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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의 무역-노동 기준의 연계 전략

강유덕 한국외대 Language and Trade 학부 교수사진 한경DB

2018년 12월 유럽연합(EU)은 한·EU 자유무역협정(FTA)의 노동 조항을 근거로 한국에 정부 간 협의를 요청했다. 한국 정부가 FTA에 명시된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해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노동기본권 개선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역협정을 매개로 한국 정부가 노동기본권에 관련된 압력을 외국 정부로부터 받은 것은 이 경우가 처음이다. 이후 정부는 노동 3법을 개정했고, 4개의 미비준 ILO 핵심협약 중 강제노동 금지에 관한 1건을 제외한 3건을 비준했다. EU만의 무역-노동 연계 방식이 한국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강제노동 금지 등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이 국회 비준 절차를 거쳐 지난 4월 20일부터 발효됐다. 정부가 비준을 서두른 데는 한·EU FTA를 근거로 EU가 한국의 ILO 핵심협약 비준을 압박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 사진은 2019년 1월 21일 ‘한·EU FTA 무역과 지속가능발전장(章) 이행을 위한 정부간 협의’ 모습.
상징적 의미였던 FTA의 노동 규정

선진국은 무역협상에 노동 이슈를 포함시키려는 경향이 있는데, EU는 미국과 함께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해왔다. 프랑스 등 주요 EU 회원국은 1990년대부터 세계무역기구(WTO)의 의제로 노동 이슈를 포함시킬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시도는 개발도상국들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특히 WTO 내에서 신흥국의 입지가 점차 확대되면서 집단적인 연대를 통해 대응할 경우, 선진국의 입장을 관철시키는 것은 어려웠다. 2001년부터 진행된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에서도 노동 이슈는 특별한 결과를 도출한 사례가 없다. 반면에 2000년대 초반 이후 무역협상의 주요 무대는 다자협상에서 자유무역협정(FTA)을 중심으로 한 양자협상으로 옮아갔다. 이에 무역과 노동을 연계시키려는 움직임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EU는 이러한 변화를 최대한 활용해 무역협정에 노동, 환경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포함시켰다. EU는 FTA의 수가 확대됨에 따라 점차 EU만의 무역-노동 연계 방식을 확립시켰다. 2000년대 초까지 EU의 FTA에 포함된 노동조항은 인권존중을 강조하거나 체결국과의 협력을 선언하는 정도에 그쳤다. 가령 EU가 모로코, 요르단, 레바논, 이집트, 알제리 등과 체결한 FTA에는 상대국의 노동조건이나 국제협약 준수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EU의 무역협정에서 노동조항은 이스라엘(2000년 발효)과 체결한 제휴협정에서 처음으로 언급됐고, 남아프리카공화국(2000년 발효)과 체결한 FTA에서는 ILO의 기본협약 준수에 관한 내용이 서문에 실렸다. 협정문 본문에 ILO 핵심협약이 언급된 것은 2003년 발효된 칠레와의 FTA가 처음이다. 즉 2000년대 중반 이전에 체결된 EU의 FTA는 노동 관련 규정을 포함하더라도 상징적 의미에 만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국 싱가포르 캐나다 ㅔ트남
ILO 협약 비준 및이행의무 비준 노력 국내 상황을 고려해 비준 노력 비준 노력 국내 상황을 고려해 비준 노력
거버넌스 TSD 위원회 TSD 이사회 TSD 위원회 TSD 위원회
국내 자문기구 신설 신설 또는 기존 제도 활용 기존 제도 활용 신설 또는 기존 제도 활용
시민사회 대화 O/th> O O X
정부 간 협의 O O O O
전문가 패널 O O O 추후 논의
2000년대 중반, 무역협정에 노동 이슈 적극 반영

