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신남방정책과 인도·태평양 정책의 협력

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사진 한경DB

2017년 한국을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전 미국 대통령은 자국의 인도·태평양 전략(Indo-Pacific Strategy)에 한국이 동참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미국의 인·태 전략은 한국에서 낯선 개념이었다. 정부도 이런 미국의 요청에 다소 혼선을 일으켰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인도·태평양은 한국을 포함한 지역 국가들의 지정학적·지경학적 상황을 논하고 전략을 구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됐다. 한국의 신남방정책도 무관하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은 2021년 10월 26일 개최된 제22차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그동안 신남방정책에 기반한 한국과 아세안 간 협력 성과를 평가하고, 신남방정책 협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인도·태평양이라는 담론이 지역에 빠르게 확산되며 새로운 지역의 명칭으로 자리 잡는 듯하다. 한국은 한때 ‘아시아·태평양(Asia-Pacific)’ 국가로 스스로 정의했다. 아태경제협력체(APEC; 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가 아마도 아시아·태평양이란 지역 개념하에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제도일 것이다. 지역 개념은 변형되고 진화한다. 1998년 아시아 경제위기를 겪은 국가들을 중심으로 위기극복을 위한 다자협력을 시작했다. 아세안+3, 동아시아정상회의(EAS; East Asia Summit) 등 제도가 이때 출범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아시아 경제위기 이후 이 지역을 규정하는 이름은 ‘동아시아(East Asia)’였다. 이제 아태 지역, 동아시아 지역 등의 명칭이 새로 부상하는 ‘인도·태평양’에 자리를 내주고 있는 듯하다. 이 흐름에서 한국만 빠져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역 이름은 단순하게 지역을 지칭하는 기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지역 개념은 우리와 직접적으로 전략적·경제적 상호작용을 하는 이웃 국가가 어디까지인가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과거 아태 지역 포함 여부가 불분명했던 인도는 한국의 지역 외교정책과 전략에서 소홀히 취급됐다. 마을로 치면 인도는 우리 마을 사람이 아닌 셈이다. 다른 마을 사람과의 상호작용은 우리 마을 사람과 이루어지는 상호작용과 양적·질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국이 대외 전략을, 지역 전략을 구상하고 지역 국가들과 양자적·다자적 상호작용을 구상할 때 우리 지역 범주 밖 국가들에 대한 고려는 상대적으로 가벼울 수밖에 없다.
아태, 동아시아에서 인·태 지역으로 확장은 한국이 대외정책과 지역전략에서 고려해야 할 변수가 크게 증가했음을 의미한다. 새로운 지역 개념은 한국의 이웃 국가를 새로 구성한다. 새로운 구성원은 지역 내부 상호작용의 동학을 재구성한다. 대체로 인·태 지역은 미국을 포함한 서부 해안에서 출발하는 태평양을 모두 포괄하고 동북아, 동남아를 거쳐 인도양을 건너 인도, 더 넓게는 인도 서부의 인도양을 포함하고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 이른다. 남북으로는 러시아 극동지역과 중국을 포함하고 동북아, 동남아를 거쳐 호주·뉴질랜드, 그리고 남태평양 도서국까지 확장된다. 한국이 인도·태평양 국가라고 가정한다면 이 넓은 지리적 범위에 포함되는 소지역, 개별 국가, 그 안의 다자협력체, 이 넓은 지역의 이슈들이 모두 한국 대외정책의 일차적 고려대상이 된다. 우리 지역을 어떻게 규정하는가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인 전략적·경제적 함의를 가진다.

신남방정책과 인·태 전략, 어디쯤 와 있나?

