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 15주년을 맞았다. 2011년 7월 1일 한·EU FTA가 발효된 이후 양측 관계는 분명한 성과를 거뒀다. EU는 한국의 3대 상품 교역 파트너이고, 한국은 EU의 8대 상품 교역 파트너다. 2025년 양측 상품 교역은 약 1212억유로 규모에 이르렀고, EU는 한국 내 최대 외국인직접투자(FDI) 주체로 자리 잡았다. 관세 인하, 시장 개방, 자동차·의약품·전자 분야의 비관세장벽 완화는 한·EU 경제 관계를 안정적으로 키워온 기반이다.
그러나 FTA 15년의 성과를 평가하는 지금, 양측 관계는 과거보다 미래를 향해야 한다. 한·EU 통상 관계는 여전히 강하지만, 세계 통상 질서는 더 이상 관세율 인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탄소 배출량, 공급망 안정성, 역내 생산, 데이터 이전, 핵심광물 접근성, 산업 보조금, 안보상 민감한 기술이 시장 접근의 새로운 조건이 되고 있다. 한·EU FTA는 개방의 시대에 체결된 협정인데, 양측이 마주한 현실은 경제 안보의 시대다.
IAA·철강 TRQ·CBAM, 한국 수출의 새 시험대
특히 최근 EU가 추진하는 산업가속화법(IAA·Industrial Accelerator Act), 철강관세할당제(TRQ)1), 탄소국경조정제도(CBAM)2)는 한·EU 관계를 재설정하게 하는 직접적 계기다. 세 제도는 각각 산업 정책·무역 규제·기후 규제라는 다른 이름이 있지만, 기업으로서는 하나의 메시지로 읽힌다. 앞으로 EU 시장에 접근하려면 단순히 좋은 제품을 경쟁력 있는 가격에 공급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제품이 어디서 생산됐는지, 생산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탄소를 배출했는지, 공급망이 얼마나 투명한지, EU의 산업 전략에 얼마나 부합하는지가 함께 평가된다. EU 집행위원회가 2026년 3월 제안한 IAA는 전략산업의 생산능력과 탈탄소화를 동시에 끌어올리려는 법안이다. 철강·알루미늄·자동차, 넷제로 기술 등 전략 부문에서 공공 조달과 공적 지원을 지렛대 삼아 저탄소 제품과 EU 내 생산을 유도하겠다는 취지다.
이는 한국 기업에 이중적 의미가 있다. 한편으로는 EU 내 생산 거점과 투자를 이미 확대해 온 배터리·전기차·소재 기업에 기회가 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원산지, 현지 부가가치, 저탄소 기준이 조달과 보조금 접근 조건으로 강화될 경우 한국산 제품의 시장 접근 비용은 커질 수 있다. 철강 TRQ는 더 직접적이다. EU 이사회는 2026년 6월 8일(이하 현지시각) 글로벌 철강 과잉 공급에 대응하기 위한 새 규정을 채택했고, 이 제도는 기존 철강 세이프가드가 2026년 6월 30일 만료된 뒤, 7월 1일부터 적용된다.
새 규정은 수입 쿼터를 줄이고, 쿼터 초과분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며, 철강이 실제로 용해·주조된 국가를 확인하는 ‘melt-and-pour’ 요건을 도입한다. EU는 이를 공급과잉과 우회 수출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하지만, 한국 철강 업계에는 쿼터 배정, 원산지 증빙, 납기 안정성, 가격 경쟁력 문제로 다가온다. 2026년 1월 1일 본격 시행된 CBAM은 한층 구조적인 변화를 불러온다. CBAM은 EU로 수입되는 철강·알루미늄·시멘트·비료·전기·수소 등 탄소 집약 제품에 내재 배출량 기준의 탄소 비용을 부과하는 제도다. EU 수입자는 일정 기준을 넘는 CBAM 대상 물품을 수입할 경우 승인된 신고인 지위를 갖추고, 배출량을 신고하며, 인증서를 구매·제출해야 한다. 인증서 가격은 EU 배출권거래제 가격과 연동된다.
중장기 과제는 더 넓다. 한·EU 관계는 디지털·반도체·배터리·방산 공급망을 중심으로 협력 체계를 제도화해야 한다.
