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녹색산업 분류체계인 EU 택소노미(그린 택소노미)를 도입한 유럽연합(EU)이 지난 2월에는 사회적 분류체계인 소셜 택소노미의 최종 보고서를 발표했다. 소셜 택소노미는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활동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식별하는 분류체계다. 자본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경제활동으로 유입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한 움직임이다. 택소노미는 정부의 재정지원이나 기업의 투자활동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단순한 분류체계를 넘어 사회 전반을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중심으로 재편하는 큰 변화다. 소셜 택소노미의 주요 키워드를 정리했다.
소셜 택소노미는 투자자와 최종소비자에게 어떤 활동이 사회적 투자나 사회적 목표 달성에 기여하는 활동인지 판단할 수 있는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소셜 택소노미에서 배제되는 사업은 자금공급이 상당 부분 차단되고, 이에 따라 자금조달 비용이 크게 높아질 것이다. EU 택소노미에 이어서 EU가 소셜 택소노미 제정 작업에 돌입한 것은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ESG가 단순히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으로 소비되는 것을 넘어 실질적인 투자환경의 변화를 도모하자는 게 EU의 의중이다. 소셜 택소노미가 도입되면 탄소중립 사회로의 전환과 더불어 ‘공정한 사회로의 전환’을 촉진해 인권과 노동환경 개선에 기여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환경에서 시작된 지속가능 사회로의 이행 움직임이 사회적 가치 창출과 지배구조 개선까지 확대돼 본격적인 ESG 시대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향후 EU는 소셜 택소노미와 EU 택소노미의 원칙을 긴밀히 연결하는 한편 이 원칙들이 모든 경제활동에 동시에 적용되도록 확산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지난 2월 EU가 발표한 소셜 택소노미 보고서는 사회적으로 지속 가능한 경제활동을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으로 나눠서 분류했다. 수직적 차원은 ‘경제활동의 결과물인 상품과 서비스가 적정한 삶의 기준을 얼마나 향상시켰는지’가 기준이다. 특정한 경제활동으로 인해 물·음식·주거·보건·교육·교통·통신 등 인간의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권리가 개선됐는지 살피는 것이다. 수평적 차원은 ‘경제활동 과정에서 이해관계자들의 인권이 존중 또는 보호받았는지’가 기준이다. 특정한 경제활동이 노동자에게 좋은 일자리를 보장하고, 소비자의 이익을 증진하며, 지역사회를 포용적이고 지속 가능하게 만들었는지 판단한다. 소셜 택소노미의 목표는 분명하다. 신약 개발과 같이 사회적 기여가 내재된 기업활동, 산업 안전과 건강 보장 등을 통해서 인류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 것이다. 소셜 택소노미의 등장으로 건강하고 안전한 상품과 서비스의 제공 및 양질의 주거와 교육 기회 개선을 추진하는 일도 앞으로는 기업의 역할로 부각될 전망이다.
소셜 택소노미 제정 과정은 수많은 갈등과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이번 EU의 2월 보고서에서 방위산업을 도박 및 담배와 함께 사회적으로 유해한 산업으로 분류하면서 논쟁이 벌어졌다. 보고서에 따르면 무기판매가 전체 매출 중 5% 이상을 차지할 경우에는 지속가능 인증을 받을 수 없다. 아무리 근로자 친화적이라 해도 무기, 도박, 담배와 같은 활동은 사회적으로 지속 가능한 활동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게 EU의 설명이다. 이에 국방력 없이 지속 가능한 사회는 불가능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최근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EU와 러시아 간 군사적 대립에 이러한 주장은 더욱 힘을 받고 있다. 국가나 사회가 존립할 수 없다면 지속 가능한 경제활동도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 방산업을 소셜 택소노미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의 주요 방어 논리다. EU 택소노미 제정 과정에서도 원전·액화천연가스(LNG) 등의 포함 여부를 놓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소셜 택소노미도 어떤 활동을 포함시키고 제외시킬지를 두고 이해관계자들 간에 치열한 공방이 예상된다.
이번 보고서는 소셜 택소노미를 EU의 비재무정보 공시 규제와 연계하는 방안 등도 제안하고 있다. EU 택소노미가 친환경 자산 비중을 공시토록 하는 움직임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공시에 반영될 경우 기업의 투자 및 자금조달 활동은 근본적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다. 투자자나 주요 기관이 이를 중요한 기준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 기업들도 환경·사회적으로 지속 가능한 경제활동으로 투자의 흐름을 유도하고 관련 정보를 공개하도록 하는 움직임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는 지적이다. 실제 국제회계기준(IFRS) 재단은 2021년 11월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를 설립했고, 지난 3월 31일에는 지속가능성 기준의 공시 초안을 발표했다. 국제적으로 표준화된 방식으로 기업들의 ESG 성과를 공개하도록 하고, 비교한다는 계획이다. 최종안은 올해 말에 공표할 예정이다. 이 공시 기준은 EU의 택소노미와도 연계가 클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한국회계기준원은 ‘한국 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KSSB)’ 출범을 준비하고 있다.
소셜 택소노미가 향후 법제화될 경우 국내 기업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할 전망이다. 특히 소셜 택소노미가 사회적 채권의 표준이 되는 만큼 향후 채권 발행 과정에서 마찰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사회적 채권 상장 잔액은 약 125조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약 75% 증가했다. 전체 ESG 채권 중 약 80%를 차지한다. 발행기관도 그동안 큰 폭으로 늘어나 전년보다 16배 증가한 53곳을 기록했다. 소셜 택소노미가 도입되면 사회적 채권 발행 시 투자자가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 적용할 것이다. 사회적 채권 발행을 통한 자금조달이 증가하고 있는 만큼 국내 기업도 경영활동을 할 때 직원·소비자·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의 권익을 고려하는 활동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자본시장의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