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깊이 보기 특별기고 박언경 경희대 자율전공학부 객원교수 AI 안보화와 디지털 통상 질서 재편… 개방과 통제 사이 韓의 균형 전략

신(新)보호무역주의 시대를 주도하는 미국의 인공지능(AI) 정책은 국제 통상 질서의 근본적 변화를 상징한다. 순수한 통상의 시대는 사실상 저물고 있다. 자유무역 체제에서 선언적 규범에 머물던 ‘안보 예외’는 각국이 적극적으로 원용하는 핵심 정책 수단이 됐고, 국가 안보는 통상의 주요 쟁점을 흡수하는 블랙홀처럼 작동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를 상징하는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우위 이론(Theory of Comparative Advantage)’1)만으로는 오늘날 국제 통상 질서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효율성과 후생 극대화라는 경제 논리를 넘어, 전략적 기술 우위와 안보 리스크 관리가 정책 판단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환경, 인권, 민주주의 같은 보편적 가치가 예외적 제한의 근거였다면, 이제는 국가 안보의 핵심 자산인 AI 산업 보호가 보호무역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등장했다.

이러한 흐름은 미국의 AI 정책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2025년 행정명령 14179호(AI 분야 미국의 리더십 확보를 위한 장벽 제거), 14320호(미국 AI 기술 스택의 수출 촉진), 14365호(AI를 위한 국가 정책 프레임워크 확립 보장)는 일관되게 AI 리더십 유지를 국가 안보 차원의 목표로 제시한다. 데이터센터 구축과 전력망 확충, 사이버 보안 강화, 고성능 반도체 수출 통제, 국제 표준화 주도, AI 수출 전략적 활용 등이 구체적 수단으로 제시된다. AI는 국가 안보 전략의 핵심 자산으로 편입되고 있다.

AI 시대의 신통상 장벽

AI의 국가 안보 자산화(데이터 현지화, 고성능 반도체 수출 통제, 전략물자 중심 공급망 재편)는 통상 환경을 재구성하는 구조적 변수가 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정책이 국제 통상 규범과 구조적 긴장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데이터 현지화는 ‘서비스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S)’2) 제16조의 시장 접근 제한이나 제17조의 내국민 대우 위반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으며, 반도체 수출 통제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3) 제11조가 금지하는 수량 제한 조치에 저촉될 수 있다. 

특정국을 선별적으로 배제하는 경우는 GATT 제1조(최혜국대우) 위반 문제가, 외국 기업에 대한 불리한 대우는 GATT 제3조(내국민대우) 위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각국은 이러한 조치를 통상 위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GATT 제21조와 GATS 제14bis조는 ‘자국의 필수적 안보 이익을 보호하는 데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조치’를 허용한다. AI가 국가 안보의 핵심 자산으로 재분류되면서, 각국은 반도체, 연산 인프라, 데이터 통제 조치를 안보 예외 범주로 편입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디지털 통상협정은 무역자유화의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디지털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정책 공간을 제도적으로 인정한다.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과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미·일 디지털무역협정, 디지털경제동반자협정(DEPA) 등은 국경 간 정보 이전 제한과 컴퓨팅 설비(서버 등) 현지화 요구를 금지하지만, 정당한 공공 정책 달성을 위한 필요 조치는 허용한다. 결국 AI 시대 통상 갈등은 협정이 허용하는 예외 범위를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통상 규범은 공공 정책 목적과 디지털 주권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 비차별성, 필요성, 비례성이라는 법적 한계 속에서 이를 행사하도록 요구할 뿐이다.

개방과 통제 사이, 한국의 해법

우리는 첨단 반도체를 수출하는 주요 국가이자, 데이터 기반 산업에 깊이 연결된 개방경제다. 동시에 안보 동맹 구조 속에서 전략 기술 통제 영향을 직접 받는다. 이에 우리는 개방과 통제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 통상 규범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정교한 균형을 설계해야 한다.

