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입안자들은 “회원국들이 자신들의 필수적인 안보이익(essential security interests)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간주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소위 안보 예외의 필요성을 인식했고, 그 결과 GATT 제21조 안보 예외 (Security Exception) 조항이 도입됐다. 이후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의 일부인 GATT 1994에서도 동 조항이 수용됐다. GATT 제21조는 WTO 회원국이 안보 예외조항을 근거로 취하는 필요한 조치에 대해서는 GATT상의 모든 의무로부터 면제되도록 허용하는 포괄적인 예외조항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WTO 서비스무역일반협정(GATS), 무역 관련 지식재산권협정(TRIPS) 및 정부조달협정 등에도 안보 예외규정이 포함됐다. 나아가 자유무역협정(FTA)이나 투자협정에서도 안보 예외조항을 포함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글 고준성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겸 디지털 트레이드 포럼 위원장 사진한경DB
대표적 안보 예외조항인 GATT 제21조(b)호는 체약당사자가 “자신의 필수적인 안보이익의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고 자신이 간주하는 조치(any action which it considers necessary for the protection of its essential security interests)”를 취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규정해 국가안보 조치를 취하는 국가가 그 필요성을 스스로 판단하는 소위 ‘자기판단 조항(self-judging clause)’이다. 또한 공중도덕의 보호를 위해 필요한 조치 등 일반적 예외를 규정한 GATT 제20조의 경우 그러한 조치가 자의적 또는 정당화할 수 없는 차별적 수단이거나 국제무역에 대한 위장된 제한이어서는 아니 된다는 두문(chapeau clause)을 두고 있음에 비해 제21조는 국가안보 예외의 오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모두 조항도 없다. 이와 같이 GATT 제21조는 회원국들이 동 조항을 원용해 자신의 GATT상 제반 의무를 일탈할 수 있는 상당한 재량을 부여하는 관계로 동 조항의 남용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지난 GATT 체제하에서는 물론 WTO 출범 이후 최근까지 회원국들의 안보 예외조항의 원용 사례는 매우 제한적이었고, GATT/WTO 분쟁해결기관을 통해 판정까지 이른 사건은 더욱 드물다. 특히 안보 예외조항의 재량적 성격에 대해 확고한 지지 입장을 견지해온 미국은 GATT 제21조를 기초로 자국의 1962년 무역확장법 제232조를 독자적으로 도입했으나 제232조에 따른 수입제한조치를 매우 조심스럽게 운영했다. 요컨대, 일부의 우려와 달리 안보 예외조항은 GATT 및 WTO 체제하에서 주목받지 못한 규정이었다.
트럼프 행정부가 2018년 7월 자국 및 자국 기업의 핵심기술을 공격적으로 탈취하고 지식재산권을 침해한 중국의 불공정 관행에 대해 자국 통상법 제301조에 기초한 추가관세 부과 형태의 일방적 무역 제재를 발동하고, 이에 대해 중국이 보복관세를 취함으로써 미·중 간 사실상 무역전쟁이 시작됐다. 그런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양국 간 무역협상이 난항에 빠지자, 트럼프 대통령은 국가안보를 이유로 2019년 5월 14일 중국의 정보기술(IT) 기업 5곳과 개인 1명을 미 상무부의 2019년 수출관리규정(EAR; Export Administration Regulations)에 따른 ‘Entity List(우려거래자 리스트)’에 등재함으로써 이들 중국 기업에게 미국의 민감 기술 및 관련 제품의 수출을 통제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여기에는 중국의 통신 거대 기업인 화웨이가 포함됐는데 미 상무부는 화웨이가 미국의 국가안보 이익에 반하는 활동에 개입했다는 합리적 근거를 갖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후 중국의 기술 기업들이 계속 Entity List에 추가돼 2021년 7월 기준 등재 중국 기업 수가 총 260개에 달하고, 중국의 최대 반도체 제조기업인 SMIC도 2020년 8월 추가 등재됐다. 이 밖에 2019년 8월 국방수권법의 일부가 된 수출통제개혁법(ECRA; Export Commerce Reform Act)에 따른 ‘수출거래통제 리스트(CCL; Commerce Control List)’를 통해 신흥·기반기술의 수출통제를 강화했고, 2019년 5월 정보통신기술(ICT)·서비스 공급사슬 확보를 위한 행정명령을 통해 적대국의 ICT·제품 및 서비스의 미국 내 수입·이전·설치·사용을 금지 또는 제한하는 수입통제조치를 도입했는바, 이는 중국 화웨이의 5G 통신장비 등을 타깃으로 한 것이다.