한국도 나름의 인·태 전략을 실천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태 전략 혹은 지역을 선언하거나 수용한 적은 없다. 한국에서 인·태는 아세안과 인도를 대상으로 한 한국의 신남방정책(New Southern Policy)과 다른 국가의 인·태 전략 간 협력으로 나타난다. 2019년 11월 한국 외교부 차관보와 미국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의 회동에서 중요한 문건 하나가 발표됐다. “신남방정책과 인도·태평양 전략 간 협력 관련 설명서(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 Working Together to Promote Cooperation between the New Southern Policy and the Indo-Pacific Strategy: Factsheet)”라고 이름 붙인 이 문건이 공식적으로 한국과 미국, 한국의 신남방정책과 미국의 인·태 전략 간 협력의 시작이다. 2020년 한·미 양국은 한·미 간 신남방정책과 인·태 전략의 협력을 재확인했다.
2021년 한국의 신남방정책과 미국의 인·태 전략 간 협력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2021년 신남방정책과 인·태 전략은 구체적으로 동남아/아세안 지역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2020년까지 한국 외교부 내 북미국이 협력을 주도했다면 2021년부터는 아세안국이 전면에 나섰다. 아세안 지역에서 신남방정책과 미국의 인·태 전략이 무엇을 함께할 것인가라는 구체적인 질문으로 초점이 옮아갔다. 5월 한국 외교부 아세안국장과 미국 국부무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아세안에서 신남방정책과 인·태 전략의 협력을 논의했다. 같은 달 한·미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미국 바이든 대통령은 신남방정책과 미국 인·태 전략 간 협력을 공식화했다. 마찬가지로 2021년 2월 한국 외교부 아세안국과 호주 외교부 아세안국은 호주의 인·태 전략과 한국의 신남방정책이 아세안에서 어떤 협력을 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인·태 전략이 미국의 전유물이 아닌 것처럼 신남방정책과 인·태 전략의 협력도 한·미 양자 협력을 넘어선다. 신남방정책과 인·태 전략 간 협력은 인·태를 선언한 국가와 신남방정책 간 협력을 모두 포괄한다. 미국·호주·일본·인도의 인·태 전략은 서로 다른 지리적 범주, 정책 강조점을 가진다. 인·태를 ‘전략(Strategy)’이 아닌 ‘지역(Region)’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아세안도 아세안 특유의 포괄성(Inclusiveness)을 특징으로 하는 ‘인도·태평양에 대한 아세안의 관점(AOIP; ASEAN Outlook on the Indo-Pacific)’을 2019년 선언했다. 유럽 국가 중 프랑스는 이미 2018년부터 인도·태평양을 공식화했다. 2020-21년 유럽연합(EU)과 독일, 네덜란드, 그리고 EU를 탈퇴한 영국이 인·태 정책을 발표했다.
이제 한국의 신남방정책과 다른 국가들의 인·태 전략 간 협력, 더 나아가 한국의 지역 전략으로 한국의 독자적 인·태 전략을 만드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한국의 높아진 국제적 위상과 역량을 고려하면 이제 한국도 나름의 지역 전략이 필요하고, 신남방정책을 핵심으로 하는 더 큰 한국의 인·태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지금 당장 한국형 인·태 전략의 구상과 선언이 어렵다면 기존 인·태 전략을 가진 국가들과 한국의 신남방정책 간 아세안 방면에 대한 협력을 주도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아세안은 신남방정책이 정책 대상으로 했던 지역이다. 지난 5년간 신남방정책하에서 아세안 지역에 많은 성과를 내왔다. 이에 주목한 미국과 호주, 유럽 국가들이 한국의 신남방정책과 자국의 인·태전략 간 협력을 원하고 있다. 다른 국가들의 인·태 정책과 한국의 신남방정책이 힘을 합쳐 아세안 국가에 이니셔티브를 취한다면 이는 한국이 인·태에 참여하는 길이기도 하고 신남방정책을 강화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세계 우주산업 분야별 매출 현황(단위: 억 달러)

구분 인·태 전략 신남방정책
지리적대상 태평양·동인도양에 위치한 국가들 아세안, 인도
핵심 협력국 일본, 호주, 인도, 아세안 아세안
목표 중국 견제를 통한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 수호 한국 경제·외교의 다변화
세부 목표 • 미국의 군사력 증강 및 미국 주도의 안보 네트워크 강화
• 일대일로에 대항한 시장질서 및 규범 확립
• 민주주의 및 굿 거버넌스 촉진
• 평화롭고 안전한 역내 안보환경 구축
• 양자 교역 및 투자 확대
• 인적·사회문화 교류를 통한 상호 이해 증진
중점 협력 분야 안보 동맹·파트너국과의 국방·안보 협력 강화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지지 확보 및 인간안보 중심의 비전통적 안보
경제 시장질서 확립 및 민간투자 환경 조성 (디지털·인프라·에너지 분야를 중심으로) 무역투자 증진, 인프라 개발, 신산업 및 스마트 협력, 한국기업의 시장 진출 촉진
사회 인·태 지역에서의 민주주의 확산 및 반부패·투명성 제고 쌍방향 인적문화 교류 확대, 신남방지역의 거버넌스 및삶의 질 개선
자료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신남방정책과 인·태 전략의 협력, 무엇을 할 것인가?

