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기준, 우리 수출이 전년 동월 대비 큰 폭으로 증가한 658억달러를 기록하며 역대 1월 최고치를 경신했다. 무역수지는 약 87억달러 흑자를 나타내며 8개월 연속 수출 증가 흐름을 이어갔다. 특히 반도체 수출은 약 206억달러 수준으로 전년 대비 102.5% 급증하며 전체 수출 확대를 견인했다. 인공지능(AI) 서버 투자 확대와 고대역폭 메모리(HBM) 등 고부가가치 제품 수요 증가가 맞물리면서 메모리 업황 회복이 본격화한 것으로 분석된다.
시장에서는 이번 수출 증가에 대해 단순한 경기 반등이 아니라 데이터센터 투자 증가와 글로벌 빅테크(대형 정보 기술 기업)의 인공지능(AI) 인프라 확장 등에 따른 구조적 변화의 신호로 보는 시각이 늘고 있다. 과거 경기 민감형 반도체 사이클과 달리 AI 서버, 클라우드 인프라, 자율주행 등 장기 수요가 결합하면서 업황 변동성이 완화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렇다고 향후 흐름을 낙관만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지정학적 리스크와 미국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정책, 글로벌 금리정책 변화 등 굵직한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AI 관련 기술과 서비스 수요 증가는 우리 경제의 성장 가속을 위해 놓칠 수 없는 기회인 동시에 반드시 넘어서야 할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첨단 기술에 밝은 젊은 통상 전문가 두 명에게 진단과 조언을 부탁했다. 디지털 무역 전문가인 한정휴 경희대 무역학과 교수와 국제 공급망 전문가인 노세연 영국 플리머스대 교수다. 영국 남서부의 항구도시 플리머스는 미국의 선조인 순례자들이 종교 박해를 피해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출항한 곳이다. 플리머스대는 해운 경제 분야의 세계적인 명문이다.
전력 설비와 반도체 등 AI 관련 부품과 설비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그런 변화가 무역을 어떻게 재편하고 있나.
한정휴 경희대 무역학과 교수(이하 한정휴) “재편이라기보다 AI 관련 부품·설비가 무역량 증가를 견인하면서 성장 동력이 AI로 전환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가치 사슬 측면에서 보면, AI 확산은 설계, 반도체 제조, 데이터·전력, 인프라, 운영 서비스로 이어지는 새로운 가치 사슬을 형성하는데, 이 가치 사슬이 (미국의) 소수 동맹국에 집중되고 있다. 설계는 미국, 반도체는 한국과 대만, 운영 서비스는 다시 미국으로 집중되는 프렌드쇼어링(friend shoring)1) 구조가 나타나는 것이다. 반면 중국은 국가 주도로 AI 기술 자립을 가속하고 있어 AI 가치 사슬은 미국 중심 체제와 중국 중심 체제로 분리되는 이원화 양상을 띤다.”
트럼프 정부의 관세 무기화 기조에 AI 기술의 미·중 쏠림까지 더해지면 무역에 불확실성이 커질 것 같다.
노세연 영국 플리머스대 국제물류학 교수(이하 노세연) “관세 불확실성에 AI 공급망 집중이 결합해 무역 질서는 정치·외교 리스크와 프리미엄에 더 크게 그리고 더 쉽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 AI의 미·중 쏠림은 단순한 국가 간 경쟁의 문제를 넘어 무역의 병목현상을 악화할 수 있다. AI 생태계의 주요 구성 요소는 반도체와 클라우드, 언어 모델, 데이터센터 등인데, 어느 하나라도 특정 국가·기업에 집중되면 문제가 커질 수 있다. 그런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무역 적자 해소와 국내 제조업 부흥을 명분으로 전 세계를 상대로 2025년 4월부터 강행해 온 핵심 정책 ‘상호 관세’가 2월 20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최종 위법 판결을 받으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AI 분야의 데이터센터·서버·반도체 투자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이뤄져야 하는데, 정치·외교 리스크가 커지면 힘들어진다. 이와 관련해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도 관세·지정학 관련 불확실성이 장기 투자, 특히 생산적인 해외직접투자(FDI)를 약화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한정휴 “AI 기술의 편향적 발전이 패권 경쟁을 심화하면서, 이제는 자유무역으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인식이 국제사회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특히 ‘AI 주권(소버린 AI·Sovereign AI)’이라는 개념 등장으로 첨단 기술 개발의 지역 블록화 흐름이 가속하면서 상호 운용성에 대한 고민 없이 경쟁이 심화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에 따라 미국·중국·유럽연합(EU)으로 대표되는 선도 그룹에서도 AI 표준을 둘러싼 표준 규범 경쟁이 문제 될 가능성 또한 커졌고, 강대국이 관세나 기술 장벽을 다시 무기화하는 악순환이 발생할 위험이 있다고 본다.” 소버린 AI는 국가나 공공기관이 외국 빅테크의 AI 서비스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인프라와 기술을 기반으로 개발·운영하는 AI를 뜻한다. 데이터의 저장·처리·활용 전 과정이 국내 통제 아래 이뤄지며, 데이터 주권과 보안 확보가 핵심 목적이다.
각국의 제도·언어·문화적 특수성을 AI에 반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공·금융 부문을 중심으로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정보기술(IT) 컨설팅 기업 가트너는 최근 전 세계 국가의 35%가 2027년까지 소버린 AI를 구축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세계 각국은 ‘AI 독립’을 외치며 독자적인 생태계 구축에 나서고 있다. 프랑스 ‘미스트랄 AI’, 아랍에미리트(UAE) ‘팰컨’ 등이 대표적인 예다.
한국 경쟁력을 어느 정도로 보는지 궁금하다.