첫째, 데이터 자유 이동과 디지털 서비스 개방이라는 기본 원칙은 유지돼야 한다. 전면적 데이터 현지화, 과도한 공공 데이터 접근 제한, 소스 코드 공개의 일반적 의무화, 포괄적 기술 차단 같은 조치는 신중해야 한다. 통제는 예외여야 하고, 그 범위는 명확하고 엄격하게 한정돼야 한다.

둘째, 협정이 부여한 정책 공간을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비차별성과 필요성·비례성 요건을 충족하는 공공 정책 목적의 규제는 디지털 통상협정이 인정하는 합법적 수단이다. 이를 위해 행정기관이 재량을 행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명확히 입법돼야 한다. 경직된 법문 구조는 변화하는 기술 환경에 대한 유연한 대응을 어렵게 하고, 결과적으로 국가가 활용할 수 있는 정책 공간을 스스로 축소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셋째, 미국이 신뢰하는 수출 통제 체계를 구축·운용해야 한다. 글로벌 AI 공급망이 사실상 미국 주도로 재편되는 상황에서 신뢰는 곧 시장 접근 조건이다. 통제는 불편한 규제가 아니라, 글로벌 가치 사슬에 남기 위한 최소한의 신뢰 장치라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넷째, 한국은 규범 수용자가 아닌, 디지털 거버넌스 설계자로 참여해야 한다. 거버넌스 주권은 국제 규범의 형성과 해석 과정에 능동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역량을 의미한다. 디지털 통상협정이 정당한 공공 정책 목적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바탕으로, 예외의 범위와 필요성·비례성 판단 기준을 구체화하는 국제 논의에 기여해야 한다. 다섯째, 통상 외교는 사후 분쟁 대응이 아니라 사전 조율의 수단이다. 

데이터 규제와 수출 통제는 도입 단계부터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을 확보하고, 사전 통보와 협의 절차를 제도화해야 한다. AI를 둘러싼 통상 분쟁은 보호무역 문제가 아니라, 통상과 안보의 경계를 재설정하는 문제로 전환되고 있다. 신보호무역주의 압력 속에서도 법적 정합성과 개방성을 동시에 유지하는 전략, 그것이 AI 시대 한국 통상 정책의 핵심 과제다.


용어설명
  • 1비교우위 이론(Theory of Comparative Advantage)

    영국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가 제시한 국제무역 이론으로, 한 국가가 모든 재화 생산에서 타국보다 절대적 우위에 있더라도 각국 기회비용이 상대적으로 낮은 재화에 특화해 무역하면 양국 모두가 이득을 얻는다는 원리다. 생산의 절대적 비용이 아닌 상대적 비용에 주목해 자유무역이 전 세계 생산량과 경제적 후생을 증대시킨다는 걸 이론적으로 입증한 사례다.

  • 2서비스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S)

    1995년 WTO 출범과 함께 발효된 국제 협정으로, 금융·통신·운송·건설 등 무형의 서비스 교역을 규율하는 최초이자, 유일한 다자간 규범이다. 유형의 상품을 다루는 GATT와 달리, 서비스 공급 방법을 네 가지(국경 간 공급, 해외 소비, 상업적 주재, 인적 체류)로 정의해 관리한다. 모든 회원국에 평등한 혜택을 주는 ‘최혜국대우’를 기본 의무로 하되, 실제 시장 개발 범위나 내국민 대우 등은 개별적으로 약속한 양허표 내에서 선별 적용하는 유연성이 특징이다.

  • 3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유형의 상품 교역에 있어 관세장벽을 낮추고, 차별적 대우를 철폐하기 위해 1947년 체결된 다자간 국제 통상협정. 1995년 WTO 출범 전까지 약 50년간 국제무역 질서를 주도했다. 현재는 WTO 체제 내 상품 무역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부속 협정으로 기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