미국을 포함한 인·태 정책을 가진 국가들과 신남방정책이 동남아 방면에서 협력할 수 있는 많은 분야 중 한국의 장점, 동남아의 수요를 감안하면 디지털 분야와 해양 분야 협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아세안 국가들은 코로나19 이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디지털 연계성(Digital Connectivity)을 꼽고 있다. 한국은 디지털 분야에서 강점을 가진다. 다른 국가의 인·태 전략과 신남방정책이 아세안 지역의 디지털 역량 강화, 인프라 구축, 디지털 연계성 강화, 디지털 규범, 관련 제도 및 표준(Standard) 형성, 나아가 사이버 안보와 데이터 안전(Data Safety) 분야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기술적인 지원, 인프라 지원뿐만 아니라 관련 규범·제도·표준 형성에 관한 조언과 지원이 필요하다. 디지털 관련 규범·법 제도·표준은 향후 이들 국가의 디지털 관련 발전 경로를 형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관련 제반 거버넌스, 민주주의와 인권에까지 함의를 가진다. 또한 인프라 기반 건설과 표준의 형성은 향후 디지털 분야에서 한국의 시장 확대와 직결될 수 있다.
인·태 국가를 연결하는 동맥은 해양이다. 동남아, 특히 해양부 동남아 국가들에게 해양 문제는 국가의 안보와 경제적 이익에 매우 중요하다. 몇몇 동남아 국가는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해양 영유권을 놓고 분쟁을 벌이고 있다. 동남아 국가 영해에서 일어나는 중국의 불법·비보고·비규제 어업(IUU fishing; Illegal, Unreported, Unregulated fishing)은 경제적 손실뿐만 아니라 국가 안보와 주권이 걸린 문제다. 역량과 장비가 부족한 동남아 국가는 이런 불법적 행동에 맞서 자신의 해양을 제대로 감시하고 통제하기 어렵다. 신남방정책과 다른 국가의 인·태 전략이 협력을 통해 동남아 국가들의 해양상황인식(MDA; Maritime Domain Awareness) 역량 증진에 이바지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더 나아가 동남아 국가들의 경제성장을 위해서 항만의 현대화·디지털화가 긴요하다. 이미 한국과 동남아 국가 사이에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해양환경 보전과 관련된 협력도 한국의 신남방정책과 다른 국가들의 인·태 전략 간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는 분야다.
신남방정책과 인·태 전략 간 협력이 가진 중요한 과제가 두 가지 있다. 한국의 신남방정책과 미국을 포함한 지역 국가들의 인·태 전략 간 협력이 지향하는 바를 명확히 해야 한다. 신남방정책도, 한국형 인·태 전략도 우리의 명확한 목표와 지향점이 부재하면 다른 국가의 인·태 전략에 휘둘리기 쉽다. 신남방정책과 인·태 전략 간 협력은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에 대한 한국의 동조 혹은 편승이 아니다. 앞서 강조한 것처럼 미국의 인·태 전략은 많은 국가가 가진 인·태 전략 중 하나일 뿐이다. 한국의 신남방정책 혹은 향후 한국이 마련할 수도 있는 한국형 인·태 전략은 한국만의 목표와 지향점을 가져야 한다. 이 목표와 지향점을 실현하는 전략을 설정하고 한국의 전략과 다른 국가의 인·태 전략이 조응하는 부분이 있다면 적극적인 협력을 모색해 시너지를 내야 한다.
신남방정책과 인·태 전략의 협력 혹은 한국형 인·태 전략을 위한 국내적 기반도 필요하다. 대외정책은 일반 국민의 관심사와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지지를 얻지 못하는 대외정책은 추진 동력을 찾기 어렵다. 왜 인·태 지역이 중요한지, 왜 신남방정책과 인·태 전략 간 협력이 필요한지, 이 협력이 어떻게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우선해야 한다. 신남방정책과 다른 국가의 인·태 전략 간 협력, 한국형 인·태 전략 추진에는 많은 자원도 필요하다. 대상과 이슈가 확대된 만큼 투입되는 자원도 많을 수밖에 없다. 많은 자원을 동원해 다양한 정책 수요자와 효과적 협력을 하기 위해서 정부 내 정책 조율은 필수다. 특정 부처를 넘어선 범부처 정책 조율을 위한 제도가 필요하다. 대외정책을 담당하는 외교부도 특정 국가와 지역을 넘어서 인·태 지역 전체를 포괄해 정책을 조율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가 있어야 마땅하다.

  • 한국의 신남방정책 혹은 향후 한국이 마련할 수도 있는 한국형 인·태 전략은 한국만의 목표와 지향점을 가져야 한다. 이 목표와 지향점을 실현하는 전략을 설정하고 한국의 전략과 다른 국가의 인·태 전략이 조응하는 부분이 있다면 적극적인 협력을 모색해 시너지를 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