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표준은 무역규칙을 만드는 데 토대가 돼 무역에서 상호운용성을 높이고, 무역장벽을 제거해 거래비용을 낮추는 기능을 수행한다. 세계무역기구(WTO)의 무역기술장벽(TBT) 협정이 그 예이고, 이는 표준의 영향력을 크게 높였다. WTO/TBT 협정에 의해서 가맹국이 새로운 기술규정을 도입하고자 할 때 국제표준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중 간 기술패권 경쟁은 기술표준의 문제를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글 이희진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교수, 국제표준화연구센터장
사진한경DB, 세계표준화기구 홈페이지, 미국 국무부 홈페이지
국제표준화기구(ISO)1), 국제전기통신연합(ITU)2),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3)와 같이 널리 인정되는 국제표준기구에서 만들어진 기술표준은 WTO/TBT 협정으로 그 지위가 더욱 공고해졌다. 국제표준을 만드는 데 참여해서 자국 기업의 기술을 반영시킨 경우 무역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나라와 기업은 학습비용과 전환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즉 산업 및 경제적 관점에서 기술표준은 무역 원활화에 필수적인 역할을 하고, 기술표준을 주도하는 기업은 시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기술표준의 일반적인 기능이자 중요성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의 기술패권 경쟁은 기술표준을 다른 차원에서 바라볼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제 기술표준은 지정학적 차원의 문제로 확대됐고, 구체적으로는 경제안보 관점의 문제가 됐다.
경제안보는 이제 어느 나라의 국제전략 및 국가전략에서도 빠지지 않는 개념이 됐지만 그 정의는 아직도 만들어져가는 중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경제안보는 크게 네 가지 영역을 포함한다. 먼저 충분한 식량공급을 확보하고 핵심 자연/광물 자원에 대한 국가의 접근을 보장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금융시장 등 핵심 인프라를 물리적 또는 사이버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더불어 복원 가능하고 신뢰할 만한 공급망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총괄적으로 지정학적 경쟁국에 대한 기술우위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총체적 경제안보를 위해서는 네 가지 중 어느 하나도 빠질 수 없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패권 경쟁에서 경제안보가 부각되는 배경이고, 경제안보 논의가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와 기술보호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 중요성이 높아진 세 번째 영역과 네 번째 영역은 기술표준과 연관된다. 기술표준은 지정학적 경쟁국에 대한 기술우위를 확립하고 유지하기 위한 기본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표준은 다음과 같은 메커니즘을 통해 통상안보를 포함하는 경제안보에 기여할 수 있다.
첫째,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기술표준은 기술을 개발하고 시장에서 지속적인 경쟁우위를 유지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공급망에 관한 행정명령인 14017호 ‘미국의 공급망’ 보고서는 “단지 가격이 아니라, 제품과 서비스를 차별화하고 정상을 향한 경쟁(race to the top)으로 나아가는 시장 견인력(market pull)을 기업이 창출할 수 있도록 하는 강력한 도구”로서 표준을 강조한다.