한편, 미국이 일련의 대중(對中) 무역통제조치를 도입하자 미국의 핵심기술에의 접근이 어렵게 된 중국은 2015년 이후 외국인투자(FDI)로 미국의 핵심기술 기업에 접근했다. 이에 미국은 중국계 자본의 미국 기업 인수를 통해 중국의 타깃이 된 전략 분야의 미국 기술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2018년 외국인투자위험심사현대화법(FIRRMA; Foreign Investment Risk Review Modernization Act of 2018)”을 제정해 FDI에 대한 안보 심사 대상 및 절차를 강화했다. 미국은 이러한 일련의 대중 무역 및 투자 통제의 근거로서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에의 위협을 언급하는데, 동 조치가 첨단 군사 무기에 사용되는 핵심기술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국제규범상 안보 예외조항에 근거한 정당성 확보에 일응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이는 향후 통상·투자법 및 정책 입안에 있어 첨단기술에 근거한 안보 예외가 ‘이례적으로’ 자주 원용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분야 | 입법 조치 | 통제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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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 (수출/수입) 통제 |
美상무부 수출관리규정(EAR) Entity List(2019.5) | • 美기업의 기술 및 기술상품의 대중 수출통제 강화(화웨이등 등재) •2021년 7월 기준 260개 중국기업 등재 |
국방수권법의 일부인 수출통제개혁법(ECRA, 2019.8) | • ‘거래통제 리스트(CCL)’에 따른 신흥·기반기술의 수출통제 강화 | |
정보통신기술(ICT)·서비스 공급사슬 확보를 위한 행정명령(2019.5) | • 적대국의 ICT 기술·제품 및 서비스의 미국 내수입·이전·설치·사용 금지·제한(화웨이 5G통신장비 등) • 미 FCC는 화웨이 등 중국 통신장비업체 장비 제거, 교체비용 보상금(19억 달러) 확정(20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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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통제 |
외국인투자위험심사현대화법(FIRRMA, 2018.8) | • 핵심기술 취득 대미(對美) FDI(Inbound FDI)에 대한 안보 심사 강화 |
2021 국가핵심역량방위법안(2021.5, 상원 발의) | • 국가 핵심역량 위협 외국에의 미국 투자(Outbound FDI)에 대한 안보 심사 도입 |
트럼프 행정부는 외국산 철강 및 알루미늄에 대해 2001년 이후 원용되지 않았던 1962년 무역확장법 제232조에 따른 국가안보에의 위협을 이유로 고율의 수입관세를 부과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제232조를 행사했다는 비판이 적지 않고, 실제 유럽연합(EU) 등은 제232조에 기한 관세조치를 WTO 분쟁절차에 제소했다. 또한 일본은 2019년 반도체 제조에 사용되는 불화수소 등 3개 품목의 대(對)한국 수출규제를 취하면서 그 근거로서 안보상 우려를 주장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일본의 조치가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사실상의 보복조치로 간주해 WTO에 제소했다. 이들 사건에 대한 WTO 분쟁해결기관의 판정이 내려진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이 국가들이 자국 산업정책이나 정치적 동기에서 무역제한조치를 취하면서 안보 예외를 원용하는 경우가 있는바, 이는 ‘위장된’ 안보 예외 이슈로서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한편, 2022년 2월 24일(현지시간) 개시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전쟁 수행 중 발생한 러시아 군대에 의한 전쟁범죄에 대해 미국과 EU 등이 고강도의 다양한 경제제재(economic sanctions)를 실시 중인데 여기에는 금융 제재 이외에 무역 통제도 포함돼 있다. 이와 같이 침략이나 전쟁범죄에 따른 대(對)러 경제제재는 통상법상 안보 예외를 원용할 수 있는 조치도 포함될 수 있으나 일반 국제공법에 따른 조치의 행사도 가능하여 ‘혼합’안보 예외 이슈로 볼 수 있다.
