미 FTA상의 통관절차 원활화 규정에 따라 미국산 수입 쇠고기에 대한 검역을 글로벌 수준으로 완화해달라는 것이었다. 광우병 파동 직후 한때 엑스레이를 동원해 수입쇠고기를 전수 조사해 뼛조각을 찾아내던 상황을 언급한 것으로 해석됐고, 이후 합리적인 수준으로 검역절차를 개선했다. 한국 내 금융정보의 해외 이전 허용은 한·미 FTA에 규정되지 않은 사항이지만, 미국의 테크기업들은 이를 요구해왔다. 이는 국내의 관련 제도 변경을 요청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데이터 정책이 변경되지 않는 한 미국에만 허용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최근 한·미 FTA 이행과 관련, 미국의 요구가 과거와 다른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2021년 11월 한·미 FTA 공동위원회 참석차 우리나라를 방문한 캐서린 타이 USTR 대표는 한·미 양국이 한·미 FTA 노동 장(章)에 기반한 두 나라 간 협력 강화를 제안했다. 우리나라 노동부는 한국 정부가 국제노동기구(ILO) 3개 핵심 협약을 비준하는 등 노동기본권을 신장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고 설명했지만, 타이 대표는 제3국에서의 노동권 증진을 위한 협력과 국제 공급망에서의 강제노동과 착취적 관행 근절을 위한 양자 협력을 제안했다. 이는 현재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중국의 신장 위구르인 인권 탄압에 대한 대중국 제재에 동참할 것을 ‘한·미 FTA 노동 장’을 근거로 요구한 것이다.
한편, 협정 이행의 문제를 제기하는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미국의 협정 불이행 문제를 제대로 제기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한·미 FTA에는 자격증 상호 인정, 이민비자 등 우리나라가 미국 측에 요구한 사항들이 포함돼 있다. 협정 이행 10년간 우리 통상 당국이 미국의 협정 이행을 점검하고 미진한 사항에 대한 부분을 요구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또한 전임 트럼프 행정부가 자국의 1962년 무역확대법상의 안보-통상 연계 조항을 근거로 철강과 알루미늄에 대해 일방적으로 고관세 부과 계획을 통보했지만, 우리나라 통상 당국이 한·미 FTA 협정 취지에 어긋난다는 점을 미국 측에 제시해 관철하지 못한 점도 아쉽다. 한·미 FTA에는 새로운 관세 부과를 방지하는 조항이 포함돼 있으며, 설령 다른 이유로 추가관세를 부과할지라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현 USMCA) 회원국인 캐나다와 멕시코에게 면제시켜준 점을 들어 미국에서 조치 철회를 요구한 점이 아쉽다. 하지만 우리나라 통상 당국은 WTO에서 허용하지 않는 쿼터를 설정하고 미국과 철강관세 협상을 타결했다.
한·미 FTA는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체결한 통상협정 중 최고 수준의 협정이었다. 미국이라는 통상 대국과의 FTA 협상은 결코 쉽지 않았다. 분야별 협상단을 꾸리고 관련 협회, 전문가, 이해관계자 등과의 협력과 소통을 통해 협상전략을 수립하고 대응했기에 국익에 부합하는 높은 수준의 협정을 도출할 수 있었다. 몇 번에 걸쳐 협상 위기가 있었지만, 양국 대통령 간 전화통화와 정상회담 등으로 돌파구를 열었고 우리 대통령은 협상목표와 임무, 더 나아가 책임소재를 협상단에게 명확하게 부여함으로써 상대국 파트너와의 맞대결에서 우리나라의 입장을 관철할 수 있도록 했다. 많은 이슈는 다른 부처와 연관돼 있어 협상 당국이 마땅한 전략을 제때에 수립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나라 첫 FTA인 한·칠레 FTA 협상에서 하나의 이슈가 해소되지 않아 결정적인 순간에 협상 타결이 불발된 사례도 있었다. 한·미 FTA 협상에서는 정치지도자의 결단으로 이러한 상황이 대폭 줄었다.
통상협정이 경제이익과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대 상황에 맞게 개정돼야 한다. 미국의 요구에 의해 이미 두 차례 개정을 했지만, 한·미 FTA도 CPTPP 등 최근 체결된 다른 협정에 비해 낡은 협정이 되고 있다. 신흥개도국과의 신규 FTA 체결도 필요하지만, 기발효 협정도 시대에 맞춰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특히 공급망 협력은 한·미 양국이 필요로 하는 분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미 FTA 발효 이후 양국 간 통상 갈등이 많이 줄었다. 갈등 소지가 있는 현안을 사전적으로 연구하고, 미국과 협의해 한·미 FTA에 반영시켜 나가는 것이 불확실성이 높은 신냉전 시대 우리나라의 생존전략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