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동맹국 간 협력으로 공급망 이슈를 해결하려는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 주도의 세계무역 질서 재편 움직임이 통상환경과 세계경제 질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패러다임의 변화 속에서 이러한 현상을 진단하고 우리 정부와 산업계가 나아가야 할 바를 모색하고자 전문가 대담을 마련했다.
진행 김광균 기자 사진박충렬
대담자 |
경희권
산업연구원 성장동력산업연구본부 신산업실 부연구위원 |
정기창
법무법인 광장 외국변호사 |
토론 제시어 |
#1 프렌드쇼어링과 무역안보 #2 미국 역내 중심의 공급망 재편 #3 공급망 재편에 따른 전략적 대응 |
프렌드쇼어링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개념으로 지난해 11월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이 처음으로 언급하면서 구체화된 내용이다. 여기에는 미국이 추구하는 세계 질서의 재편 의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전의 ‘오프쇼어링(offshoring)’, ‘리쇼어링(reshoring)’을 거쳐 결국 우호적인 국가들과 교역관계를 구축하려는 프렌드쇼어링까지 온 것이다. 미국의 최근 국제통상 정책의 방향을 보면 안보적 요소가 상당히 많이 개입돼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때부터 시작된 이러한 움직임이 바이든 행정부로 오면서 프렌드쇼어링으로 구체화되는 양상이다. 결국 프렌드쇼어링은 국제사회가 미·중 간 신냉전 체제에 들어서고 공급망을 안보 이슈로 보게 되면서 동맹국 간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의미로 나타난 개념이다. 국제통상에 안보적 요소가 본격적으로 개입된 것은 트럼프 대통령 때부터다.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는 상대국 수출입에 대해서 제한조치를 취한다고는 했으나 이는 사실상 러스트벨트(Rust Belt: 쇠락한 중서부 공업지대)의 경제 부흥을 위한 보호주의로 인식됐다. 다만 당시에는 공급망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는데 바이든 행정부 들어 글로벌 공급망을 안보 이슈로 보기 시작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공급망 탄력성(resilience) 보고서를 발표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결국 중국의 부상으로 촉발된 신냉전 체제가 프렌드쇼어링의 직접적인 배경이라 할 수 있다. 그 와중에 러·우 사태가 발생하면서 현 상황이 더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무역의 조류라 해야 할까, 값싼 노동력에 의존하는 요소 투입형 성장전략을 기반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이 성장을 해왔다. 일반적으로 노동·토지·자본 등 생산요소가 투입되면 어느 수준 이상으로 경제성장을 이루게 된다. 중국은 미국 자본에 힘입어 지난 30년간 세계 제조기지로 등극했다. 미국의 경우 전체 무역수지 적자의 80~90%가 중국에서 발생한다. 근래에 와서는 반도체 부품 수급난으로 GM이나 포드 등 주요 기업이 큰 타격을 입자 미국은 크게 당황한 듯 보인다. 이러한 상황이 이어지면서 국제통상 문제를 안보 이슈로 보게 된 것이다. 결국 프렌드쇼어링은 세계시장에서 미국의 주력 산업이 타격을 받지 않도록 공급선을 다변화하고자 하는 목적을 띠고 있다.
미국은 그동안 수출산업으로 크게 성장하는 국가들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을 취해왔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1985년 플라자 합의를,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1987년 루브르 합의를 했다. 이들 국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영미권이 만들어간 국제통상질서에 어느 정도 순응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최근 신냉전 체제가 가속화함에 따라 미국이 동맹국과의 협력체제 구축에 더욱 공을 들이는 형국이라고 본다.