이 밖에 기후변화,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에의 대응조치 가운데 GATT 안보 예외조항상 국제관계에 있어서의 기타 비상시에 취하는 조치로서 간주될 수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중 간 기술패권 경쟁이나 그 밖의 여러 요인에 따른 안보 예외조치의 부상과 확산에 대응하기 위한 우리의 과제는 무엇이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최근 미국이 실시한 일련의 대중 무역·투자 통제 조치는 ‘세계의 공장’인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는 기존 글로벌 공급체계에 큰 변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미국은 반도체·인공지능(AI) 등 첨단 전략 기술·산업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공급망의 진영화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데, 이는 글로벌 첨단 소재, 부품 및 장비의 공급 경로를 크게 변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단적인 예로서 트럼프 행정부 이후 SMIC·화웨이 등 중국 테크기업에 대한 Entity List 등재에 따른 수출입 통제 결과가 그러하다. 미국의 SMIC에 대한 수출통제 이전에는 미국기업을 포함하여 외국계기업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던 반면에 통제 이후로는 중국 기업의 비중이 급증하여 글로벌 공급망 구조가 급변하였다(그림 참조). 특히 중간재 및 자본재에 있어 매우 높은 대중국 의존도를 가진 우리나라도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따른 영향을 피하기 어렵다.
또한 일부 국가의 경우 공급망 전략 자산화에 따른 위장된 안보 예외조치도 종종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향후 안보 예외에 근거한 무역·투자 통제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의 교란 또는 불확실성 대응은 개별 기업이나 산업의 대응 역량과 범위를 벗어나는 이슈가 됐다. 이 점에서 국가적으로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필수 물자나 재화 등에 대한 공급망 안정성 확보가 긴요해졌다. 이와 관련 공급망 교란에 대한 사전 예방을 위해서는 대상 품목별로 리스크를 사전에 감지할 수 있는 조기경보시스템 구축이나 공급망 리스크 발생 확률을 가늠할 수 있는 공급망 리스크 종합지표 개발 등이 필요하고, 문제 발생 시 조기에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산·관 합동 거버넌스에 기반한 대응이 요구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핵심기술의 유출 방지를 위한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산업기술보호법’), 군사목적으로 전용(轉用)될 가능성이 높은 물품이나 기술의 수출통제를 규정한 “대외무역법”, 국가 안전에 지장을 주는 외국인 투자의 통제를 규정한 “외국인투자촉진법” 및 동 시행령 등 안보 예외 대응을 규정한 여러 국내 법령이 있다. 이와 관련, 미국은 안보 우려 기술 및 품목의 적용 대상에 AI와 양자컴퓨팅 등 신흥 기술을 포함시키고 민감한 개인정보 등을 포함하는 등 확대하고 있으며 외국인 투자, 특히 인수 투자에 대한 안보 심사를 강화하는 입법조치를 취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및 일본 등 주요 선진국도 차이가 있기는 하나 이를 따르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 역시 산업기술보호법 적용 대상 국가핵심기술을 현대화할 필요가 있고, 외국인투자촉진법령상 안보 심사 메커니즘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대중 무역·투자 통제 강화와 별도로 미 상원 주도로 핵심 산업에서의 대중 기술우위 견지와 제조역량 확보를 위한 다양한 지원을 포함하는 2020년 파운드리법안 등 여러 법안을 발의한 상태이고, 바이든 대통령도 안보 차원에서 핵심 품목의 안정적 공급망 확보를 위한 행정명령을 공포해 주목받고 있다. 이들 입법조치에는 파운드리 제조시설 현대화 및 연구개발(R&D)에 대한 보조금 지급 등 산업보조금에 해당할 수 있는 지원이 다수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간 다자간 차원에서 산업보조금 통제 강화를 선도해온 미국의 입장이 바뀐 것인가? 