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깊이 듣기 INTERVIEW 다니엘 카스트로 미국 정보기술혁신재단 부회장 “한국, HBM 장악력 앞세워 디지털 통상 표준 ‘룰메이커’ 돼야”
  • 윤진우 기자
  • 미국 조지타운대 외교학, 카네기멜런대 정보보안기술 석사, 현 미국 상무부 디지털경제 자문위원, 전 미 연방해양위원회 연구원

    인공지능(AI)이 산업의 판도를 바꾸면서 글로벌 통상 질서도 격변하고 있다. 과거의 효율성 중심 공급망은 이제 ‘국가 안보’와 ‘지정학적 정렬’이라는 새로운 잣대에 의해 재편되는 중이다. 특히 ‘데이터 주권’을 명분으로 내건 ‘데이터 현지화’ 조치가 AI 산업의 혈맥인 국경 간 데이터 이동(CBDF·Cross-Border Data Flow)1)을 저해하며 공급망 파편화를 가속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정보기술혁신재단(ITIF)의 다니엘 카스트로(Daniel Castro) 부회장은 최근 ‘통상’과 인터뷰에서 “데이터 현지화 조치는 결국 해당 국가의 AI 경쟁력을 저해시킨다”라며 “한국은 고대역폭 메모리(HBM) 같은 AI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최강의 리더십을 보유한 만큼 이런 전략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국 기업이 파트너국 시장에 제약 없이 진출할 수 있는 상호 호혜적 접근에 나서야 한다”라고 했다.

    카스트로 부회장은 “AI 시대의 데이터는 흐르지 않으면 가치를 잃는다”라며 “데이터 주권이라는 이름 아래 자국 내 데이터를 가두려는 시도는 겉으로는 국가 자산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혁신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행위”라고 거듭 강조했다. 고립된 AI 생태계는 글로벌 표준에서 멀어지고, 결국은 퇴보의 길을 걷게 된다는 뜻이다. 이어 “한국 통상 전략의 초점은 ‘보안 기반의 신뢰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이동’에 맞춰져야 한다”라며 “한국이 가진 세계 최고의 하드웨어 패권을 적극 활용할 때 한국은 비로소 강대국 사이에서 관전자가 아닌 AI 통상 전쟁 판도를 흔드는 주역이 될 수 있다”라고 언급했다.

    그는 “데이터 국경을 허무는 용기야말로 한국 AI 산업이 글로벌 영토를 확장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며 “한국은 이제 단순한 기술 수용자를 넘어 글로벌 디지털 통상의 표준을 세우는 ‘룰메이커’로 도약해야 한다”라고 했다. 그 핵심 전장은 디지털경제동반자협정(DEPA)2) 같은 다자간 디지털 협정이라는 게 카스트로 부회장의 설명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최근 AI 경쟁이 심화하면서 글로벌 무역 질서가 ‘자유무역’에서 ‘안보 중심의 블록화’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AI는 단순한 상업적 기술이 아니다. 군사적 전용이 가능한 ‘이중 용도(dualuse)’ 기술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이 때문에 각국 정부는 AI 공급망을 평가할 때 경제적 효율성보다 국가 안보와 공급망 회복 탄력성을 우선순위에 두기 시작했다. 이는 개방된 시장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무역과 투자 결정에서 지정학적 동맹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보안 중심 블록으로 전환을 의미한다.”

    데이터 현지화 조치가 AI 공급망에 미치는 악영향은 어떤 것이 있는가.

    “데이터는 AI 모델을 학습하고 성능을 최적화하는 데 필수적인 원료다. CBDF를 제한하는 정책은 AI 모델이 어디서 개발되고 어떤 데이터를 학습할 수 있는지를 인위적으로 통제한다. 역설적으로 이런 규제는 이를 도입한 국가에 가장 큰 타격을 준다. 해외에서 개발된 최첨단 모델이 국내 데이터와 결합하지 못해 성능이 떨어지거나, 현지 특화 모델 개발 비용이 급상승하기 때문이다. 결국 ‘데이터 장벽’은 자국 AI 산업의 고립을 초래한다.”

