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인플레이션, 자원의 힘이 결합하면 세계경제는 어김없이 요동쳤다. 2022년 현재 세계는 전쟁, 인플레이션, 자원 등 세 가지 위기가 동시에 발생한 상태다. 코로나발 봉쇄조치 및 무역제재로 글로벌 공급망이 충격을 받은 가운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는 전 세계 인플레이션을 자극하고 있다. 협력에 기반을 둔 잘 짜인 세계질서가 붕괴되면서 국제통상질서의 재편을 불러왔다. 전 세계의 블록화 현상이 가속되고 반도체 공급망 동맹, 미국의 리쇼어링, 에너지와 식량 위기의 공습도 본격화되고 있다. 복합 위기가 불러온 세계 통상질서의 재편을 4개의 키워드로 살펴보자.
러시아가 에너지 무기화에 나서면서 에너지 위기도 현실화되고 있다. 겨울에도 러시아발 에너지 공급난이 계속될 경우 유럽은 심각한 에너지 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 일본 등 천연가스를 사용하는 비유럽 국가에까지 에너지 위기가 전이될 수 있다. 이 같은 국제 에너지 가격 상승은 세계 식량위기를 촉발하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러·우 사태 이후 세계 각국이 러시아에 제재를 가하면서 글로벌 공급망이 휘청거렸고, 식량 공급망에도 차질이 빚어진 것이다. 천연가스 가격과 비료 가격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며 작물 가공을 위한 설비에 사용되는 전력비용, 농기구 운전과 수송에 쓰이는 석유 등도 모두 식량 가격 상승에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으로 세계 농산물 가격 변동성이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 같은 식량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세계 각국의 공동노력은 국제통상의 주요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미·중 갈등 심화, 팬데믹 확산 등으로 무역안보가 부각되면서 각국은 자국 중심 공급망 재편에 나서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가 있다. 미국은 최근 상·하원에서 ‘반도체법(Chips and Science Act)’을 통과시켰다. 총 2,800억 달러 규모의 이 법은 미국의 반도체산업 지원에만 527억 달러의 자금을 투입한다. 미국 내 반도체 생산을 늘리는 게 주 목적인데 반도체산업의 핵심 국가인 한국, 일본, 대만과 함께 반도체 공급망에서 공동전선을 형성하는 반도체 협의체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각각 중국 시안과 우시에 반도체 공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국제통상 무대에서 미국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하면서도 중국을 자극하지 않는 묘수를 찾아야 하는 숙제를 떠안게 됐다.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탄소중립 정책이 가시화되고 있고, 민간 영역에서도 자발적 탄소중립이 추진되고 있다. 이는 글로벌 공급망을 통해 국내 산업에도 영향이 확대되는 모양새다. 전 세계 통상 협상에서도 탈탄소는 빠지지 않는 핵심 이슈가 됐다. 온실가스 배출이 많은 국가에서 생산, 수입되는 제품에 부과하는 추가 관세인 탄소국경세의 전 세계적 도입이 대표적이다. 유럽연합(EU)은 최근 의회에서 탄소국경세 도입 법안을 통과시켰다. 미국도 바이든 행정부가 친환경 정책을 대폭 강화하면서 탄소국경세 도입 논의를 구체화하고 있다. 세계에서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하고 있는 중국도 시진핑 국가주석이 2020년 유엔 총회 연설에서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의 정점을 찍고 2060년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고 강조할 만큼 탈탄소를 다짐했다.
문제는 이 같은 탄소중립 정책의 도입이 전 세계 각국의 생산 및 교역 감소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 역시 높은 탄소집약산업 비중으로 인해 충격이 전망된다. 이 때문에 저탄소·탈탄소 기술발전을 동반하는 산업구조의 녹색전환이 탄소중립 정책과 병행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탈탄소 기술발전과 탄소감축 노력을 동시에 이행하는 그린뉴딜이 각국의 주요 정책 이슈로 부상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팬데믹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취약성이 부각되면서 미국은 리쇼어링 정책(세계에 진출한 자국 기업을 본국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것)을 강화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오바마 행정부가 일자리 확대 등을 위해 리쇼어링 정책을 추진한 것을 시작으로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수지 개선, 국가안보 강화를 위해 리쇼어링 정책을 본격화했으며 현 바이든 행정부에서는 공급망 복원력 향상의 일환으로 가속화하는 추세다. 국가안보와 공급망 강화에 긴요한 반도체, 배터리 등 핵심 산업을 중심으로 보조금 지급, 세제개혁 등의 방식으로 리쇼어링 지원을 확대 중이다. 리쇼어링 외에도 자국에서 가까운 나라로 이전하는 니어쇼어링과 중국 외 저비용 생산국으로의 생산기지 이전을 병행 추진하고 동맹국과의 협력을 강화할 전망이다.
미국의 리쇼어링 정책이 확대되면서 미국 내 산업생태계 강화에 따른 투자 증가, 일자리 창출, 대외불균형 완화 등 긍정적 영향이 기대된다. 그러나 노동비용 상승에 따른 물가상승 압력 확대 및 경제블록화 등의 부정적 영향도 발생할 수 있다. 공급망 강화를 위한 리쇼어링 증가 시 인건비 상승 등에 따른 최종제품 가격 인상으로 인플레이션 위험이 구조화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리쇼어링 확대는 미·중(G2)분쟁 이후의 경제블록화 양상을 더욱 심화시켜 글로벌 교역 둔화 등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