미국은 상기 입법 추진 논거로서 국가안보에 직결된 핵심 품목의 공급망 안전성 확보를 강조한다. 환언하면, 반도체와 같은 핵심기술 품목의 안정적인 공급망 결여는 국가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주장이다. EU도 글로벌 반도체 생산 점유율을 최소 20%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을 포함한 ‘EU 2030 디지털 나침반(Digital Compass)’ 전략을 발표했고, 일본은 공급망 강화 차원에서 전략물자에 대한 조달 지원과 첨단기술 해외유출 방지를 위한 일본 내에서의 연구 자금 지원 등을 포함한 “경제안전보장추진법안”을 추진 중에 있다. 우리나라는 중장기적으로 안보 예외조치의 확산에 따라 변화되고 있는 글로벌 공급망 구조 재편에 대응함에 있어서 우리의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수요기업이 일종의 ‘전략자산’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우리나라가 지난 2월 제정 공포한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법”은 시의적절하다.
끝으로, 상술한 대응과제를 추진함에 있어 유념해야 할 대응방향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우리의 경우 안보 예외 규정의 도입이나 운영 시, 그리고 핵심기술에 대한 정부지원 법제 도입 시 국제규범과의 합치성이 최대한 확보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의 하나로 WTO 러시아-육상운송금지 사건(2017년)에서 패널은 GATT 제21조(b)(iii)호상 (c)호상 국제관계에 있어 그 밖의 비상(emergency)시에 자신의 필수적인 안보이익의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고 회원국이 간주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규정이 “신의성실하게(in good faith)” 적용돼야만 함을 강조했다. 즉 당해 조치와 필수적 안보이익 간에 일정한 연계가 있어야만 하고, 이는 당해 조치가 필수적 안보이익과 관련해 개연성이라는 최소 기준을 충족해야만 함을 가리킨다. 또한 패널은 원용하는 회원국에 입증 책임을 부과하는 등 GATT 제21조에 대해 좁은 해석기준을 제시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이유로 미국이 최근 반도체 등 핵심 품목에 대한 R&D 지원 및 미국 내 공급망 강화를 위한 지원 입법을 도입하면서 안보 예외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고 있고, 우리의 반도체 등은 주요 경쟁국에 수출되는 주력 상품인 관계로 경쟁 수입국들로부터의 제소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를 둘러싼 미국 및 중국 등과의 통상분쟁 발생 시 국제규범은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둘째, 향후 우리의 안보 예외 관련 법령 개선 및 운영에 있어 종합적인 접근(holistic approach)을 취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로 미국 인공지능국가안보위원회(NSCAI)가 2021년 3월 발표한 보고서에서는 가치(value)를 공유한 국가와 함께 ‘첨단기술연맹(Emerging Technology Coalition)’ 등과 같은 기술동맹체계를 창설해 운영할 것을 권고하는 등 첨단 전략 기술·산업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공급망의 진영화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고, 이는 2021년 9월 공표된 ‘미국-EU 무역기술이사회(U.S.-EU Trade and Technology Council)’ 출범 공동선언에서도 재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국의 안보에 기초한 대중 무역·투자 통제는 현 중국(체제)에 대한 깊은 불신에 기인한 것이어서 이는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제 통상에서의 안보 예외 이슈는 상수(常數)가 됐고, 그 대응에 있어 산·관 합동 거버넌스에 기반한 1차적 대응 이외에 사안에 따라 경제산업 안보와 외교안보를 아우르는 고차 방정식의 해법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