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전환의 가속화와 신기술 발전에 따라 디지털 통상의 중요성이 날로 높아지면서 디지털 통상 규범에 관한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11월 21일 국내 최초의 디지털 통상 협정인 한·싱가포르 디지털동반자협정(DPA; Digital Partnership Agreement)을 정식 서명했다. 이를 계기로 글로벌 디지털 통상 규범 정립에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이란 기대감이 높아지는 가운데 한·싱 DPA 서명의 의의와 향후 전망을 살펴보기 위해 전문가 대담을 마련했다.
진행 김광균 기자 사진박충렬
대담자 |
김정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인도남아시아팀장 |
이주형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
토론 제시어 |
#1 한·싱 DPA의 추진배경과 주요내용 #2 한·싱 DPA 타결의 의의와 기대효과 #3 한·싱 DPA 발효 시 양국 통상에 미칠 영향과 전망점 |
4차 산업혁명이 전 세계적인 화두로 떠오르면서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인 한국이 글로벌 통상 질서 구축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자명해졌다. 미국이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디지털 통상 규범 수립에 앞장선 이후 유럽연합(EU)이 일반개인정보보호규정(GDPR) 수립 등을 통해 이에 적극 대응하고 있으며, 중국 역시 새로운 디지털 규범 확산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도 세계무역기구(WTO) 전자상거래 협상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지난해 말 한국에 대한 EU의 ‘개인정보보호 적정성 결정’이 통과됨에 따라 한국의 개인정보보호 법제와 EU 법제 간 호환성을 인정받은 바 있다.
지난해 말 타결된 한·싱가포르 디지털동반자협정(DPA)의 전자상거래 규정을 살펴보면 기존 한·싱 FTA, 한·미 FTA,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과 비교해 신규 조항이 다수 도입됐으며, 기존에 존재하던 조항이라도 그 규범 수준이 강화된 점, 디지털 경제에 관한 협력 조항이 추가된 점이 특징이다. 즉 전자상거래를 촉진하고 디지털 개방화 수준을 높이는 조항들이 새로 도입되거나 이전보다 강화된 형태로 포함됐다. 디지털 전환과 관련된 기술 협력 조항도 다수 포함됐는데 이는 기존 디지털 통상 협정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점이라 할 수 있다.
디지털 무역 협정의 기원은 전자상거래에 관한 규범이다. 1998년 WTO가 전자상거래 작업계획을 채택하면서 관련 논의가 다자 차원에서 시작됐고 FTA를 통해 양자 측면의 규범으로 발전했다.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FTA에 별도 챕터로 전자상거래 관련 규범이 들어가면서 논의가 본격화했고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부터 논의가 획기적으로 진전됐다. ‘제조업의 서비스화(servicification)’라는 관점에서 새로운 규범의 필요성과 함께 다양한 디지털 관련 통상 협정이 나오고 있는 흐름 속에서 우리나라가 한·싱 DPA를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한·싱 DPA는 기존 한·싱 FTA에 포함된 전자상거래 챕터를 완전히 개정해 별도의 협정으로 만든 모양새인데 여기에 디지털 관련 표준 기술 규제 및 적합성 평가 규정까지 포함되는 등 지금까지 나온 디지털 통상 규범 가운데 가장 수준 높은 규범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컴퓨팅 설비의 현지화 요건 금지라든지 국경 간 데이터 전송 자유화 등 디지털 무역의 자유도를 높인 조항들이 눈에 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경쟁 관련 조항인데, 불공정 행위에 대한 규제 차원에서 디지털 통상에 특화된 경쟁 조항을 넣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싱 DPA는 한·미 FTA에 포함된 전자상거래 챕터 이래로 가장 의미 있는 디지털 무역 협정임이 틀림없다. 싱가포르는 디지털 규범 논의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해왔으며, 도시국가라는 특성을 십분 활용하면서 국가적 차원의 디지털 전환을 일관성 있게 추진해왔다. 우리 입장에서는 향후 통상규범 개방화 촉진, 아시아 시장 확대 가능성 등을 고려할 때 아시아의 디지털 경제 및 무역의 허브로 부상한 싱가포르가 통상협정의 가장 이상적인 파트너가 아닐까 싶다.
