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소셜 택소노미’ 추진을 통해 사회적으로 지속 가능한 기업활동의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근로자의 인권과 환경 보호 강화에 초점을 맞춘 공급망 실사법을 공식화하면서 기업들의 대대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Corporate Sustainability Due Diligence)법’으로 명명된 공급망 실사법에 따라 EU의 공급망 실사 조치가 향후 사회적 책임 이행 의무를 진 글로벌 기업은 물론, 해당 법 적용 영향권에 있는 한국 기업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문가 대담을 통해 들어봤다.
대담자 | 송세련 경희대학교 법무대학원/법학전문대학원교수 |
양병찬 대신경제연구소 부대표 |
토론 제시어 |
#1 글로벌 화두가 된 ESG경영 #2 공급망 실사 의무화 현황 #3 국내 산업계 대응전략 |
그동안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해 수많은 논의가 지속됐고, 최근 들어 환경·사회·지배구조(ESG)가 강조되고 있다. 아울러 그 척도가 되는 기업의 비재무적인 성과와 활동에 대한 평가도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그러나 비재무적 요소를 평가할 때 명확한 기준이 없으면 하나의 용어를 두고 여러 사람이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고 ‘워싱(이미지 세탁)’으로 그 의미가 퇴색되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기업활동의 비재무적 요소를 제대로 평가하고 이를 의무 공시하도록 EU가 제도화하려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됐다. 이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면서 최근 들어 투자자들이 이를 투자조건 중 하나로 내세우는 환경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기후변화에 대한 위기감이 피부에 와 닿으면서 무분별한 기업활동이 지구 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한 것 아니냐는 자각과 함께 비재무적인 정보 공시와 그에 관한 여러 규제에 대해 우호적인 사회 분위기가 조성됐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이를 정책화하는 과정이 진행돼왔다고 본다.
2011년 유엔인권이사회(UNHRC)가 채택한 ‘유엔 기업과 인권 이행원칙(UNGPs)’은 다국적 기업들의 경영활동에서 나타나는 인권 침해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이었다. 인권 실사는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다국적 기업 가이드라인’ 지원으로 환경과 거버넌스로 확대 적용되고 ‘책임경영을 위한 기업 실사 지침’으로 더욱 구체화되면서 ESG경영으로 확장되는 추세에서 EU의 소셜 택소노미가 나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소셜 택소노미는 EU 택소노미(그린 택소노미)의 사회 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ESG 측면에서 보자면 S, 즉 사회와 관련된 지표로 이해하면 된다. 환경분류체계라 할 수 있는 EU 택소노미를 만든 건 자본으로 친환경 산업 확산을 유도하기 위한 취지였다. 친환경의 기준을 명확히 해야 실행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기업지속가능성 보고지침(CSRD)의 적용을 받는 기업들은 택소노미에 따른 기업활동을 보고해야 한다. 기업활동 과정에서 이해관계자들의 사회적 가치를 보호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하는 데 기준이 되는 분류체계인 셈이다.
여기서 공급망 인권과 공급망 실사법에 세계적인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전에 미국 <라이프>지에 나이키 축구공을 꿰매는 파키스탄 아동의 모습이 사진으로 실린 적이 있다. 당시 나이키는 하청업체의 잘못으로 돌리며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중국 폭스콘 공장에서 발생한 근로자들의 잇단 사망 사건에 대해 책임을 회피했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자 공급망 인권 보호를 위해 국제기구가 나서기 시작했다. UNGPs와 OECD의 ‘책임경영을 위한 기업 실사 지침’도 그러한 흐름에서 만들어졌지만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한계를 지녔다. 이런 과정을 거쳐 EU의 공급망 실사 법제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Corporate Sustainability Due Diligence)법’으로 명명된 공급망 실사법은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을 대상으로 실사를 의무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 범위에 대해서는 아직 좀 모호한 측면이 있다고 보는데, 해당 기업의 자회사, 하청·협력회사 등 공급망 내 확립된 사업관계가 있는 기업들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요소는 거버넌스 측면이다. 기업의 이사들이 책임을 지도록 함으로써 이사회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 관련 항목을 중요하게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를 만든다는 점이다. 이 안을 두고 벌금이나 제재 수위가 조금 약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일부 있지만 문제가 있는 기업들을 법정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나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사실 영국·프랑스·독일·네덜란드 등 몇몇 국가에서는 이미 법제화가 이뤄졌고, 많은 기업이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공급망 회사들에 대해서는 적어도 인권과 환경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얘기다. 유럽 공급망의 영향권에 있는 우리 기업들도 벌써 관련 사안에 대한 두꺼운 설문지를 받고 있고, 그에 대처하는 중이다. 유럽 기업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더라도 공급망으로 얽히게 된다면 적절하게 대응해야 하기 때문에 국내 기업들도 상황을 예의 주시해야 한다.
