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으로 기술패권을 둘러싼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표준전쟁이 과거엔 한 산업 내에서 기업 간에 생존을 건 치열한 다툼이었다면, 최근엔 국가 간 경쟁 양상을 띠고 있다. 특히 중국이 통신, 인공지능(AI), 양자컴퓨팅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 선도적인 기술력을 확보하면서 이를 제어하기 위한 미국과의 갈등이 본격화되고 있다. 기술표준을 둘러싼 쟁점을 △경제안보 △데이터 현지화 △표준화 기구 △퍼스트 무버 등 4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
미국 정부의 중국 통신장비 기업 화웨이에 대한 제재는 표준전쟁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5세대 이동통신(5G) 기술표준을 둘러싼 경쟁은 양국의 사활을 건 전쟁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독립과 발전을 포함한 국익을 경제 측면에서 확보하기 위한 경제안보 정책이 전 세계적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이는 급속히 성장한 중국이 과학산업기술 역량을 바탕으로 기존 국제질서에 도전하면서 기술패권 경쟁이 심화되었고, 특히 인공지능(AI), 양자컴퓨팅 등 첨단기술 발전이 경제·군사적 경쟁까지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국과의 첨단기술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기술표준 선점 노력에 나서는 한편 안보를 명분으로 수출통제 수위를 높이면서 대(對)중국 견제를 강화하고 있다. 기술유출을 방지하고 첨단기술 개발을 지원하기 위한 각종 산업정책이 나오는 것도 이 같은 기술패권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조치다.
기술표준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앞으로 데이터 현지화(data localization)를 둘러싼 쟁투로 확대될 전망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국경을 넘어서는 자유로운 데이터 유통을 지지하는 국가들과 중국으로 대표되는 데이터 보호주의 진영이 첨예한 대립전선을 만들면서다.
디지털 무역이 늘어나면서 디지털 통상 장벽도 늘어나고 있는데, 데이터 분야에서 명확한 통상규범을 확립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의 주요 어젠다 중 하나도 디지털이다. 미국 등은 △국경 간 데이터의 자유로운 이동 △컴퓨터 설비의 현지화 요구 금지 △전자전송의 무관세 원칙 등을 요구하고 있는 반면 중국은 강력한 디지털 보호무역주의를 펴고 있다. 앞으로 신통상규범 확립 과정에서 ‘디지털’ 분야는 국가의 명운을 건 전장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국제표준을 담당하는 국제표준화기구(ISO)와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의 수장으로 각각 한국인과 미국인이 선출됐다. ISO는 2015~2017년 회장이 중국인이었고, ITU는 2014년부터 최근까지 사무총장직을 중국인이 맡았다는 점에서 이번 지도부의 변화가 의미 있다는 평가다. 표준은 기술을 연결하는 가치중립적인 도구지만 개발도상국은 기술 종속에서 벗어나고자 자국 기술의 국제표준화를 추진해왔고, 그중 움직임이 가장 두드러진 국가가 중국이었다. 중국은 국가적으로 국제표준화를 위한 로드맵을 만들었는데, 그중 국제표준에 영향을 주는 국제기구 진출은 국제표준화 프로젝트의 주요 업무였다. 그래서 이번 ISO와 ITU의 지도부 교체는 정치적 함의를 갖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경제안보가 부각되면서 우방과 최대한 협력해 정치적으로 위협이 될 것 같은 국가에 대항하는 것이 국제정세의 주요한 흐름이 되고 있는데, 세계 표준화 기구에서도 이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은 이번 ISO 진출을 국제표준화 커뮤니티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신흥 기술의 표준화 동향을 재빨리 업데이트해 한국의 산업경쟁력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한국이 빠른 시간 내에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에 들어서기까지 ‘패스트 팔로어(추격자)’ 전략이 유효했다. 우리나라는 해외 표준을 국내로 들여와 우리 산업과 기술에 접목하는 데 집중해왔다. 앞으로 한국은 지금까지 축적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선도적으로 기술표준을 선점하는 ‘퍼스트 무버(선도국)’로 나아가야 한다는 평가다. 한국이 보유한 기술력을 국제표준화해 우리 주도의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무게를 실어야 할 때라는 의미다. 이를 위해서는 연구개발(R&D) 기획 단계부터 기술 개발과 표준화 작업, 특허권(IP) 확보 전략까지 종합적인 계획이 세워져야 한다.
퍼스트 무버로서의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한 대표적 사례가 바로 통신 분야다. 도심항공교통(UAM) 등 미래 정보통신기술(ICT)의 중심인 6세대 이동통신(6G) 관련 기술개발 및 표준 선점 경쟁이 치열하다. 글로벌 특허가 출원된 6G 기술 약 3만8,000건 중 중국이 35%로 가장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그다음이 미국(18%), 일본(13%), 한국(10%) 순이다. 글로벌 표준 선점은 국가경제 발전과 미래안보를 지키기 위한 시급한 과제라는 점에서 정부와 민간기업이 힘을 모아서 글로벌 표준 플랫폼 구축에 나서야 할 때라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