한·싱 DPA로 기대할 수 있는 효과는 다양하다. 양국 간 협력 강화와 더불어 아세안 등 제3국 협력 등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이 높다. 무역 측면에서는 단일통관시스템을 통해 양국 간 화물 수송 및 통관 소요시간 단축, 효율성 제고를 기대할 수 있다. 기술협력 분야에서도 싱가포르가 우수한 혁신기업 유치와 연구개발 협력에 적극적인 데다 핀테크는 물론 사이버 보안과 디지털 표준 등 기술 분야에서 매우 높은 수준의 기술 역량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양국의 협력 잠재력은 매우 높다.
싱가포르는 디지털 산업 육성과 무역 활성화 측면에서 굉장히 선도적인 위치에 있는 국가다. 싱가포르는 한국과의 DPA뿐 아니라 싱가포르·호주 디지털경제협정(SADEA), 뉴질랜드·칠레와의 디지털경제동반자협정(DEPA), 영국·싱가포르 디지털경제협정(UKSDEA)까지 체결한 상태다. 특히 UKSDEA에서는 디지털 포용 관점에서 노동권, 양질의 일자리까지 다루고 있다. 디지털 플랫폼 영역의 무형적 인프라까지 다루려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선도적이라 할 수 있고, 이러한 싱가포르와 디지털 통상 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일이다. 한국은 앞으로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의 무역분야 논의를 통해 디지털 통상을 다룰 것으로 보이고, EU와도 디지털 통상 논의를 시작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경우 노동 이슈를 앞세워 주도권을 쥐려 할 것이고 EU의 경우 데이터 관련 개인정보보호를 강조하는 규범을 들고 나올 것으로 생각된다. 싱가포르가 디지털 산업 측면에서 우리와 공통점이 많은 만큼 한·싱 DPA가 향후 체결하게 될 디지털 통상 협정의 방향성을 가늠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 기대한다.
향후 한·싱 DPA가 발효되면 전자상거래 원활화, 디지털 서비스 개방화 등을 담보하는 조항에 따라 양국 간 무역이 대폭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로선 디지털 통상 협정에 나설 만큼 충분히 준비가 돼 있거나 산업적인 역량과 비전을 가진 국가가 많지 않기 때문에 본격적인 디지털 통상 협정으로는 한·싱 DPA가 유일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EU의 GDPR 적정성 심사를 통과함으로써 정부 간 데이터 이전 협정을 체결한 것 역시 매우 의미 있는 성과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우리나라는 현재 IPEF의 디지털 통상 협상이라는 큰 과제를 안고 있으며 CPTPP 역시 중요한 과제가 될 수 있다. 주요 디지털 통상 협정 논의에 적극 참여하는 동시에 국내 제도 수립에도 만전을 기해야 한다. 예를 들어 마이데이터의 도입은 개인의 권리 보호와 더불어 산업 혁신을 촉진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 디지털 규범의 개방화를 촉진하면서도 개도국 입장에 서서 글로벌 디지털 역량 강화의 가교 역할을 할 필요도 있다.
전자적 전송물에 대한 무관세 모라토리엄과 관련해 한마디 덧붙이고 싶다. 최근 개도국을 중심으로 디지털 제품의 전자적 전송물에 대한 무관세 관행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대두되면서 지난 WTO 각료회의에서 논란이 된 바 있다. 그런 가운데 한·싱 DPA에 이를 의무화 조항으로 넣은 것은 우리나라와 같은 콘텐츠 강국 입장에서는 매우 긍정적이다. 디지털 협력 조항들 역시 국내 규범 수립에 상당히 의미 있는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 통상 협정이 유수의 테크 기업을 보유하거나 디지털 산업 육성에 앞서가는 일부 국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지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전까지 전자상거래 규정은 전자상거래 강국 중심의 시장 공고화에 방점이 찍혔으나 최근 들어 디지털 무역 협정의 기조가 달라지고 있다. 온라인 환경 자체가 건전하게 조성돼야 한다는 관점에서 이를 지원하는 규정들을 다루고 있다. 사이버 보안이나 인터넷 접근권, 온라인 거버넌스 확립에 관한 규정들이 대표적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이 선진국과 개도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