둘째, 경제안보는 당장 현재의 안전만이 아니라 미래의 안전을 담보해야 한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기술표준은 향후 해당 기술의 발전 궤적(trajectory)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적이다. 즉 인공지능, 6세대(6G) 및 차세대 이동통신 등 신흥기술에서 지속적인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근본 수단이 된다. 중국의 5G 기술표준 주도 이후 기술표준, 특히 디지털 기술표준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5G에서의 표준 주도는 6G 및 차세대 이동통신에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경제안보의 지속가능성이 특정 기술 분야에서의 우위에 의해 지켜지는 데는 한계가 있다. 기술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분야에서의 우위를 추구하고 주요 기술에 대한 경쟁국의 접근을 배제하는 것(technology denial)은 지속가능하기 어려운 목표다. 그것보다는 기술들이 그 안에서 개발되는 틀과 바탕이 되는 가치(민주주의, 인권 등)를 규정하는 글로벌 규칙을 주도해야 한다. 기술표준화는 글로벌 규칙 제정의 주요 틀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기술표준의 전략적 가치가 통상을 넘어 안보 차원에서도 높아졌다. 지난해 8월 한·중 외교장관 회담에서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현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은 “세계화가 역류에 직면하고, 일부 국가가 경제문제를 정치화하고, 무역을 도구로 사용하고, 표준을 무기화하면서 글로벌 산업 공급망의 안정을 해치고 있다”고 말했다. 이 ‘표준의 무기화(weaponizing standards)’라는 표현보다 더 분명하게 표준의 지정학 차원으로의 격상과 경제안보에서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말은 없을 것이다. 한편 지난해 9월 ISO 및 ITU의 수장을 뽑는 선거가 있었다. ISO 회장 선거에서는 한국의 조성환 후보가 중국 후보를, ITU 사무총장 선거에서는 도린 보그단-마틴(Doreen Bogdan-Martin) 후보가 러시아 후보를 압도적인 표 차이로 이겼다. 이들 선거 결과의 독해를 위해서는 그 선거가 단지 일개 기구의 수장을 뽑는 선거가 아니었으며, 국제표준계의 동향과 기술 지정학적 경쟁이 연동돼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ITU 선거는 미국 국무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했는데, 이는 미국이 경제안보 관점에서 국제표준의 장에 복귀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국내적으로 미국은 반도체와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4)을 통해서 기술표준 분야를 지원한다. 일명 칩스(CHIPS)로 불리는 이 법은 반도체법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술표준과 국제표준화에 관한 ‘미래를 위한 국립표준기술원법’을 포함한다.
한편 미국의 기술표준에 대한 강조는 국내에 머무르지 않고, 글로벌 차원에서도 전개된다. 경제안보 관점에서 기술표준에 대한 강조는 미국이 주도하는 각종 안보·경제 글로벌 협의체에서도 잘 드러난다. 쿼드(Quad)5)와 같은 안보협의체에서도 표준이 빠지지 않고 논의되고 있다. 아래 표는 주요 양자 및 다자 간 글로벌 협의체에서 기술표준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들 문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볼 수 있다. 첫째, 민주주의, 인권 등 가치와 표준을 연계시킨다. 따라서 뜻을 같이하는(like-minded) 동맹국, 파트너국, 넓게는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의 협력을 강조한다. 둘째, 인공지능, 6G, 차세대 무선통신기술 등 핵심 신흥기술 또는 디지털 표준의 중요성과 협력을 강조한다. 셋째, 다중이해관계자(multistakeholders)의 국제표준화 과정 참여를 증진하고자 한다. 국가의 대표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반영하기 위해 소비자, 시민단체 등의 참여를 장려한다. 이는 국가중심주의 나라들의 입장과 비교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기술표준은 경제안보의 중요한 한 요소가 됐다. 민주주의 가치와 일치하는 표준 및 규범의 개발을 포함해서 국제기술 거버넌스를 지지하는 데 민주주의 국가 사이의 디지털 동맹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널리 공유되고 있으며, 이것을 위해서 기술표준 분야에서의 국제협력이 강조되고 있다.
지금까지 보아온 기술표준의 경제안보화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먼저 글로벌 차원에서 기술표준 협력을 위한 다양한 논의가 제기되고 있지만 실행을 위한 구체적인 성과와 추진 형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에게 기회일 수 있다.
우리나라는 기술선진국으로 기술표준 또는 규칙제정의 장을 이끌어갈 역량이 있다. 그러나 규칙 제정의 리더십은 기술역량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 역량과 정당성 확보가 관건이다. 미·중 두 나라의 기술을 둘러싼 대립 속에서 유럽연합(EU), 호주, 영국, 일본, 인도 등도 글로벌 규칙 제정, 핵심기술의 국제표준화 문제에 대해서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즉 글로벌 공급망 탈동조화(decoupling)에 이어 국제표준시스템의 탈동조화 가능성도 언급되고 있다. EU의 관련 논의를 보면 국제표준시스템의 탈동조화를 가장 경계해야 할 시나리오로 보고 있다. 특히 표준시스템의 탈동조화는 수출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과 같은 나라의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매우 크다. 따라서 이들 나라와 양자 또는 다자의 디지털 핵심기술 분야에서 규칙 제정 및 표준화를 위한 담론을 이끌어갈 필요가 있다.