    AI 칩 수출 통제 등 기술 블록화가 장기적으로 어떤 리스크를 낳을까.

    “AI 발전은 칩 설계, 시스템 아키텍처 그리고 모델 개발 사이의 긴밀한 협력에 의존한다. 세 요소가 함께 진화해야 AI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한다. 만약 특정 국가나 기업이 이 생태계에서 단절돼 비호환적인 시스템으로 남게 된다면, 그 생태계에 참여하는 모든 주체는 한꺼번에 경쟁력을 잃게 된다. 이는 단순히 한 기업의 시장점유율 하락을 넘어 해당 국가의 전체 산업 생태계가 글로벌 표준에서 탈락하는 시스템적 리스크를 의미한다.”

    한국이 가진 세계 최고의 하드웨어 패권을 적극 활용할 때 한국은 비로소 강대국 사이에서 관전자가 아닌 AI 통상 전쟁 판도를
    흔드는 주역이 될 수 있다.

    피지컬 AI가 리쇼어링(reshoring·생산 기지 본국 회귀)을 촉진해 무역 불균형을 심화할 수 있다는 우려의 시각도 있는데.

    “첨단 제조 기술은 지리적 위치보다 ‘누가 더 효율적인 생태계를 구축하느냐’ 의 싸움이다. AI 기반 제조(피지컬 AI) 기술은 전 세계 어디서든 활용할 수 있는 만큼 이를 선제적으로 도입하고 경쟁력 있는 산업 생태계를 만드는 국가가 유리해질 뿐이다. 즉 지리적 이점보다 기술적 투자와 생태계 조성이 무역 균형의 향방을 결정할 것이다.”

    한국이 데이터 주권과 ‘자유 흐름’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면 어떤 통상 전략이 필요한가.

    "데이터 가치와 통제권은 데이터가 물리적으로 어느 서버에 저장돼 있느냐보다 데이터 사용에 대한 기술적·법적 통제 메커니즘이 중요하다. 한국은 강력한 보안 거버넌스 governance·지배구조)와 책임 있는 데이터 관리 체계를 글로벌 표준으로 제시하며 데이터 자유 흐름을 옹호하는 포지션을 취해야 한다."

    한국 AI 기업의 글로벌 진출 시 고려해야 할 통상 리스크는.

    “안보나 회복 탄력성을 명분으로 내세워 디지털 무역과 서비스를 제한하는 ‘디지털 주권’ 정책을 경계해야 한다. 이런 정책은 흔히 보호무역주의적 목적을 숨기고 있다. 한국 정부는 통상협정을 통해 파트너국이 자의적으로 이러한 제한 조치를 도입하지 못하도록 규범화해야 한다. 제한 조치가 장기적으로 혁신을 저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에 해줄 조언은.

    “한국은 HBM 같은 AI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최강의 리더십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전략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국 기업이 파트너국 시장에 제약 없이 진출할 수 있는 상호 호혜적 접근권을 요구해야 한다. 한국 강점을 지렛대 삼아 디지털 통상의 표준을 주도해야 한다. 특히 DEPA는 국경 간 데이터 흐름의 제약을 없애고 디지털 서비스를 원활하게 하는 공통 규칙을 세울 절호의 기회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거듭 말하지만 모든 국가가 모든 분야에서 최고일 수는 없지만, 한국처럼 특정 핵심 분야(HBM 등)에서 독보적인 강점이 있는 국가는 글로벌 통상 협력 과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미국과 중국간 갈등에서 완전한 중립은 어렵겠지만, 한국은 중견국과 연대를 통해 공정한 통상 질서를 옹호하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주요 경제국도 한국 같은 전략적 파트너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점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인도 국립법학대 법학, 영국 런던정치경제대 국제법 석사, 호주 멜버른대 법학 박사, 전 막스 플랑크 국제 통상법 연구원

