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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이슈가 국가 간 통상 의제로 부상

남궁준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 사진 한경DB

제1차 세계대전 후 창설된 국제노동기구(ILO)는 자유무역-노동권 보호 간 긴장을 인식하고 회원국들 간에 국제노동기준을 정한 협약을 채택하는 노력을 했으나 채택·비준율이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흐름을 되돌리지 못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기업은 전 세계 곳곳으로 공급망을 확장했고 국제사회는 통상협정을 통해 제도적 기반을 다지며 국제사회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21세기 들어 본격화된 FTA 등을 통한 무역-노동 연계는 초세계화에 대한 치료제 역할을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최근 글로벌 통상환경의 지각변동과 함께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한·EU 자유무역협정(FTA) 규정을 근거로 한국에 대해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압박을 전방위로 펼친 바 있다.
사진은 2019년 4월 9일 한국에서 열린 제8차 한·EU FTA 무역위원회에 세실리아 말스트롬 EU 집행위원회 통상담당 집행위원이 참석한 모습.
현대적 노동조항의 원형, 미국과 EU FTA

1990년대 들어 세계무역기구(WTO), 자유무역협정(FTA) 혹은 통상 관련 국내법 안에 직접 노동, 인권, 환경 등 사회적 가치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무역-노동 연계 등)를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이 공감을 얻기 시작했다. ‘사회적 덤핑’과 ‘바닥으로의 경쟁’이 무역-노동 연계 제도의 이론적 틀로 곧잘 제시됐다. 개별 국가들이 ‘적정’ 수준을 하회하는 근로조건 규제를 통해 상품을 생산·수출하는 것은 일반 덤핑과 같은 불공정 무역행위이고, 해외자본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노동보호를 완화하면 최적화된 수준의 노동규제를 할 수 없어 사회 전체의 후생 손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국제공조를 통해 공통된 ‘게임의 규칙(적용될 노동기준과 처벌의 방식)’을 정하고 위반하는 국가를 제재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법으로 제시됐다.
무역-노동 연계를 정당화하는 조금 다른 시각도 있다. 노동권 보장은 단지 비용상승에 그치지 않고 생산성 향상 등 긍정적인 경제적 효과를 낳기도 하며, 장기적으로 한 국가의 경제·사회·정치가 상호보완적·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발전하는 데 필요한 연결고리라는 관점이다. 이에 따르면 통상협정 내 노동조항도 처벌이나 제재가 아닌 대화와 협력을 통해 체약국의 노동기준에 대한 발상을 전환하고 노동규제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연계의 수단과 목적이 된다.
지난 20여 년 동안 미국과 유럽연합(EU)의 FTA에 각각 포함된 ‘노동’과 ‘무역과 지속 가능한 발전’ 장(chapter)은 각각 전자와 후자의 관점에 따라 도입·발전된 것이다. 예를 들어 한·미 FTA는 노동 관련 의무 위반이 궁극적으로 특혜관세 철회라는 제재로 이어질 수 있다(무역제재 활용 조건부 연계). 반면, 한·EU FTA는 노동사안에 대해 정부 간은 물론 시민사회 간 대화를 제도화·정례화하고 일반분쟁해결절차 및 무역제재를 이용할 수 없게 하고 있다(대화·협력을 통한 장려적 연계). 이 두 FTA의 노동조항은 미국과 EU가 각각 2007년 전후로 고안해낸 현대적 노동조항의 원형이기에 좋은 대조를 이룬다.

무역과 노동을 연계하는 새로운 플랫폼 부상

기본적으로 초세계화에 대한 ‘치료제’였던 두 방식은, 최근 글로벌 통상환경의 지각변동과 함께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2022년 현재는 지정학적 고려와 산업정책이 자유무역 통상정책에 우선하고 글로벌 공급망 및 가치사슬을 무역블록에 따라 재편(예: 프렌드쇼어링)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추세를 견인하는 것은 상품 및 서비스 시장 개방을 핵심으로 하는 전통적 FTA가 아니다. 기술, 인권·노동·환경, 디지털통상, 공급망 투명성, 수출입 통제 등에 대한 우방국 간 공통의 표준을 수립해 공급망 생태계를 조성하는 경제협력협정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5월 출범한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가 대표적인 예다. 문제는 전통적 FTA를 기반으로 설계된 노동조항이 새로운 플랫폼에 맞춰 어떠한 내용과 효력을 갖게 될 것인가다.
먼저 대결 구도가 짙어지는 통상관계에서 노동(조항)은 지정학적 전략 또는 보호무역주의의 도구로 오·남용될 위험이 증가할 것이다. 다시 말해 노동조항은 일정한 종류·수준의 노동기준을 설정함으로써 특정 국가(군)를 실질적으로 배제하는 규범적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 동시에 호혜관세, 시장개방 등을 규율하지 않는 경제협력 플랫폼이 노동 관련 의무의 이행을 어떻게 제도적으로 확보할지의 문제가 있다. 이와 관련해 2020년 7월 1일 발효한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의 노동신속구제절차(Rapid-Response Labor Mechanism)와 2022년 6월 21일 시행된 미국의 위구르강제노동방지법 및 2022년 2월 23일 EU 집행위원회가 발표한 기업의 지속가능성 실사의무 지침(안)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전통적 FTA 노동조항은 국가의 의무와 책임을 규율했지만, 위 제도들은 개별 기업 또는 사업장을 적용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최근 사례에서 확인되듯 실효성이 더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각각 미국과 EU의 무역-노동 연계, 특히 FTA의 노동조항을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국내 기업의 노동 관련 리스크와 발생 가능한 통상갈등을 살펴본 후 시사점과 대응방안을 검토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