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가 촉발한 에너지 위기는 에너지 수급의 비상상황과 기술패권 경쟁을 가속화하며 세계 각국에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됐다. 주요국들은 안정적인 에너지 수급을 위해 공급망을 재편하고 에너지 믹스를 조정하는 등 자국의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당면한 에너지 위기 극복과 에너지 안보 확립을 위한 전략적 대응방안을 모색하고자 전문가 대담을 마련했다.
진행 김광균 기자 사진박충렬
대담자 |
이원용
산업통상자원 R&D 전략기획단 에너지MD |
김진수
한양대 자원환경공학과 교수 |
토론 제시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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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가스 공급량 감축과 유럽을 중심으로 한 경유 재고 부족 현상은 가스·경유 가격 변동과 함께 전반적인 가격 상승을 불러왔다. 유럽 국가들이 동절기 가스 재고 확보에 나서면서 비축량이 늘었고 따뜻한 날씨도 가격이 안정화 국면으로 접어드는 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동절기 날씨가 계속 온화하리라는 보장이 없고 아시아 시장에서 중국과 인도 등이 상당량의 가스를 수입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수급 불안에 대한 우려가 높은 상황이다. 불안정한 수급 요인이 많고 공급이 증가할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에 한동안 현 상황이 개선되리라고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다.
제한적인 에너지 공급 상황이 계속되면서 에너지 수입국 간 물량확보와 비축량 증대 경쟁도 심화되는 양상이다. 이런 가운데 수입처 다변화를 위한 통상정책과 더불어 신재생에너지 확대, 에너지 효율 개선 투자 등을 통해 에너지 수요 자체를 줄이는 것이 중요한 해결책으로 인식되고 있다.
최근 유럽 천연가스 가격 지표인 TTF(Title Transfer Facility)나 동북아 지역 액화천연가스(LNG) 가격 지표인 일본·한국 가격 지표(JKM) 등의 변화에서 볼 수 있듯 가스 가격이 상당히 안정화됐다. 일각에서는 에너지 가격이 안정기에 들어선 게 아니냐는 반응도 나온다. 한숨 돌리긴 했지만 여전히 불씨는 남아 있다.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미·중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고 에너지·자원 시장 지형도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에너지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지정학적 요인의 변화로 위기가 찾아오는 주기는 짧아지고 위기의 파급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 지금의 위기는 두 가지 변화를 불러왔다. 첫째는 기존 화석연료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공급망 변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의 대러 제재로 러시아 수출물량에 대한 여러 조정이 이뤄졌다. 유럽이 러시아산 LNG의 대체재를 찾아 나섬에 따라 공급망 재편이 본격화됐고 지난해 내놓은 ‘리파워 EU(REPower EU)’ 정책에서도 러시아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세계 주요국들이 공급·비축·수요 세 가지 측면의 전통적 대응수단을 강구하던 과거와 달리 에너지 안보 기본계획 수립, 핵심광물 확보방안 마련, 국제공조 강화 등 다각적인 대응전략을 모색하고 있는 것도 주된 변화라 할 수 있다.
에너지 전환과 에너지 안보는 별개의 개념이 아닌 같은 개념이라고 본다. 리파워 EU를 내세운 유럽의 움직임을 보더라도 두 개념을 따로 놓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이번 위기로 에너지 전환이나 탄소중립이 좀 더 힘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까지 의지해온 화석연료가 기댈 만한 언덕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자국에서 생산할 수 있는 청정에너지에 관심을 더 많이 갖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또한 에너지 위기 극복을 위한 각국의 움직임과 변화 속에서 주도권 싸움의 양상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누가 석유나 가스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느냐를 두고 다퉜다면 이젠 새로운 에너지시스템의 공급망을 누가 더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느냐의 싸움으로 전환됐다. 그런 점에서 보면 EU가 리파워 EU를 강화한 것이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비롯한 미국의 정책적 움직임은 헤게모니를 계속 우위에 두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에 발맞춰 우리도 에너지 안보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고 대응전략을 가져가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동안 세계 각국의 공조로 탄소중립 정책이 추진되다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에너지 안보 개념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탄소중립과 에너지 안보는 서로 다른 개념이 아니다. 탄소중립이 큰 조류라면 에너지 안보는 큰 파도라 할 수 있다. 즉 탄소중립을 큰 전략으로 본다면 에너지 안보는 시시각각 대응해야 하는 중요한 전술인 셈이다. 주요국들이 자국 우선주의에 기반해 자국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기술패권을 잡으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지면서 자연스럽게 에너지 안보의 의미가 강조되는 상황이다. 현재 미국은 IRA를 통해 탄소중립과 에너지 안보, 산업 경쟁력 강화까지 다 잡으려 하고 있다. 유럽의 리파워 EU도 마찬가지다. 산업 부문의 연료 전환, 재생에너지 증대 등을 통한 탄소중립 이행, 원자력·수소 등을 활용한 에너지 자급률 증대와 더불어 공급망 다각화를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전략이다. 세계 각국이 에너지 수급과 기술확보 경쟁에 집중함에 따라 단기적으로 에너지 안보 문제도 계속 강조될 수밖에 없다.
탄소중립과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 원자력, 수소, 재생에너지 등의 에너지원은 경쟁관계가 아니다. 한국은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다. 재생에너지 발전단가가 높고 땅값이 비싸며 에너지 집약적인 산업 비중도 높다. 그렇다 보니 우리가 주력 산업의 경쟁력을 갉아먹으면서 탄소중립을 해야 하는 거냐는 식의 문제 제기가 항상 나온다. 탄소중립을 이행하며 안보도 챙겨야 하는 어려운 상황인 만큼 에너지원 간 적정 비중을 검토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뤄 나가는 방향으로 논의가 흘러가야 한다.
안보 측면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다각화’와 ‘유연성’이다. 에너지시스템을 통합 관리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주요국들처럼 여러 수단을 동시에 운영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안보 관련 전략을 각각의 에너지 분야 공기업이 맡아왔는데 앞으로 종합적인 계획 수립이 요구되며 컨트롤타워의 역할도 중요하다. 에너지 안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법체계와 거버넌스 정립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에너지 안보와 탄소중립은 공짜로 달성할 수 없다. 현재 우리가 지출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 비용을 지출해야 하는 만큼 충분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도록 체질을 개선해나가야 하는 시점이다.
재생에너지와 원자력, 수소에너지 모두 각각의 역할이 있고 에너지 안보는 물론 탄소중립 관점에서도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봐야 한다. 환경과 지속가능성을 고려한 탄소중립, 경제를 고려한 신산업 육성, 안정성을 고려한 에너지 안보는 세 개의 축을 이루며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탄소중립 이행 달성을 위한 일관성 있는 정책 추진이 요구되며 에너지 안보 문제는 매 순간 변하는 대내외 여건에 맞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단기적으로는 에너지 수급 문제로 에너지 믹스에 변동이 있을 수 있지만 탄소중립을 위한 큰 기조에는 변화가 없다고 봐야 한다. 에너지 안보를 위해서는 외교통상을 통한 에너지 공급원의 다각화와 더불어 전력원 포트폴리오의 다각화도 필수적이다. 기술과 산업적 측면에서는 에너지 생산부터 저장, 운송, 사용까지 고려한 에너지 기술을 확보하고 에너지 수요 관리를 비롯해 에너지 효율 최적화를 이뤄내는 통합적인 에너지 기술 정책이 요구된다.
이와 더불어 지역 중심 분산발전 설비 지원 확대를 통해 지역 단위로 에너지 자립률을 극대화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