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가뜩이나 불안정한 식량 공급망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까지 겹치면서 식량안보가 새로운 통상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지난 6월 개최된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에서도 식량안보가 주요 의제로 논의됐다. 식량보호주의 확산에 따른 식량안보 위협은 곡물자급률이 낮은 한국에도 국민의 일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전 세계에 확산되고 있는 식량위기를 #러·우 사태 #식량보호주의 #이상고온과 가뭄 #애그플레이션 #식량안보 각료선언 등 5가지 키워드로 살펴봤다.
러·우 사태는 전 세계 밀 공급망을 단번에 망쳐놓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세계적인 밀 수출국으로 두 나라의 밀 수출량은 세계 전체 수출물량의 3분의 1에 달한다. 우크라이나는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남부 항구를 통해 매월 400만~500만 톤 규모의 밀을 중동과 아프리카로 수출해왔다. 하지만 러시아가 이곳을 봉쇄하면서 수출 자체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이 우크라이나의 밀 수출을 돕기 위해서 별도의 화물·기차·선박 등 물류망을 가동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우크라이나는 올해 밀 수확시기를 앞두고 2,200만 톤 이상의 곡물이 창고에 묶여 있는 상태다. 사태 종결 또는 항구 봉쇄 해제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문제 해결은 쉽지 않다. 러시아가 지난 7월 튀르키예와 유엔의 중재로 흑해를 통한 우크라이나의 식량 수출 재개를 보장하기로 합의했지만 푸틴 대통령은 여전히 “곡물 수출 협정 이행을 중단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상황이다.
밀 시장이 얼어붙자 밀 생산 1위인 중국과 2위인 인도가 지난 5월 수출금지 조치를 내렸다. 곡물가격이 급등하고 품귀 현상마저 빚어지자 ‘자국 우선 공급’이라는 긴급 처방에 나선 것이다. 한국 상황도 녹록지 않다. 한국의 곡물자급률은 20.2%(2020년 기준)로, 쌀을 제외하면 3.2%에 불과한 탓이다. 특히 밀·옥수수의 자급률은 각각 0.5%, 0.7%에 불과하다. 실제 밀에서 시작된 식량보호주의는 다른 곡물로 전염되고 있다. 세계 최대 팜유 수출국인 인도네시아는 자국 내 식용유 가격 안정을 위해 한 달 가까이 팜유 수출을 중단하기도 했다. 이집트 역시 밀, 콩 등 주요 곡물 수출을 중단했다. 튀르키예는 3월 초·중순부터 쇠고기, 양고기, 식용유 등의 수출을 금지했고 말레이시아는 닭고기 수출을 중단했다. 이 밖에 아르헨티나, 세르비아, 이란, 파키스탄 등도 농산물 수출금지 대열에 합류했다.
독일의 주요 물류 채널인 라인강이 최근 폭염과 가뭄으로 일부지역 수위가 30cm를 기록, 수운 물류가 마비 위기에 처했다. 가뭄이 세계적인 경기침체, 러·우 사태에 따른 에너지 위기에 더해 또 다른 걱정거리로 부상하며 독일 경제성장률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일부 선박은 좌초 우려 때문에 30~40%만 적재하거나 운송을 전면 중단하고 있다. 프랑스는 전국적인 급수 제한을 실시하고 있고, 이탈리아는 농업과 조개 양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불가리아의 경우 다뉴브강이 말라가자 긴급 준설공사를 진행 중이다.
한편 콩 생산 1위인 브라질과 2위인 미국도 이상고온과 가뭄으로 콩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세계 최대 옥수수 생산국 미국의 중북부 역시 가뭄으로 생산량이 급감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기후변화가 콩과 옥수수 작황을 망치면서 식량위기를 부추기고 있는 셈이다.
전 세계에 불어닥친 식량불안과 농산물 가격 급등은 필연적으로 애그플레이션(agflation) 현상을 낳고 있다. 애그플레이션은 농산물 가격이 급등하면서 일반 물가까지 다 오르는 것을 뜻한다. 밀 가격은 최근 톤당 430유로를 돌파하면서 지난 3월 7일 기록한 사상 최고가 422.40유로를 깼다. 콩값 역시 최근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에서 부셸(25.4㎏)당 17달러를 웃돌고 있다. 최악의 가뭄으로 사상 최고가까지 치솟았던 2012년 9월 가격(17.71달러)을 곧 넘어설 전망이다.
밀, 콩, 옥수수를 비롯한 농산물 가격의 급등은 필연적으로 다른 물가를 끌어올린다. 밀을 사용하는 빵, 콩으로 만드는 식용유, 옥수수를 이용하는 가축사료 가격을 자극하고 이것들은 다시 수많은 제품의 비용을 올리기 때문이다. 결국 노동자 임금까지 인상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지난 6월 12∼1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5년 만에 개최된 제12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에서 식량안보가 주요 쟁점으로 다뤄졌다.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의 영향으로 농산품 교역에 차질이 발생하면서 각국의 식량안보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또 주요국이 수출제한조치를 취하면서 밀과 옥수수, 보리 등 주요 곡물의 국제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는 점도 전 세계적으로 WTO가 농산품 공급망 안정화에 앞장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 이유다. WTO 회원국의 의견합치로 이번에 채택된 식량안보 각료선언에서는 농산물 교역 원활화와 전 세계 농식품시스템 회복을 위해 불필요한 수출제한조치를 자제하기로 했다. 또한 식량안보 목적으로 긴급조치를 취하는 나라가 있더라도 무역을 왜곡하지 않는 선에서 투명하게 시행할 것을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