한정휴 “미국 스탠퍼드대 인간중심AI 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AI Index 보고서’ 등 다수의 권위 있는 보고서를 보면, AI 응용 분야 등 기술 경쟁력 측면에서 한국이 선두 그룹에 속하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규모로 보면 미국과 중국에 밀리지만 인구 10만 명당 AI 특허 보유 건수는 세계 1위다.
거대 언어 모델(LLM)의 경우 누가 더 많은 데이터와 그래픽처리장치(GPU)를 확보하느냐에 따라 경쟁력이 좌우되기 때문에 자본과 데이터의 싸움이긴 하다. 하지만 한국은 피지컬 AI(Physical AI·자율주행차나 로봇 등 물리적 형태가 있는 AI) 등 응용 분야에서 치고 나갈 잠재력이 충분하다. 특히 노동인구 감소로 제조·물류·의료·자동차·조선 등 산업 전반에 걸쳐 AI 내재화를 추진해야 하는 만큼, 피지컬 AI는 한국이 가장 신경 써야 할 전환 분야라고 생각한다.”
한국 메모리 반도체와 제조업에 강점이 있으나, 초대형 모델, 클라우드, 플랫폼 생태계는 미·중 편중이 여전히 심하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부분도 있을 텐데.
노세연 “AI 분야에서 국제 경쟁력을 높은 수준으로 이어가려면 반도체만으로는 부족하다. 컴퓨팅 접근성, 파운데이션 모델과 소프트웨어, 데이터 활용·보호의 균형, 국제 표준, 규제 대응 능력 등을 두루 갖춰야 한다.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와 제조업에 강점이 있으나, 초대형 모델, 클라우드, 플랫폼 생태계는 미·중 편중이 여전히 심하다.
‘AI 통상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는 반도체, 전력 설비, 서버, 스마트팩토리 등 산업 측면에서 수출 경쟁력과 통관, 검역, 전자 문서, 무역금융 등 분야에서 무역 비용 절감, 디지털경제동반자협정(DEPA), 디지털통상협정, 세계무역기구(WTO)에서 논의 중인 전자상거래 협정 등 규범·표준 주도 등 다각도로 접근해야 한다.”
DEPA는 싱가포르, 뉴질랜드, 칠레가 디지털 통상 규범 정립과 협력 강화를 위해 체결한 세계 최초의 복수국 간 디지털 통상 협정이다. 개방형 협정 구조를 채택해 글로벌 디지털 통상 프레임워크로 발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24년 5월에 DEPA에 가입했다.
‘ AI 통상’에서 자본과 데이터의 중요성과 미·중 편중 현상을 생각하면 개발도상국과 중소기업이 경쟁에서 뒤처질 가능성이 커진 것 아닐까.
노세연 “AI 관련 자원에 대한 접근권이 혁신, 생산성, 수출 경쟁력을 좌우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됐다. 따라서 불균형을 핵심 리스크로 보는 건 타당하다. AI 관련 자원에 대한 접근 능력 차이가 국가 경제력 격차 확대로 이어질수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AI 관련 수출 증대를 위한 노력에 더해 인프라·표준·규범과 규제·윤리·보안을 정비해 중장기적으로 접근성과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제도·규제 수립이 어려운 건 AI의 독특한 특성 때문일 것 같기도 하다.
한정휴 “AI 관련 재화는 서비스화된 상품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아 상품과 서비스라는 이분법적인 기존 규범(GATT·GATS)을 깔끔하게 적용하기 어렵다. 자율주행차의 OTA(Over The Air) 방식 소프트웨어 업데이트가 현재 국제 규범 밖에 있는 좋은 사례인데 자율주행차 교역 이후 오랜 기간 보완책 필요성만 논의되고 있다. AI라는 새로운 기술에 대해 국가별로 관련 규범을 마련하고 국제 협력은 뒷전으로 밀리다 보니 전 세계적인 규제의 파편화가 지속하고 있다. 표준화된 규범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AI 기술은 무역의 효율성과 편의성을 높이는 데도 사용되고 있지 않나.
노세연 “AI는 ‘디지털 무역의 고도화’를 넘어, 무역의 생산 함수와 통상 정치의 지형까지 바꾸고 있다. 기존 디지털 무역이 ‘문서 전자화, 온라인 거래 확대’였다면, AI는 그에 더해 의사 결정 자동화, 예측 기반 최적화, 규제·준수(compliance) 비용의 구조적인 변화까지 일으킬 수 있다. 일례로 AI 기술을 수요, 항만 혼잡, 리드타임 예측, 대체 경로 추천, 재고 재배치 등에 활용하면 공급망 흐름과 재고 관리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WTO는 자체 시뮬레이션을 기반으로 AI 기술이 2040년까지 전 세계 상품·서비스 무역을 34~37% 끌어올릴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에 따라 전 세계 경제규모(GDP)가 12~13% 늘어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정휴 “AI는 생산, 예측, 의사 결정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동시에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디지털 인프라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고 있다. 무역 관리 방식을 데이터·알고리즘 중심으로 바꿀 뿐만 아니라, 무역 구성도 AI 서비스와 이를 위한 인프라 중심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이와 관련해 무역 서비스 분야에서 한국의 도약 기회가 커졌다고 본다. 전자 무역과 물류 시스템에서 오랜 경험을 축적해 온 덕분이다. 이제는 무역의 구성 전략, 관리 등 다양한 측면에 AI 기술이 스며들도록 고민해야 한다.”
용어설명
- 1프렌드쇼어링(friend shoring)
동맹‧우방국과 협력해 글로벌 공급망을 구축하는 전략. 해외로 나간 기업의 생산 기지 회귀를 의미한 리쇼어링과 함께 미국의 통상 전략으로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