EU 공급망 실사법 지침안의 가장 큰 특징을 꼽자면 피해자로 하여금 해당 기업에 민사 책임을 추궁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제까지는 행정벌(행정상의 처벌)이나 공공조달 입찰 제한 정도의 제재가 가해졌다면, 앞으론 직접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송 교수님 말씀처럼 유럽에 수출하는 우리 기업들에 대한 실사도 실제 이뤄지고 있다. 프랑스의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평가기관인 에코바디스(EcoVadis)는 100개 이상의 항목으로 구성된 질문지로 평가한 뒤 등급을 매긴다. 이를 바탕으로 계약 여부를 결정하거나 입찰 허용 여부를 판단한다.
최근 유럽에 가구를 수출하는 어느 중소기업이 근로자 기숙사 환경 관리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공급망에서 탈락한 사례가 있다. 유럽에 수출하는 우리 기업 중에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쪽에 공장을 갖고 있기도 한데, 이런 경우도 실사 대상에 포함되므로 잘 살펴야 한다. EU 역내에 있는 기업은 물론, 그곳에 납품하는 1·2차 공급사, 협력업체 등 연관 기업이 많다면 철저히 준비할 필요가 있다.
한국도 ‘K택소노미’라 불리는 녹색분류체계를 마련하며 친환경 산업 전환 흐름에 대응하고 있다. K택소노미는 6대 환경목표를 설정하고 크게 ‘녹색 부문 산업’과 녹색으로 가기 위한 ‘전환 부문 산업’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EU의 경우 분류체계를 확대·개선하기 위해 택소노미 자문기관인 ‘지속가능금융 플랫폼(PSF)’을 두고 상시적으로 논의하고 있는데, 우리도 참고할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기업 입장에선 리스크가 더욱 커질 것이다.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가 충돌할 때 어떤 가치를 먼저 추구할 것인지 보다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속 가능한 경영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이 맞겠지만 물리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두고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기업이라면 이에 대응할 충분한 여력이 되지만 중소기업의 처지는 매우 열악한 것이 사실이다. 대기업의 협력과 정부의 지원 정책이 뒷받침될 필요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는 그동안 기업의 지속가능성에 초점을 두고 관련 정책 마련에 힘써왔다. 앞으로는 정부가 기준을 정하면 기업이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방식에서 진일보하여 기업이 주체적으로 나서서 흐름을 주도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한다. 지금은 바이오든 인공지능(AI)이든 어떤 산업이든 소비자로부터 신뢰를 얻는 기업이 더욱 잘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인권을 존중하고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기업의 자세는 소비자가 기업의 가치, 과연 내가 이 기업을 신뢰할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하나의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공급망 실사법에 대해서도 단지 이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전략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서 기업의 신뢰를 근본적으로 제고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공공기업들은 이미 2018년부터 경영평가에 인권 항목을 포함시키는 등 인권 경영에 대한 역량을 갖춰 나가고 있다. 이러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전반적인 우리 산업의 체질을 개선하는 기회로 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