2000년대 중반부터 EU는 다자주의 중심의 통상전략에서 벗어나, 역외국과의 포괄적 FTA를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무역협정에 노동 이슈를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우선 2008년 EU와 카리브공동체(Cariforum) 간에 체결된 경제동반자협정(EPA)은 EU의 FTA 중 처음으로 사회적 이슈에 대한 별도의 장(chapter)을 마련했다. 여기에 ILO 핵심협약의 준수를 비롯해 인권에 관한 광범위한 원칙을 명시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한국과 체결한 FTA다. 2011년에 발효된 한·EU FTA는 EU가 글로벌 유럽(Global Europe)에 의거해 역외국과 추진한 최초의 FTA다.1) 동 FTA의 제13장 ‘무역과 지속가능발전(TSD; Trade and Sustainable Development)’을 통해 노동과 환경 등 사회적 이슈를 규정했다. EU는 한·EU FTA 이후 페루, 콜롬비아, 베트남과 같은 개발도상국은 물론, 캐나다, 일본과 같은 선진국과 10개가 넘는 FTA를 발효했다. ‘TSD 챕터’로 불리는 노동-환경 조항은 EU의 모든 FTA에 거의 유사한 내용으로 포함됐다. 즉 EU 방식의 무역-노동 연계 방안이 정착된 것이다.

한-EU FTA 제13장 무역과 지속가능발전
주요 내용
13.4조 조 ILO 등 다자간 노동 협정에 대한 준수 의무 규정
13.10조 FTA가 지속가능발전에 미치는 영향 평가
13.12조 TSD 위원회 운영
13.13조 국내 자문단 구성(시민단체 포함)
13.13조 시민사회 대화 운영
13.14조 정부 간 협의
13.15조 전문가 패널
1 EU는 2006년 통상백서인 ‘글로벌 유럽(Global Europe)’을 통해 역외국과의 포괄적 FTA 추진을 선언했고, 한국을 우선순위의 협상대상국으로 선정했음.
EU의 무역협정과 노동조항

EU의 FTA에 포함된 노동조항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4대 기본노동권에 대해 언급하고, ILO 핵심협약의 준수의무를 부과한다. 그리고 양국 고위공무원으로 구성된 TSD 위원회를 구성하며,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는 국내자문단 운영을 의무화한다. 또한 EU와 FTA 체결국 간 시민사회가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을 구축하고, TSD 챕터 운영에 이견이 발생할 경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정부 간 협의절차와 분쟁해결을 위한 전문가 패널을 규정했다. 또한 FTA가 지속가능발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평가를 의무화했다. 요약하면 국내 소통을 위해서는 자문단을 운영하고, 상대국과의 소통을 위해서는 TSD 위원회와 시민사회 대화 체계를 운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노동 분야에서 상대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통상정책에 노동 이슈를 반영할 수 있는 통로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제도가 성립된 데에는 상대국에 대해 규범적 우위를 갖고 있다는 EU 측의 판단도 있지만, 유럽의회의 요청이 반영된 것이다. EU의 통상정책에 대해 비준 권한을 갖고 있는 유럽의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통상정책에 사회적 이슈를 반영할 것을 요구해왔다.
그런데 EU의 무역협정에 포함된 노동조항은 권고적 성격의 조항이다. 미국의 무역협정과 달리 노동조항을 위반했다고 해서 벌금, 호혜조치 중단 등 경제적 제재를 부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전문가 패널을 통해 상대국이 노동규정을 위반했다고 판결이 나더라도 권고에 그칠 뿐이다. 그렇다면 EU의 FTA에 포함된 노동조항은 솜방망이인가? 한국의 ILO 핵심협약 비준 논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권고적 성격의 노동조항도 강력한 외압으로 작용한다. EU는 상대국의 노동권 준수 여부를 모니터링하고, 미진하다고 판단될 경우 TSD 위원회를 통해 시정 조치를 요구한다. 시민사회 대화의 경우 더 강력한 외압으로 작용할 수 있다. 노동·환경 분야의 시민단체가 참여하기 때문에 여론을 통해 외압이 형성된다. 분쟁해결의 경우 전문가 패널을 통한 판결이 구속력은 없더라도 상대국을 압박할 수 있는 레퍼런스 역할을 할 수 있다.

