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는 흔히 ‘문제’의 일부로 여겨졌지만, 오늘날 이들 국가는 많은 문제의 해법을 찾는 데 꼭 필요한 주체로 인식되고 있다. 글로벌 노스(Global North)1) 사이에서는 신뢰할 수 있고 가치관을 공유하는 글로벌 사우스와 협력할 중요성이 더 커졌다.” 암리타 날리카(Amrita Narlikar) 인도 싱크탱크 옵서버리서치재단(ORF) 연구원은 최근 ‘통상’과 인터뷰에서 글로벌 사우스의 가치를 이렇게 평가했다. 옵서버리서치재단은 인도를 대표하는 싱크탱크다. 매년 인도 외교부와 함께 다자간 정치 안보 포럼 ‘라이시나 다이얼로그(Raisina Dialogue)’를 연다.
날리카 연구원은 국제 협상, 세계무역, 다자주의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학자다. 2014~2024년 독일 글로벌지역연구소(GIGA) 소장을 지냈고, 영국 케임브리지대 국제관계학 교수, 독일 함부르크대 국제관계학 교수로 재직했다. 날리카 연구원은 “양극화와 고립이 심화하는 세계에서 가치관을 공유하는 국가와 협력이 중요하다”며 “한국, 인도, 유럽연합(EU), 호주 같은 나라가 다양한 의제 영역에서 연합과 협력체를 형성해 나간다면, 앞으로 세계는 미·중 경쟁이 지배하는 체제가 아닌 다극적 질서가 나타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인도와 동남아시아 경제권이 앞으로 글로벌 경제성장을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글로벌 사우스 주목받는 이유는.
“세계적인 지정학적 격변은 여러 국가가 새로운 협력 파트너를 찾게 했다. EU가 대표 사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에너지 공급이나 전략물자와 관련해 권위주의 체제 국가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다시 생각하게 했다. 그 결과 유럽에서는 공급망을 다변화해야 한다는 논의가 한층 본격화했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후 이끄는 미국 정부는 오랫동안 당연시돼 온 기본 전제, 즉 대서양 동맹의 안보가 더 이상 확실하게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줬다. 이런 상황에서 글로벌 노스 사이에서는 신뢰할 수 있고 가치관을 공유하는 글로벌 사우스와 협력할 중요성이 더 커졌다. 아울러 여러 글로벌 사우스는 스스로 경쟁력을 키워왔다.
최근 신흥동반국이 전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그 국가 자체에도 공이 있다. 그들 국가들이 매우 영리하게 전략을 구사해왔기 때문이다. 이들은 경제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인프라를 확충하며, 거버넌스(governance·지배구조)를 개선해 왔다. 일부 국가는 민주주의에서 오는 이점도 누리고 있고, 일부는 핵심광물과 기타 필수 자원의 공급지다. 전반적으로 이들 국가는 단지 현재의 지정학적 위험과 불확실성 때문만이 아니라, 그 자체의 역량과 조건만으로도 경제·지정학적 협력 파트너로서 매력을 높여가고 있다. 과거 글로벌 사우스는 흔히 문제의 일부로 여겨졌다.
예컨대 기후변화 문제에서 그렇게 취급되곤 했는데, 1인당 이산화탄소 최대 배출국은 오히려 선진국이었음에도 그랬다. 또는 자원이 풍부해 개발과 활용의 대상으로만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들 국가는 많은 문제의 해법을 찾는 데 꼭 필요한 주체로 인식되고 있다. 기후변화 완화, 디지털 격차 해소, 디지털 기술 규제, 글로벌 거버넌스 개혁, 새로운 발전 경로 모색 등에서 그렇다. 중요한 점은 이런 해법을 설계하는 과정에서도 이들 국가가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참여 없이 이뤄지는 어떤 글로벌 논의도 실질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글로벌 사우스가 스스로 경쟁력을 키운 주목할 만한 사례는.
“예를 들어 인도는 다중 정렬(multi-alignment)2) 정책을 통해 미국 조 바이든 정부 시기 러시아, 유럽, 미국 모두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부러운 위치에 설 수 있었다. 미국 정부는 몇 가지 도전 과제를 안겨줬지만, 이 경우에도 인도의 다중 정렬과 다변화 전략은 여전히 강점으로 작용했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인도가 다른 파트너와 체결한 여러 무역 협정이다. 여기에는 EU와 합의도 포함되는데, 이 합의는 무역 뿐 아니라 외교·안보 정책까지 포괄한다. 여기에 다중 정렬에 대한 전략적 선견지명, 세계 최대 민주주의 국가라는 정체성, 민주적 가치에 대한 헌신 그리고 거대한 시장이 지닌 매력까지 더하면, 많은 나라가 글로벌 가치 사슬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왜 인도에 주목하는지 분명해진다.”
인도와 EU는 20년에 걸친 협상 끝에 2026년 1월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다. 양측은 자동차를 포함한 90%가 넘는 상대국 상품에 관세를 인하하거나 없애기로 했다. 인도는 EU산 자동차에 부과하는 관세를 앞으로 5년 동안 기존 110%에서 10%까지 단계적으로 낮추기로 했고, EU는 인도산 가죽 제품, 화학제품, 플라스틱, 고무, 섬유, 의류, 보석 등에 부과하던 관세를 없애기로 했다. 양측은 FTA 체결과 함께 해양 안보, 사이버 보안, 대테러 등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는 국방·안보 협정도 체결했다.