      +PLUS POINT  

    “파편화된 AI·데이터 규제 통상 마찰 일으킬 수도”

    “AI 성능은 편향되지 않고 대표성을 갖춘 방대한 데이터를 확보하는 데 달려 있다. 데이터 현지화는 이러한 데이터 접근을 가로막는 명백한 장벽이다. 특히 특정 국가 데이터로만 학습된 AI가 다른 사회에 배포될 경우 편향된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크다. 국가별로 파편화된 AI 및 데이터 관련 규제는 통상 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국제적으로 합의된 AI 및 데이터 윤리 규범을 정립해 이러한 마찰을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국제 경제법, 데이터 흐름 및 거버넌스, 디지털 통상 전문가인 네하 미슈라(Neha Mishra) 제네바 국제개발대학원 국제법학과 교수는 최근 인터뷰에서 “한국은 독보적인 반도체 제조 기술력을 바탕으로 강대국이 만든 안보 블록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닌, 상호 운용 가능한 AI와 데이터 관련 글로벌 표준을 먼저 제시하는 규범의 설계자가 돼야 한다”라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AI 경쟁이 자유무역에 미치는 영향은.

    “미·중 등 디지털 강대국 간 패권 다툼으로 인해 국가 안보와 데이터 주권이 AI 거버넌스를 주도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경제적 효율성이나 혁신, 글로벌 공급망 보존은 뒷전으로 밀려난 모양새다. 하지만 AI 성공은 본질적으로 막대한 양의 데이터가 국경을 넘어 흐르고, 반도체 같은 핵심 기술이 복잡한 글로벌 공급망에 의존해야 가능하다. 현재의 안보지향적 규제와 기술적 현실 사이에는 큰 모순이 있다.”

    데이터 현지화에 대한 평가는.

    “AI 성능은 편향되지 않고 대표성을 갖춘 방대한 데이터를 확보하는 데 달려 있다. 데이터 현지화는 이러한 데이터 접근을 가로막는 명백한 장벽이다. 특히 특정 국가 데이터로만 학습된 AI가 다른 사회에 배포될 경우 편향된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크다. 이는 AI 솔루션 개발 자체를 저해하는 직접적인 타격이 된다. 국가별로 파편화된 AI 및 데이터 관련 규제는 통상 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국제적으로 합의된 AI 및 데이터 윤리 규범을 정립해 이러한 마찰을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AI 칩 같은 첨단 기술 수출을 막는 움직임도 계속되고 있는데.

    “AI 혁신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특히 칩 접근성이 낮은 개발도상국에 큰 타격을 주며 글로벌 기술 파편화를 심화한다. 정치권에서는 단기간에 반도체 공장(팹)을 지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절대 쉽지 않다. 수출 통제가 군사용 기술 전용 방지라는 본래 목적에 부합하는지, 그 경제적 비용과 편익을 냉철하게 분석해야 한다.”

    한국의 제조 역량이 AI 시대 통상 협력에 어떤 강점으로 작용할까.

    “한국의 반도체 제조 역량은 통상 협력에 가장 강력한 지렛대다. 이를 기반으로 국제적인 AI 규범 수립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DEPA 같은 협정은 정보 교환과 모범 사례 공유를 통해 국가 간 상호 운용 가능한 AI 표준을 만드는 장이 될 것이다. 강대국 간 기술 전쟁 속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한국의 제조 경쟁력은 강력한 협상 동력이 될 것이다.”

    강대국의 AI 경쟁에서 한국 전략은.

    “모든 국가에 적용되는 정답은 없다. 다만 데이터 흐름을 과도하게 막는 방식은 장기적으로 경제적 실익이 크지 않을 수 있다. 한국 같은 중견국은 강대국 간 갈등으로 인한 통상 질서 붕괴를 막는 중요한 완충 역할을 할 수 있다. 한국이 국제적인 AI 규범 형성에 계속 참여하는 것은 글로벌 공급망 파편화를 막고, 공정한 무역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