무역과 노동을 연계해 가치 지향적 통상정책 추진

EU의 무역-노동 연계전략은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EU 집행위원회의 통상총국(DG Trade)은 2020~2024년 업무보고에서 ‘통상정책을 통해 그린 딜, 노동, 환경, 젠더, 지속가능 공급망 등 더 넓은 EU 정책에 기여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최근 EU의 통상정책은 역외국과 ‘공정경쟁 조건을 확보’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EU의 통상정책은 점차 광범위한 노동·환경 이슈를 포함하게 될 것이다. 노동법의 미준수로 형성될 수 있는 상대국의 비교우위를 용인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무역과 노동을 연계해 가치지향적 통상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EU가 내건 ‘개방형 전략적 자율성(Open Strategic Autonomy)’의 핵심요소다. 이러한 맥락에서 EU의 통상정책은 우선 EU가 추진 중인 공급망 실사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관련 지침 등이 무역-노동 연계전략에 활용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FTA에 포함된 TSD 챕터가 상대국의 국내 노동조건에 중점을 두었다면, 공급망 실사는 기업의 국내외 공급망에서 노동 착취와 환경오염을 억제하기 위한 조치로 적용범위가 광범위하다. EU는 역내에 노동, 환경 등의 규제를 적용해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후 역외국에게도 동 규제의 수용을 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통상정책은 이러한 ‘규제 수출’을 위한 매개로 작용한다. 유럽의회는 EU의 통상정책이 규범화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둘째, EU 내부에서는 수년 전부터 무역협정에 포함된 노동조항에 구속력을 부여하자는 주장이 제기돼왔다. 미국의 무역협정처럼 상대국이 노동조항을 위반했을 때 경제적 제재를 부과할 수 있도록 무역협정을 개정하자는 것이다. 그동안 EU 법체계의 특성을 고려할 때 이러한 조치가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했다. 반면에 유럽법원은 무역협정의 노동조항 위반을 이유로 상대국에 무역자유화 조치를 중단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물론 무역협정의 개정은 상대국의 동의를 요구하기 때문에 단시일 내에 실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가 노동 이슈의 통상 의제화라는 큰 흐름에서 나온 것임은 분명하다.

노동, 환경 등을 국제 흐름에 맞춘 한국형 통상정책 마련 시급

그렇다면 EU의 무역-노동 연계정책에 대해서 어떠한 대응이 필요할까? 첫째, 한국 통상정책의 범위를 노동과 환경 등 사회적 이슈로 넓혀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FTA는 시장접근성 확보를 우선순위로 삼았고, 이에 따라 이행평가 또한 주로 무역‧투자 확대 여부에 초점을 두었다. 상대국에 맞춰 유연한 통상협상을 전개하다 보니 발효 중인 18개 FTA의 노동조항은 서로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그렇다 보니 노동과 같은 사회적 이슈를 통상협상의 의제로 제시하는 데 생소할 수밖에 없고, 규범적 권력을 갖춘 EU, 미국 등의 요구에 수동적 입장을 취하게 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노동, 환경 등 사회적 이슈를 포함하는 한국형 통상정책의 마련이 시급하다. 또한 통상정책 추진과정에서 사회적 영역의 규제와 제도개선 여부에 대한 평가를 실시할 필요가 있다. 둘째, 상대국과 노동 관련 논쟁이 발생할 경우에는 상대측 의도를 잘 파악해 상황별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통상협상에서 추가적 양허를 얻어내기 위한 상대국의 분위기 조성일 수도 있으며, 상대국 의회의 지적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 EU의 경우 유럽의회의 지적을 EU 집행위원회가 통상압력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노동, 환경, CSR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한 국내 규정을 국제적 흐름에 맞도록 정비하고, 대외적 입장을 정교하게 수립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