우리는 인간 중심의 발전 모델만이 아니라, 지구 중심의 발전 모델도 함께 고민하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글로벌 사우스의 젊은 인구구조는 경제성장 동력이다.
“그렇다. 다만 인구구조가 실제 성장으로 이어지려면 현명한 정책이 뒷받침돼야 한다. 여기에는 청년층 인구 증가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노동시장 개혁, 아동과 고령층을 포함한 모두를 위한 최첨단·접근 가능한 의료 체계,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 여성의 역량 강화가 포함된다. 아울러 과거 다른 국가에서 효과를 냈던 정책이 앞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게 봐야 한다. 그 이유는 다자주의의 위기뿐 아니라 인공지능(AI)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 직업훈련, 재교육, 역량 강화는 AI가 가져올 수 있는 도전을 더 큰 포용, 평등, 성장, 발전의 기회로 바꾸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적절한 정책이 뒷받침된다면, 선진국과 글로벌 사우스의 인구학적 대비는 전 세계 모두에게 윈윈이 될 수 있다. 고령화가 진행 중인 선진국 경제는 노동력 부족을 비롯한 여러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해법은 무엇인가.
“서구의 정치인이 자국 경제가 직면한 인구 문제를 진지하게 해결하고자 한다면, 내부적으로 쉽지 않은 정치적 논의를 감수할 필요가 있다. 국제무역의 무기화 현상만 보더라도, 경제는 정치와 분리된 채 운영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숙련 이민자에 대한 사회적 서사와 정책 방향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서구는 글로벌 사우스의 인구구조 효과가 실현되는 시기를 지원하기 위해 개발원조와 각종 협력 프로그램을 확대해야 한다. 이는 개발도상국뿐 아니라 선진국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한국도 고령화로 생산연령인구가 급감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한국은 과거 ‘젊은 인구’ 효과를 효과적으로 활용해 경제를 성장시킨 훌륭한 사례를 보여주었다. 오늘날 다른 국가는 한국의 경험에서 배울 점이 많다. 현재는 저출산·고령화 인구구조가 부담이지만, 높은 수준의 기술 역량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AI가 제공하는 기회를 활용해 급속한 고령화 비용을 줄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한편으로, 이제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국가가 한번쯤 자문해 봐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지구가 계속해서 증가하는 인구를 과연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인간 중심의 발전 모델만이 아니라, 지구 중심의 발전 모델도 함께 고민하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글로벌 사우스 중에서도 향후 성장세가 가장 두드러질 지역은.
“많은 불확실성이 있고, 서아시아 전쟁과 이의 전 세계적 파급효과까지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아시아를 주목한다. 그중에서도 인도와 동남아시아 경제권이 성장을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 인도에 대해 낙관하는 이유는 젊은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역동성과 인도를 하나의 문명국가로 만드는 오랜 전통이 함께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는 일본, 한국, 유럽, 브라질, 남아공 등 다른 민주주의 국가에도 매력적인 협력 파트너가 될 것이다. 다만 이러한 유망한 성장 궤도를 유지하려면 국가 내부 경제개혁이 핵심적이며, 양극화와 고립이 심화하는 세계에서 가치관을 공유하는 국가와 협력 역시 중요할 것이다.”
글로벌 사우스의 부상이 국제 질서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국제 질서를 어떻게 만들지는 결국 미국과 중국 이외의 나머지 국가에 달려있다. 각국이 냉전 시기처럼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릴 위험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글로벌 자원의 분포, 서로 다른 인구구조는 다양한 목소리가 등장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따라서 미·중 경쟁이 지배하는 체제가 아닌 다극적 질서가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특히 인도, 한국, EU, 호주 같은 나라가 다양한 의제에서 협력체를 형성해 나간다면 그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다.”
정책 결정자나 기업 리더가 글로벌 사우스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바꿔야 할 인식은 무엇인가.
“중요한 질문이다. 다시 인도를 예로 들어보겠다. 인도의 협상 문화는 오랫동안 정책 결정자와 기업 관계자를 당혹스럽게 해왔다. 그러나 인도 문화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면, 이해의 폭이 넓어질 뿐 아니라 협상 결과 역시 훨씬 더 효율적으로 도출될 수 있을것이다. 예컨대 인도를 ‘과거 영국 식민지였고 영어 사용 인구가 많은 나라’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인도는 하나의 문명국가이기 때문이다.
인도인이 사회, 전쟁, 환경, 권리에 대해 어떻게 사고하는지를 이해하려면, 현대 인도의 가치뿐 아니라 고대의 원천에서 비롯돼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전통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는 다른 국가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중남미에서 토착 문화와 사상이 수행하는 역할 역시 같은 맥락에서 중요하다. 따라서 정책 결정자와 기업 리더는 해당 국가 시장에 진출하려 할 때, 그 나라에 관한 학제적 전문 지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은.
“지금은 우리가 기존의 세계화와 거버넌스 모델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 재구성 과정에서, 인간의 번영뿐 아니라 이 행성을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의 복지와 존엄까지 보장할 수 있도록 우리의 소비 패턴과 국제무역 흐름을 더 자비롭고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바꾸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용어설명
- 1글로벌 노스(Global North)
북반구에 있는 서구 선진국으로, 글로벌 사우스와 대비되는 개념.
- 2다중 정렬(multi-alignment)
쿼드(QUAD·미국, 일본, 인도, 호주로 구성된 안보 협력체),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 상하이 협력기구(SCO·중국과 러시아 주도로 설립된 다자 협의체) 등을 통해 여러 강대국·협의체와 동시 협력하는 외교 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