물량·비용·입지 압력에 맞선 통상 외교 과제
이 세 제도는 한국 산업과 수출구조에 세 가지 압력을 동시에 가한다. 첫째는 물량 압력이다. 철강 TRQ는 EU로 들어갈 수 있는 물량 자체를 제한한다. 둘째는 비용 압력이다. CBAM은 제품의 탄소 집약도에 따라 수출 비용 부담을 높인다. 셋째는 입지 압력이다. IAA는 EU 내 생산, 고용, 저탄소 인증, 현지 공급망 참여를 더 중요하게 한다. 결국 EU 수출 경쟁력의 기준은 가격과 품질 중심에서 쿼터·탄소·원산지·데이터의 결합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단기적으로는 세 가지 현안을 패키지로 관리해야 한다. 첫째, CBAM 대응에서는 한국 배출권거래제와 EU CBAM 간 중복 부담 방지, 한국 검증 기관 인정, 제삼국에서 이미 납부한 탄소 가격 공제 기준을 조속히 구체화해야 한다. 한국 정부도 첫 전략 대화에서 CBAM 단순화 조치를 환영하는 한편, 한국 배출권거래제와 중복 부담 방지 및 한국 검증 기관 인정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는 단순한 기업 애로가 아니라 한·EU 기후 통상 협력의 핵심 시험대다.
둘째, 철강 TRQ에서는 한국이 글로벌 공급과잉의 원인 제공자가 아니라 안정적이고 책임 있는 공급자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한·EU FTA에 기초한 장기 교역 관계, 한국 철강 업계의 탈탄소 투자, EU 자동차·기계·건설 공급망에 대한 기여를 근거로 국가별 쿼터와 품목별 운영 예측 가능성을 확보해야 한다. 동시에 기업은 melt-and-pour 증빙, 제품별 CN 코드 관리, 쿼터 소진 시 가격 조정 조항, EU 고객사와 물량 배분 체계를 정비해야 한다.
셋째, IAA 대응에서는 EU의 저탄소 산업 정책이 차별적 현지화 압력으로 흐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EU FTA와 세계무역기구(WTO) 정부조달협정(GPA) 등 관련 규범, 상호주의 원칙을 토대로 한국산 제품과 한국 기업의 EU 내 투자에 대한 공정한 대우를 확보해야 한다. 특히 배터리·전기차·철강·알루미늄·수소·재생에너지 등은 한국의 주력 수출·투자 분야다. 이 영역에서 협상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않으면 개별 기업은 조달 시장, 보조금, 인허가, 탄소 인증의 문턱을 따로 넘어야 한다.
선언을 넘어 경제 안보 파트너십으로
중장기 과제는 더 넓다. 한·EU 관계는 디지털·반도체·배터리·방산 공급망을 중심으로 협력 체계를 제도화해야 한다. 한·EU 차세대 전략 대화 출범을 계기로 양측은 가칭 ‘한·EU 전략 경제 안보 파트너십’을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FTA 이행, 디지털통상협정(DTA), CBAM, IAA, 철강 TRQ, 핵심광물, 반도체, 배터리, 방산 공급망을 동일한 협의 테이블에서 조정하는 상설 플랫폼이어야 한다. 한·EU 통상 관계를 FTA의 틀에 가두지 말고, 경제 안보 시대에 맞는 전략적 산업 협력 플랫폼으로 격상해야 한다. 그것이 양측이 불확실한 세계경제 환경 속에서 함께 경쟁력을 확보하는 길이다.
용어설명
- 1철강관세할당제(TRQ)
TRQ는 일정 수입 물량까지는 무관세 또는 낮은 관세를 적용하고, 이를 초과하는 물량에는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수입 관리 제도다. EU의 신규 철강 TRQ는 기존 철강 세이프가드를 대체하는 제도로, 글로벌 철강 공급과잉과 우회 수출을 억제하기 위해 도입됐다. EU는 철강 수입 쿼터를 축소하고 쿼터 초과분에 50% 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2탄소국경조정제도(CBAM)
CBAM은 EU로 수입되는 탄소 집약 제품에 대해 생산과정에서 발생한 내재 배출량을 기준으로 탄소 비용을 부과하는 제도다. 적용 대상은 철강·알루미늄·시멘트·비료·전기·수소 등이며, 2026년부터 본격 적용되고 있다. EU는 이를 EU 배출권거래제와 연계해 역내 기업과 수입품 간 탄소 비용 격차를 줄이고, 탄소 누출을 방지하는 장치로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