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면서 표준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세계시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글로벌 표준 경쟁도 한층 치열해지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주요 산업에 대한 투자 확대와 국제표준 선점을 통해 신시장 확보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세계 4대 ‘표준 강국’ 도약을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할 전략과 과제는 무엇인지 전문가 대담을 통해 들어봤다.
진행 김광균 기자 사진박충렬
대담자 |
조영임
가천대 컴퓨터공학과 교수 |
박효민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
토론 제시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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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은 기업의 경영전략 도구로서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측면이 크다. 자국 기술이 국제표준으로 인정되면 국가 이미지 제고는 물론 무역을 통해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갖게 된다. 현재 국제표준은 국제법이 규율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국제법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으며, 한편으론 새로운 무역장벽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선진국과의 기술격차를 줄이고 신흥국의 추격에 대응하려면 차별화된 원천기술 개발과 함께 선행 특허를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다. 세계시장 선점을 위해서는 보유 특허를 국제표준으로 유도하는 전략적 연구개발(R&D) 활동이 필수다. 국제표준을 선점하면 다른 기술로 대체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글로벌 시장 선점에 유리하다.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의 표준화 활동이 ‘총성 없는 전쟁’으로 표현되고, 표준특허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비유되는 이유다. 우리나라는 국제표준 제안, 국제임원 진출 등 표준화 활동을 확대함으로써 표준강국에 근접했지만 국제표준 제안은 특정 분야에 편중돼 있고 증가 추세도 둔화되고 있다. 주요 표준화 기구의 의장·간사 수임 현황도 다른 상임이사국들에 비해 아직 열세이므로 체계적인 국제표준 전략에 기반을 둔 효율적인 대응체계 구축이 필요하다.
21세기를 ‘표준 전쟁의 시대’라 할 만큼 표준의 개념이 중요해지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는 글로벌 초연결사회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어떠한 표준이 설정되느냐 하는 문제는 기업뿐 아니라 국가적 전략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중국이 주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해상 신실크로드)’,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등도 중국과 미국의 세계 표준화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우리 기술의 국제표준화를 통해 가장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시장 선점이다.
우리의 기술이 글로벌 표준으로 인정된다고 하면 그 경제적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하게 될 것인데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글로벌 표준 경쟁에서 승리를 해본 경험이 없다. 다만 우리는 국제표준 신규 제안과 표준특허 신고 건수가 상당히 높은 국가에 해당한다. 이러한 건수가 표준화의 성공과는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지만 표준화의 밑거름이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 정부는 국제표준활동 지원사업을 추진하고 있고, 이를 기반으로 민간 전문가의 활동이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제조업 또는 제조업과 정보기술(IT)의 융합이 용이한 산업 중심으로 표준화에 역량을 집중해왔다. 앞으로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발맞춰 사물인터넷(IoT), 스마트기기 등 융복합 기술과 로봇, 드론, 인공지능(AI), 데이터 등 4차 산업의 핵심기술, 서비스 산업에 대한 표준화를 확대하고 사회안전, 국민생활과 밀접한 사회 전반의 표준 개발에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 핵심기술에 대한 국제표준을 선점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수출 과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로열티도 받을 수 있다. 최근 미국이 제조업 부흥을 외치고 있지만 미국은 다양한 기술을 선점해 그와 관련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표준의 가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국제표준화기구(ISO),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 국제전기통신연합(ITU) 등을 세계 3대 표준화 기구로 꼽는데 ISO와 IEC는 산업통상자원부·국가기술표준원, ITU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전파연구원과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한 표준화 사례를 보면 1조 원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거나 국제표준을 따르지 않아 도산한 기업의 사례도 있다. 즉 표준은 기업의 생존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로서 더 이상 수동적으로 따라야 할 기준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국제표준화에도 도전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정보통신 분야에서 강점을 보인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로 5세대 이동통신(5G)의 상용화를 한 바 있으며, 현재 삼성전자는 6G 사업을 추진 중이다. 더욱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정보통신 기반의 산업 융합, 예컨대 5G, 빅데이터, 클라우드 컴퓨팅, IoT 등에서 상당한 발전이 기대된다. 우리나라의 국제표준 신규 제안 순위를 보면 상위권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만으로 국제표준의 위상을 논하기는 어렵다.
표준은 실제로 채택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신규 제안으로 그칠 게 아니라 실제 국제표준 채택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기업과 국가 간 전략적인 협력이 요구된다. 이와 함께 우리가 어떤 산업 분야에 역량을 집중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현재 미국, 유럽연합(EU) 등 많은 국가가 AI, 양자역학(퀀텀), 전기차 충전장치 등의 기술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AI와 관련해서는 미국과 EU가 무역기술위원회(EU-US TTC)에서 관련 표준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중이며, 관련 로드맵도 마련한 상황이다. 이들 분야는 표준 분야뿐 아니라 각종 기술안보 측면에서도 중요도가 높은 만큼 우리 정부의 종합적인 전략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난해 9월 조성환 현대모비스 대표가 ISO 차기 수장으로 선출돼 2024년부터 회장직을 맡게 됐다. ISO를 대표하는 한국인 회장으로서 국제사회에 기여하고 우리나라의 위상 제고는 물론 한국의 국제표준화 활성화에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가 표준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많은 과학기술 중에서도 특히 AI 기술을 공략해야 한다고 본다. AI는 산업 전반에 걸쳐 미래사회의 혁신과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술이며 성장 가능성도 매우 높다. 한국의 경우 AI 정책이 다수 발표되긴 했으나 표준화 전략 수립은 다소 미흡했다.
AI 기술은 ‘학습’ 영역에 표준화가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데 핵심은 ‘추론’에 있다. 이 분야에서 퍼스트 무버(선도국)로 치고 나가야 한다. 또한 표준은 참여 주체들 간 합의를 기반으로 도출되는 만큼 정부는 표준화 전략 수립과 함께 민관 협력 거버넌스 활동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민간의 표준 개발을 촉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AI 기반의 시장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표준 분야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지 못했다. 미국은 이미 20년 전부터 표준전략을 민간기구 주도로 마련해 정부 차원의 지원이 이뤄지고 있고 퀄컴, 소니 등 글로벌 기업은 기업 내에 표준 그룹을 갖추고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기술 선도국은 표준화를 통해 신기술을 표준으로 정립하면서 시장을 지배하고 이로부터 막대한 후속 이익을 누리는 반면, 그렇지 못한 국가는 표준특허에 대한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며 기술 주도권 경쟁에서 뒤처질 뿐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적절한 질서와 규칙인 표준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시장을 만드는 것은 기술이지만 시장을 통제하는 것은 규칙이다. 규칙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우리 기업과 정부가 함께 고민을 해봐야 할 시점이다. 민관 협력을 통해 우리 경제와 기업에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규칙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기술이 아직 확립되지도 않은 AI 분야에서 미국과 EU 간에 표준 관련 로드맵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는 모습을 보면 기술과 표준의 연관성과 중요성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