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주의의 퇴조, 미·중 갈등 심화, 팬데믹 확산 등은 무역안보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세계 각국이 강력한 산업정책을 기반으로 자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에 나서면서 자유무역에 기반한 효율적 분업시스템의 붕괴를 가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통상환경의 변화는 수출 중심의 국내 기업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안보 관점에서 통상정책을 다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장기화로 공급망 악화가 예상되는 가운데 대러시아 수출통제, 국가핵심기술 보호, 외국인 투자 안보 심사, 자국 중심 공급망 재편 등 관련 현안을 키워드로 정리했다.
지난 2월 24일(현지시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이에 세계 주요국은 강력한 경제제재로 대러시아 압박에 나섰다. 미국과 유럽연합(EU), 영국, 캐나다, 일본 등은 △수출통제 △최혜국대우 박탈 △러시아 중앙은행 외환보유고 동결 등의 조치를 취했다. 특히 미국은 △반도체 △컴퓨터 △정보통신 △센서 및 레이저 △해양 △항공우주 등 7개 분야를 해외직접제품규칙(FDPR) 대상으로 선정했다.
FDPR(Foreign Direct Product Rule)은 특정 미국산 기술과 소프트웨어를 활용한 제3국 생산 제품에 대해서도 해외직접제품규칙을 적용해 미국산으로 간주, 러시아 수출 시 미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제도다. 또 미국·EU·일본·캐나다 등은 러시아의 세계무역기구(WTO) 최혜국대우 지위를 취소했거나 취소할 예정이다. 최혜국 지위를 취소하면 관세 강화 등 추가 제재가 가능하다. 하지만 대러 제재 동참으로 러시아 현지 진출 기업의 피해와 에너지 및 글로벌 공급망을 통한 부정적 영향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평가다.
정부는 국가 간 기술경쟁이 심화되자 지난해 국가핵심기술 보호전략을 마련했다. 정부는 우선 글로벌경쟁력을 확보한 반도체·디스플레이· 배터리·소부장 등 주요기술을 국가핵심기술에 추가해 보호를 강화한다. 이와 함께 보호가치가 떨어진 기술은 기술일몰제를 도입해 기술수출을 활성화하고 첨단기술에 재투자하는 선순환 구조를 확산할 방침이다.
정부는 국가핵심기술을 보유한 기관을 데이터베이스화하여 무허가 국가핵심기술 수출, 해외 인수·합병(M&A), 보호조치 미이행 등으로 인한 피해를 없애도록 지원한다. 또한, 다양한 해외 인수·합병(M&A) 유형과 외국인에 의한 국가핵심기술 보유기관 지배 기준을 현실화하여 산업기술보호법에 반영함으로써 국가핵심기술보유기관의 해외 인수·합병(M&A) 통제의 실효성을 높일 계획이다.
인력을 통한 기술유출이 날로 교묘해지는 상황에서 핵심인력 보호를 위한 지원을 강화하고 외국인에 의한 기술 탈취 예방조치도 관계부처와의 협의를 통해 중장기 계획을 마련할 계획이다.
중국 등 외국 자본으로부터 국내 기술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인 투자에 대한 심사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2015년 이전까지 한국에 대한 중국의 투자는 대부분 부동산과 관련됐다. 하지만 2015년 이후부터는 기업 인수합병(M&A)에 집중되고 있다. 특히 2020년 이후 중국의 대(對)한국 투자 중 1억 달러 이상 투자는 18건이며 총 투자금액은 119억7,000만 달러나 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2019년 중국 청산강철그룹의 한국 투자는 국내 철강시장 교란 등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며 “중국은 제3국을 통한 M&A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과 일본, 영국 등 선진국은 인공지능(AI)과 양자컴퓨팅, 나노로봇, 빅데이터, 첨단소재, 합성생물학, 데이터 등 향후 발전 가능성이 크고 산업안보와 직결되는 기술 등을 외투 심사 대상으로 명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세계 각국이 자국의 산업안보를 위해 외국인 투자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한국도 신기술, 핵심 인프라, 민감한 개인정보를 비롯해 공급망 안정화 시각에서 안보 심사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통합관리가 가능토록 해 실질적인 안보 심사가 이뤄지도록 외국인 투자 심사 제도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KIEP도 “경제안보 차원에서 외국인 투자 유치로 인해 국내 시장이 교란되거나 국내 생산업체의 도산을 초래할 가능성이 큰 경우 규제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자국 중심으로 공급망을 재편하려는 통상환경의 변화는 다자주의에 기반한 자유무역 시스템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자유무역 혜택의 축소와 역내 무역 왜곡, 국내 산업경쟁력 저하 등을 야기할 수 있어서다. 우선 안보 논리가 지배하는 폐쇄적인 공급망 짜기로 통상 프레임이 바뀌면서 무역 비용이 높아지고 소비자 후생은 떨어지는 비효율적인 구조로 퇴행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공급망 재편에 일본·유럽·인도 등 주요국의 합류 또는 독자적인 공급망 구축이 이어지는 형국이다. 공급망 재편을 위해 주요국은 산업정책을 강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미국 상원은 지난해 반도체 분야 등에 2,500억 달러를 직접 쏟아붓는 혁신경쟁법을 통과시켰다.
미국 기업이 세계를 계속 이끌기를 위해선 연방 정부가 과학· 기초연구·혁신에 투자해야만 한다는 게 바이든 정부의 시각이다. 유럽연합(EU)은 역내 배터리 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 ‘배터리 동맹’을 추진하며 반도체·배터리·수소 등 유망산업을 중심으로 역내 생산기반 구축에 주력하고 있다. 중국도 ‘제조 2025’ 전략을 앞세워 강력한 산업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 전략은 혁신역량을 키워 질적인 면에서 제조 강대국이 되려는 야심찬 목표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