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20일 한국의 수출액이 435억달러(약 62조2000억원)를 넘어서며 같은 기간 기준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지난해 12월의 기록(430억달러)을 두 달만에 넘어선 성과다. 가파른 상승세는 인공지능(AI) 열풍에 따른 반도체 수요 폭증이 견인했다.
미국 역시 지난해 수입액이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트럼프 정부의 관세장벽에도 불구하고, AI 데이터센터 건설 붐이 수입 확대를 이끌었다. 실제 지난해 하이퍼스케일러 기업(아마존·구글·마이크로소프트 같은 초대형 클라우드 서비스 제공 업체)의 데이터센터 규모는 전년 대비 43.4% 급증한 8155㎿(메가와트)에 달했다.
북미 지역은 지난해 전 세계 AI시장에서 31.8~35.5%의 점유율을 차지한다. 아시아와 유럽 추격세도 매섭다. AI는 이제 글로벌 경제성장의 핵심 축이다. 세계무역기구(WTO)가 지난해 10월 발간한 ‘세계무역보고서 2025’에 따르면, AI는 2040년까지 글로벌 상품 및 서비스 교역액을 최대 40%까지 끌어올릴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성장 이면에 새로운 형태의 통상 장벽이 등장하고 있다.
국가 신용의 핵심 지표 된 AI
한국의 수출 실적은 AI발(發) 무역 혁명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 사례가 되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2월 수출 실적 증가는 AI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반도체가 주도했다. 품목별로는 반도체 수출은 151억1500만달러(약 21조6200억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34.1% 급증했다. 총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34.7%로, 1년 전보다 16.4%포인트 확대됐다.
전력 기기 기업도 AI 붐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국내 전력 기기 ‘빅 3’로 꼽히는 HD현대일렉트릭과 LS일렉트릭, 효성중공업은 지난해 나란히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AI 데이터센터 확산에 따른 전력 설비 수요 증가와 북미 지역의 노후 전력망 교체 수요가 맞물리며 전례없는 호황기를 맞은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1.8%에서 1.9%로 상향 조정하며, AI 경기 호조가 수출과 소비 개선으로 이어질 것으로 분석했다. 국제 신용 평가사 무디스는 한국의 국가 신용 등급을 ‘Aa2,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그 핵심 이유로 AI 경기에 힘입은 반도체 수출 증가를 꼽았다. 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감소라는 구조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AI 도입과 수출 경쟁력이 한국의 장기 경쟁력을 뒷받침할 것으로 평가했다. 투자자는 AI 무역 시장이 ‘슈퍼 사이클’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한다. 세계 AI 시장은 2026년 약 5390억달러(약771조원)에서 2033년 3조4000억달러(약 4863조원) 이상으로 성장하며, 연평균 30.6%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데이터 현지화와 안보 중심의 새로운 장벽
AI 확장은 데이터와 반도체 그리고 이를 둘러싼 규범에 따라 좌우될 것으로 전망된다. 각국은 개방과 보호 사이에서 줄타기하고 있다.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미국의 대(對)중 AI 반도체 수출 통제가 대표적이다.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와 AI 가속 칩에 대한 수출 허가제가 강화되면서 글로벌 AI 공급망은 사실상 블록화되고 있다. AI는 더 이상 민간 기술이 아니라 전략자산으로 간주된다.
규범의 파편화도 심화하고 있다. 미국은 원칙적으로 국경 간 데이터 이전을 지지하면서도, '외국 적대국으로부터 미국인 데이터보호법(PADFA)1)'을 제정해 안보 목적의 데이터 통제를 강화했다. 중국은 '정당한 공공 정책 목적' 예외를 폭넓게 인정한다. 유럽은 위험 기반 접근을 제도화한 ‘유럽연합(EU) AI법’을 도입했다. 또 ‘데이터법’을 통해 역내 데이터 이동은 자유롭게 하되, 역외 이전에는 엄격한 보호장치를 요구한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도 2025년 기준, 248건의 디지털 무역 장벽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당수 국가에선 지금도 클라우드 서비스에 대한 시장 접근 제한, AI·데이터센터 장비에 대한 인증·허가 의무, 암호화 제품 수입 지연 등이 디지털 교역 비용을 높이고 있다. 서로 다른 규범 체계는 기업에 중복 비용을 안기고 공급망 재편에 속도를 요구한다. 한국도 국경 간 데이터 이동의 예측 가능성을 키우고, 전략 기술에 대한 공급망 리스크를 관리해야 하는 이중 과제를 안고 있다.
규제 파편화를 넘어선 글로벌 규범 주도 전략
지난해 미국 컴퓨터 및 통신 산업 협회는 보고서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하는 디지털 장벽이 AI 생태계 확장을 직접적으로 저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호주와 인도 사례를 들며 이들 국가가 유럽의 '디지털시장법(DMA)2)'과 유사한 규제를 도입해 특정 서비스 업체 활동을 제약하고 있다며 이는 기업의 규제 준수 비용을 급증시키고 투자를 위축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AI의 잠재력을 온전히 실현하려면 각국의 파편화된 규제를 해소하고 상호 운용할 수 있는 글로벌 통상 질서를 확립하려는 국제적 공조가 절실하다.
강문성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AI 시대의 통상 경쟁은 ‘기술 경쟁’과 ‘규범 경쟁’의 결합”이라고 말했다. 최근 체결되는 무역협정은 디지털 규범을 통해 기업 활동의 예측 가능성을 키우고 있다. 디지털 통상의 성패가 관세 혜택보다 ‘제도적 신뢰’에 달려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에선 국가마다 서로 다른 ‘파편화된 규제’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자간 협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WTO가 추진 중인 알고리즘 투명성, 데이터 이동, 책임에 대한 통합 프레임워크는 수십억달러에 달하는 중복 규제 비용을 절감할 열쇠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AI 통상 허브’로 도약할 수 있을지, 아니면 규범 파편화의 틈바구니에 놓일지, 갈림길에 서 있다. 많은 전문가가 디지털 무역의 신뢰할 수 있는 다자간 기반이 마련될 때, 비로소 AI가 세계경제의 진정한 촉매제가 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용어설명
- 1미국인 데이터보호법(PADFA)
미국 국민의 민감 정보를 보호하기 위한 법안. 데이터 브로커의 외국 적대 세력과 거래 제한, 생체 정보와 유전정보, 정확한 위치 정보, 민감한 개인 통신 같은 민감한 개인정보 정의, 적용 예외 등을 규정
- 2디지털시장법(DMA·Digital Markets Act)
EU가 2024년 3월부터 본격 시행한 강력한 플랫폼규제법. 애플과 구글, 메타 등 거대 테크 기업의 자사 우대, 데이터 독점, 폐쇄적 운영을 금지해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목적. 위반 시 전 세계 매출 10~20%의 과징금 부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