미국이 추진하는 프렌드쇼어링의 핵심은 역시 반도체산업이다. 희한한 것은 지난 5월 20일 바이든 대통령이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찾아 협력 의지를 보였는데, 그 직후 미국 상무장관이 다보스포럼(WEF)에 참석해 프렌드쇼어링이 아닌 미국에 직접 반도체 생산시설을 짓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는 점이다. 결국 미국이 추구하는 프렌드쇼어링의 목적은 자국 반도체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데 있다. 또한 자동차산업의 공급망 재구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미래차의 경우 전동화가 핵심인데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을 통해 배터리 원산지 규정을 강화했다. 미국에 차를 수출하는 완성차 업체들은 미국 현지에서 배터리를 조달하지 않고서는 미국 연방 정부의 전기차 구매 보조금 혜택을 받기 어렵다. 배터리에 필요한 희토류 등 원재료 공급망 확보를 위한 글로벌 기업들의 투자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미국은 지난해 의회를 통과한 ‘인프라법’ 예산을 통해 배터리 재료 정제시설을 확충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 글로벌 공급망이 재구성되고 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주요국 간에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결국 안보적 측면에서 어느 나라와 협력할 것인지, 경제적 측면에서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득실을 따져볼 수밖에 없다. 그러한 판단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는 시간을 두고 다각도로 분석할 필요가 있으며, 현재로선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국제통상 환경에서 미국이 프렌드쇼어링을 구축하려면 ‘프렌드’를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최근 논의되는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가 대표적이다. 유럽연합(EU)과는 미국 무역기술위원회(TTC)를 통해 협력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IPEF는 아직 방향성을 어떻게 설정할지 논의하는 단계에 있는 듯하다. IPEF의 출범은 트럼프 대통령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탈퇴하면서 아·태 지역에 미국이 가입한 국제통상 협정이 부재하다는 점이 고려됐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포괄적점진적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다시 가입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현재로서는 요원해 보인다. IPEF는 기존 국제통상 협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형태의 아·태 지역 협력체를 도모하면서 산업적인 연계를 강화하고 공급망 자체를 재구성하려는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미국은 보조금 규율을 강화하면서 자유주의적 동맹국 간 블록을 형성하는 데 집중하는 모습이다. 블록 형성으로 인해 인플레이션 악화를 초래할 가능성도 높지만 미국은 이를 감수하겠다는 입장인 것 같다. 그런 판단이 없다면 프렌드쇼어링 구축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반도체 협의체 제안을 두고 아직 논의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협의체 결성 제안에 대해서는 참여를 고려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세계경제에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면 보다 능동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체제로 재편되는 전환의 시기에는 위기와 기회가 공존한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으로선 좀 더 적극적으로 기회를 만들어내야 한다.
신냉전 시대가 도래한 이상 기업들도 경영계획 수립 과정에서 통상과 안보를 포함한 국제 정세 이슈를 항상 중요한 변수로 고려해야 한다. 수출통제, 경제제재는 물론 공급망까지 안보 요소에 포함되고 있는 만큼 외부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한다는 인식을 가져야 할 때다.
공급망 이슈가 중요해진 건 일본이 한국에 수출규제를 단행하면서부터다.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은 그때부터 이미 대응을 시작했고, 많은 기업이 중국의 노임 상승 등의 영향으로 생산공장을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국가로 옮겼다. 프렌드쇼어링과 관련해서도 대규모 시설투자를 계획하고 있는 곳도 있다. 다만 다변화를 하기 어려운 우리 중소기업이나 중견기업, 특수 업종들에 대해서는 정부 차원에서 지원책이나 대응방안을 마련해줘야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무역 시장은 요소 투입형 성장전략을 취한 국가들이 미국과 유럽에 상품을 파는 구조로 이뤄져왔다. 하지만 더 이상 저임금 노동력 확보가 어려워지는, 이른바 ‘루이스 전환점’을 지나면 기업들은 성장동력으로 삼을 만한 다른 곳을 찾아 떠나게 된다. 현재 기업들의 생산기지도 전략적 판단에 따라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특히 인도 및 아세안(ASEAN) 국가들에 대한 정보수집 역량을 키워나가며 선제적 대응 전략 수립에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