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했다. 한국은 높은 수준의 양자 협정인 한·미 FTA를 계기로 주요 국가들과 잇달아 FTA를 체결했다. 미국과의 선제적 FTA 체결은 교역증대를 가져오면서 한국의 산업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한·미 FTA 이후 10년간 통상환경도 급변했다. 양자 협정보다는 다자 FTA 논의가 활발해졌고, 최근에는 공급망 이슈가 급부상하면서 새로운 통상환경이 펼쳐지고 있다.
한국은 일본과 FTA를 추진하다가 미국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일본의 자동차·부품·농업 경쟁력을 감안할 때 양자 협정을 맺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였다. 한·미 FTA는 스크린쿼터, 쇠고기 수입, 건강보험 약가, 자동차 배기가스 기준 등 4대 선결요건을 둘러싼 잡음이 컸다. 하지만 10주년을 맞은 지금 한·미 FTA는 국부 증가와 한국의 산업경쟁력 제고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먼저 한·미 FTA는 양국 간 교역을 증대시켰다. 제조업 부문은 관세 철폐로 무역수지가 눈에 띄게 개선됐다. FTA 발효 이후 대(對)미국 교역 증가율은 2017년을 제외하고 대(對)세계 교역 증가율을 줄곧 웃돌았다. 한·미 FTA는 노동생산성을 개선하고 기업의 기술진보를 동시에 유발, 한·미 양국 모두의 총 생산성도 제고하고 있다는 평가다. 기업은 제조업 부문 저부가가치 내수기업 수가 줄고, 고부가가치 수출 제조기업 수가 늘어났다. 로테크(Low-Tech) 내수 제조기업의 퇴출과 하이테크(High-Tech) 수출 제조기업으로의 전환에 따른 결과다.
한·미 FTA는 높은 수준의 양자 협정이었다. 이후 한국은 유럽연합(EU)·인도·호주·캐나다·중국·베트남·영국 등 주요국과 FTA를 잇달아 체결하면서 FTA 주도국이 됐다. 최근 들어 양자 협정 위주의 FTA는 다자 FTA 체제로 전환되는 추세다. 하지만 다자 협정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다자간 FTA는 국가별로 원료-생산-소비를 맡아 역할 분담을 할 때 시너지가 난다.
미국이 CPTPP의 모체인 TPP를 추진할 때는 동남아(원료), 멕시코·일본(생산), 미국(소비) 구도의 역할 분담을 생각했다. 미국 중심의 공급망 체계를 갖추면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트 대통령이 취임 후 신보호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TPP를 탈퇴했다. 미국 노동자들의 표심을 결집시키는 데 FTA가 효과적이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 결과 CPTPP에서 소비를 해줄 국가가 없어졌다. CPTPP로 회원국들 사이에 무역증대 효과가 얼마나 있는지 불분명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까닭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등장 이후 한·미 양국은 FTA 협정문을 다시 썼다. 자동차 분야는 미국산 수입자동차에 대해 안전·환경 기준의 유연성을 확대하는 쪽으로 재합의했다. 미국의 요구를 일부 반영해 미국 내 자동차 안전기준을 준수한 경우 미국 자동차 제작사별로 연간 5만 대까지 한국 안전기준을 준수한 것으로 간주키로 했다.
한국에 수입되는 차량에 장착되는 수리용 부품에 대해 미국 기준을 인정해준 것이다.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한 철강관세 부과 조치에 대해선 당시 한국산 철강의 대미 평균 수출량(2015~2017년 383만 톤)의 70%(268만 톤)에 해당하는 쿼터(2017년 대비 74%)를 설정하는 데 합의했다. ‘관세’는 면제받았지만 미국 시장 수출물량을 제한하는 쪽으로 타협한 셈이다. 투자자-국가 분쟁해결(ISDS) 제도 개선도 한국 측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한국에 투자한 미국 투자자·자본이 이 제도를 남용해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차단하고 이 제도로 한국 정부의 정당한 정책·주권 권한이 침해받지 않도록 하는 내용을 협정문에 반영하면서다.
통상정책의 중심이 자유무역에서 공급망으로 전환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글로벌 공급망 위기 이후 국가별로 각자도생 움직임과 함께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공급망 체계 가동이 예상된다. 자유무역을 기반으로 한 WTO 체제가 사실상 붕괴위기에 직면했고, 역내 공급망 안정화가 통상정책의 주요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무엇보다 자유무역시스템 아래에서의 글로벌 분업 체계가 흔들리자 미국은 긴박하게 공급망 점검에 나서고 있다. 중국을 배제하는 새로운 경제공동체를 구성하려는 미국의 움직임은 한국에겐 위기이자 기회라는 평가다. 한국은 자동차·반도체 등 주요 산업에 유리한 방향으로 공급망 다변화 방안을 제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공장을 철수하진 않되 미국의 리쇼어링(Reshoring)에 발맞춰 한국에 추가로 공장을 짓거나 미국 생산라인을 신설·확장해 투자를 늘릴 수 있다. 코로나 방역 경험을 살려 의료장비 공급망 다변화를 위해 한·미·일 협력을 제안하거나 친환경 에너지 분야에서 주도적으로 나서 에너지산업의 새 활로를 모색할 수도 있다.
디지털과 기후, 환경 등이 주요한 신통상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미국이 지난 연말 논의를 개시한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도 디지털 경제 표준 마련과 탈탄소화 및 청정에너지 체계 구축이 핵심이다. 디지털 무역은 전자상거래를 넘어 앱, 플랫폼, 클라우드 컴퓨팅 서비스, 영화·음악·교육 콘텐츠, 데이터 등 모든 것이 교역 대상이 될 수 있다. 기존 무역규범으로는 담아내기 어려운 수많은 영역이 새로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글로벌 전체로 합의한 디지털 무역의 규칙은 아직 없다. 지금은 싱가포르가 주도하는 디지털경제동반자협정(DEPA) 정도가 눈에 띈다. 향후 데이터 이전 자유, 로컬 서버 금지 등 디지털 무역의 쟁점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이 예상된다. 기후 및 환경도 주요한 통상 어젠다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EU와 철강관세 분쟁을 종결하면서 “탄소배출량을 감안한 철강과 알루미늄 무역 합의를 협상해나가겠다”며 “중국 같은 나라에서 오는 ‘더러운 철강’이 우리 시장에 접근하는 것을 제한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