영국의 움직임이 참고할 만하다. 지난 12월 7일 영국과 일본은 ‘UK-Japan Digital Partnership’을 발표했다. 이 문서에서 양국은 언론의 자유, 민주주의 및 법의 지배를 포함하는 근본 가치를 공유하는 두 나라가 이러한 가치와 일치하는 글로벌 규범과 표준을 확립하는 데 기여할 것을 공언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디지털 기술표준을 산업이 주도하고, 공개적이며 투명하고, 다중이해관계자의 환경에서 개발하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 이 문서는 네 개의 축(pillar)으로 구성돼 있는데 그중 하나가 ‘디지털 규제와 표준’이다. 다른 세 축(디지털 인프라와 기술, 데이터, 디지털 전환)에서도 표준은 바탕이 되는 개념이다. 영국과 일본은 글로벌 규범과 디지털 기술표준을 주도하고자 이미 협력을 시작한 것이다. 또한 최근 영국 외교부는 ‘한국의 디지털 기술표준에 대한 접근법’이라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브렉시트 이후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디지털 통상을 포함하는 디지털 분야의 규범 제정 및 표준화 논의에 참가하고 주도하고자 하는 영국의 의도를 내비치는 것이다.
우리도 이런 논의에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최근 발표된 ‘자유·평화·번영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주요 디지털 선도국과는 기술표준의 개발 및 연구를 공동으로 수행”하고 “디지털 국제표준화와 규범 형성을 선도해나갈 것”이라고 적시하는 내용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경제발전경험공유사업(KSP)이 호주국립대학 기술정책디자인센터(Tech Policy Design Centre)와 함께 디지털·핵심 기술 국제규정 제정과 표준화 분야에서의 한국과 호주의 협력을 위한 연구를 올해부터 진행한다. 이는 새로운 ‘인도태평양 전략’이 요구하는 바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고, 우리나라가 주요 표준 선도국과 취할 입장을 정립하는 데 필요한 좋은 출발점이다. 특히 호주와는 신흥기술 분야인 수소경제에 필요한 표준화 협력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제 막 출범하고, 한국이 정식 회원국으로 참여한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6)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IPEF는 기술표준, 특히 디지털 분야의 기술표준을 포함해서 새로운 규범을 만드는 장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선진국으로서 규칙 수용자에서 규칙 제정자가 되기 위해선 새로운 룰이 만들어지는 장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주요 디지털 선도국과의 협력과 더불어 여기에 개발도상국의 참여와 협력을 추가한다면 더욱 강화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이미 영국, 미국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글로벌 거버넌스를 주도해본 나라들은 핵심 디지털 기술 거버넌스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경쟁에서 개도국을 미래의 ‘디지털 결정자(digital decider)’라고 칭하며 논의의 장에 포용하기 시작했다.
기술표준, 특히 디지털 기술표준에 관한 논의는 통상에서 점차 중요해지고 있는 디지털 통상과도 바로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기술과 무역/통상이 만나는 곳에서는 글로벌 차원에서도 이제 막 규칙이 만들어져가고 있다. 미국·유럽연합(EU) 간 무역기술위원회(TTC; Trade and Technology Council)7)를 구성하면서, 첫 번째 작업반으로 기술표준 작업반을 만들고 핵심 신흥 기술표준에서 조율 및 협력을 촉진하는 것을 임무로 설정한 이유일 것이다. 국제표준화 경쟁은 글로벌 규칙/룰 형성의 시각에서 보아야 하고, 디지털 통상은 그것을 구성하는 하나의 전선이다. 디지털 통상의 문제를 통상 차원뿐만 아니라 기술 측면에서도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는 전문인력의 양성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현재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실시하는 디지털 통상 전문양성 프로그램도 매우 시의적절하다.
기술표준의 문제는 통상을 넘어 경제안보의 문제로 확장되고 있으며, 디지털 기술표준의 영역은 디지털 통상과 연계되면서 통상과 경제안보를 아우르는 통합적 접근을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