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6월 10일(이하 현지시각) 벨기에 브뤼셀을 방문해 안토니우 코스타 EU(유럽연합) 정상회의 상임의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제11차 한·EU 정상회담을 하고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성사된 이번 유럽 순방은 이재명 정부 출범 후 첫 유럽 방문이자, 한국 대통령의 EU 방문으로는 8년 만이다. 2011년 7월 1일 잠정 발효된 한·EU 자유무역협정(FTA)이 7월 1일로 발효 15주년을 맞는 시점이기도 하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한국 대표단을 만나 “EU와 한국의 파트너십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며 “경제 안보를 강화하고 혁신을 주도하기 위해 양국이 협력하자”고 말했다. 이런 환대는 양측을 둘러싼 지정학적, 지경학적 기류가 15년 전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방증한다. 과거의 무역이 ‘최저 비용과 최대 효율’이라는 세계화 법칙을 따랐다면, 오늘날은 ‘공급망 회복력과 국가 안보’라는 냉혹한 생존 방정식에 따라 재편되고 있다.
외연 확장의 이면, 선언에 머무는 핵심 공급망
양측의 상품 교역 규모는 FTA 발효 이후 15년 간 비약적으로 성장해 2025년 기준 약 1212억유로(약 1369억달러)에 이른다. EU는 한국과 상품 무역에선 약 150억유로 적자를, 서비스 교역에서는 흑자(2024년 기준 약 860억유로)를 기록했다. 또한, EU는 한국 내 최대 외국인직접투자(FDI) 주체로서, 2025년 기준 EU의 FDI 누적 금액은 1350억달러로 전체의 25.2%를 차지한다. 이번 한·EU 정상회담에서는 양측이 2023년 10월 협상을 시작하고 2025년 3월 타결을 선언한 한·EU 디지털통상협정(DTA)1)에 정식 서명했다.
이는 한국이 싱가포르에 이어 체결한 두 번째 양자 디지털통상협정이자, 5대 교역 상대국과 맺는 첫 디지털통상협정이다. 마로시 셰프초비치 EU 통상·경제안보 집행위원은 협정 서명 후 “디지털 무역이 지속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이번 협정은 우리 파트너십이 미래 속도를 맞출 수 있게 보장한다”고 말했다. 같은 날 산업통상부는 오라폴(독일), 콴델라(프랑스), 프로드라이브 테크놀로지스(네덜란드), 마이크로닉(스웨덴) 등 네 개 첨단 기업으로부터 총 1억6500만달러(약 2500억원) 규모의 투자 신고를 접수했다고 밝혔다.
양측은 또 무역, 투자, 공급망, 디지털, 첨단 기술, 에너지, 혁신 분야 협력을 심화하기 위한 ‘한·EU 경쟁력 파트너십’ 구축을 추진하고, 경제 안보, 산업 정책 협력을 위한 ‘한·EU 고위급 경제 대화’를 신설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있다. EU는 한국의 3위 교역국이지만, 반도체·배터리·핵심광물·방산 등 진짜 승부처인 핵심 공급망 협력은 한미·한일 관계와 비교해 ‘선언적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규제 행동주의와 공급망 무기화의 위협
최근 한·EU 관계 재설정을 강제하는 변수는 EU발 ‘규제 행동주의(Regulatory Activism)’다. 이는 과거 관세를 낮춰 시장을 열어주던 EU가 이제는 환경·노동·원산지 등 촘촘한 규제 그물을 짜서 이를 통과한 기업에만 시장 진입을 허용하는 ‘새로운 보호무역주의’로 선회했음을 뜻한다. EU 집행위원회는 3월 4일 산업가속화법(IAA)을 제안했다. 철강·알루미늄·자동차·넷제로 기술 등 전략 부문의 공공 조달과 공적 지원에 ‘메이드 인 유럽’ 원산지 요건을 도입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철강관세할당제(TRQ)는 더 직접적인 압박이다.
EU는 2018년부터 운용해 온 철강 세이프가드 조치가 6월 30일 만료됨에 따라 이를 대체할 철강 공급과잉 대응법을 마련했다. 유럽의회는 5월 19일 무관세 수입 쿼터를 기존 대비 47%, 약 1830만t으로 축소하고, 초과 물량에 대한 관세를 25%에서 50%로 인상하는 법안을 606 대 16으로 가결했다. 회원국(이사회) 승인 절차를 거쳐 7월 1일부터 시행됐고, 국가별 쿼터 배분을 둘러싼 한·EU 간 협상은 정상회담 당일, 막판까지 이어졌다. 1월 1일 시행 단계에 돌입한 CBAM은 사실상 ‘탄소 관세’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 기업은 철강·알루미늄 등 탄소 집약 제품을 EU에 수출할 때마다 제품 생산과정에서 발생한 탄소 배출량을 고스란히 증명해야 한다. EU 기준을 초과한 배출량만큼 탄소 인증서(배출권)를 구매해 비용을 지급해야 하는 압박에 직면해 있다. 이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철강 쿼터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새로운 무역 장벽으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는 우리측 입장을 전달했다. 채드 바운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선임연구원은 “한국과 EU는 중국의 시장 지배력 무기화에 공동으로 대응해야 한다”며 “중국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공급망 협력과 산업 정책 공조가 양측 관계의 핵심 과제가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무역 규범 넘어 전략적 산업 협력 플랫폼 진화
김수동 산업연구원 글로벌경쟁전략연구단장은 “한·EU FTA는 개방적인 시대에 체결된 협정인데, 현실은 경제 안보의 시대로 바뀌었다”며 “세계 통상 질서는 더 이상 관세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업 경쟁력만으로 시장을 개척하던 자유무역 시대는 저물고 이제는 국가가 보조금을 지급하고 공급망을 통제하며 시장을 주도하는 ‘지경학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한·EU 관계의 성패는 눈앞에 닥친 무역 장벽 갈등을 외교로 해결하는 동시에 선언에 그쳤던 공급망 협력을 국가 간 법적·제도적 구속력을 갖춘 계약으로 잘 안착시킬 수 있느냐에 달렸다. 바운 선임연구원은 “한국과 EU가 공동의 무역 갈등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창의성과 타협 의지”라며 대체 공급망 구축과 산업 정책 조율을 주문했다. 단기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는 명확하다. 한국 기업이 한국형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K-ETS)를 통해 치른 탄소 배출 비용을 EU 측에서 100% 공제받아 ‘이중과세’의 덫을 피해야 한다.
대폭 축소된 철강 TRQ에서 한국산 철강의 안정적인 국가별 쿼터를 선점해 수출길을 지켜내는 것도 과제다. 향후 산업가속화법(IAA)이 유럽 현지에 공장을 짓지 않은 한국 기업을 보조금과 공공 조달에서 배제하는 ‘차별적 압박’으로 변질되는 것을 차단할 필요가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반도체·배터리·방산·디지털 공급망을 다루는 상설 협의체 작동 여부가 다음 단계를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한·EU 정상회담에서 공식 출범에 합의한 ‘한·EU 경쟁력 파트너십’과 핵심 상설 대화체인 ‘한·EU 고위급 경제 대화’는 이 위기를 돌파할 외교 전선이자 첫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용어설명
- 1한·EU 디지털통상협정(DTA)
2011년 발효된 한·EU 자유무역협정(FTA)의 전자상거래 규범을 대폭 확장·대체하기 위해 2026년 6월 체결된 협정. 데이터 이동 자유화, 디지털 인증 호환, 소비자 보호 및 보안 강화 등을 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