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지만, 글로벌 통상 환경은 녹록지 않다. 최근 세계무역기구(WTO)는 새해 세계무역량 증가율 전망치를 기존 1.8%에서 0.5%로 대폭 낮췄다. 단순한 경기 침체가 아니라 교역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은 이제 상품을 넘어 시스템과 표준의 영역으로 확산하고 있다. 반도체·배터리 등 전략산업 중심의 공급망 경쟁도 인공지능(AI) 인프라, 데이터센터, 전력 장비 같은 기반 산업으로 번지고 있다. 여기에 한때 글로벌 통상 질서를 지탱하던 WTO 체제의 영향력마저 급격히 약화하면서, 통상 환경의 불확실성까지 커지고 있다. 문제는 한국이 반도체를 중심으로 무역 흑자 구조를 이어가고 있지만, 급변하는 통상 질서 속에서 장기적 안정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새해 한국은 어떤 통상 전략을 수립해야 할까. ‘통상’은 허정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와 박기순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교수에게 새해 글로벌 통상 환경의 핵심 변수와 한국의 대응 과제를 물었다.
새해 한국이 가장 주목해야 할 주요 통상 이슈는.
허정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이하 허정) “새해 통상 환경에는 세 가지 구조적 리스크가 동시에 나타날 전망이다. 첫째, 미·중 통상 마찰 확산이다. 최근 반도체와 배터리 등 전략 품목 경쟁이 전력망, 데이터센터, 조선, AI 인프라 등 전략 인프라 영역으로 번지고 있다. 상품 갈등이 산업 생태계 경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한국은 대미 관세 협상으로 협력 기회를 넓히고 있지만, 동시에 대미 협력이 강화될수록 중국의 공급망, 투자, 원자재 견제가 커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계해야 한다. 둘째, 한·미 관세 협상 이행 리스크다. 3500억달러(약 517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는 관세 인하 성과를 냈지만, 단기 외환 불안정성을 초래했다. 대규모 투자로 인한 자본 유출과 원화 약세에 대비해 투자 속도와 환율 안정의 균형이 중요해질 것이다. 셋째, 중국의 수출 다변화로 인한 제삼국 경쟁이다. 중국은 미·중 갈등 이후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중동, 남미로 수출을 확대하며 품질, 서비스, 기술을 결합한 경쟁으로 진화하고 있다.”
박기순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교수(이하 박기순) “새해는 관세전쟁, 자원 무기화, 공급망 재편, 환경 규제가 동시에 작동하는 해가 될 것이다. 우선 결과적으로 유예됐지만 미국의 대중 100% 추가 관세 예고는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에 대한 보복으로, 미·중 무역 갈등이 첨단 기술과 공급망 패권 전쟁으로 재점화됐음을 보여준다. 한·미 협력이 강화될수록 2025년 중국이 한화 자회사를 일시 규제했던 것처럼 유사한 사례가 늘 가능성도 있다. 이는 통상 환경이 미국과 중국 진영으로 분절화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문제는 한국이 미·중 양측과 공급망이 얽혀 있어 충격이 수출·생산에 즉각 전달된다는 점이다. 특히 중국의 자원 무기화로 인한 원자재 공급 불안과 가격 변동성은 전기·전자,전기차, 방산, 첨단 소재 산업에 타격을 줄 수 있다. 게다가 새해 탄소국경조정제(CBAM) 본격 시행으로 ‘그린 무역 장벽’까지 새로운 부담이 되고 있으며, 철강·알루미늄·시멘트 등 탄소 다배출산업의 탄소비용 부담이 증가할 수 있다.”
WTO가 2026년 세계무역량 증가율 전망치를 1.8%에서 0.5%로 낮춰 잡았다. 그 원인을 무엇으로 보나.
허정 “세계무역 둔화의 본질은 경기 침체가 아니라 교역 구조 변화에 있다. 이제는 ‘얼마나 많이 파느냐’보다 ‘무엇을, 누구와 교환하느냐’가 핵심 변수로, 그 배경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교역 중심이 전통 제조업에서 AI 인프라, 데이터센터, 전력 장비, 고성능 반도체 등으로 이동했다. WTO의 전망치 하향도 이런 품목 전환형 변화의 결과다. 과거처럼 전 세계가 동시에 성장하는 무역은 어렵지만, 기술·전력·디지털 중심의 선택적 성장이 이어질 것이다. 둘째, 공급망 재편으로 교역의 이중 구조가 형성됐다. 동맹국 간 교역은 늘고 비동맹국과 거래는 줄고 있다. 미·중 교역이 감소하는 대신 미국·멕시코·캐나다 교역이 확대된 게 대표적이다. 셋째, 지정학 리스크로 운송비와 규제 비용이 증가하며 기업이 수출보다 현지 생산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의 북미에서 자동차, 반도체, 배터리 투자도 이 같은 흐름을 보여준다. 결국 새해 세계무역 둔화는 구조 재편의 불가피한 결과이며, 무역 성장률은 당분간 낮은 수준에 머물 것이다.”
박기순 “WTO의 2026년 전망치 하향은 글로벌 통상 환경의 구조적 변화를 알리는 신호다. 단기 변수가 아니라 세계 교역의 성장 동력이 약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앞으로의 무역 흐름은 ‘성장 둔화’와 ‘구조적 분절’로 요약된다. 첫째,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의 관세 인상은 무역량을 직접 압박하며, 조기 선적 효과가 사라지면서 수출이 둔화할 가능성이 크다. 둘째, 기술 패권 경쟁과 공급망 재편이 심화해 동맹국 중심의 교역 구조가 강화되고, 철강·자동차 등 전통 제조업은 지역별로 분절될 전망이다. 회복의 열쇠는 구조 전환에 있다. 단기적으로는 정책 불확실성 완화와 무역 안정, 장기적으로는 AI, 디지털 혁신 산업 성장이 전통 산업 둔화를 상쇄하며 새로운 성장 기반을 형성할 것이다.”
이러한 무역 둔화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에 필요한 전략은.
박기순 “세계 교역 둔화는 단순한 경기 순환이 아니라 공급망 지역화와 지정학 리스크가 맞물린 구조적 변화다. 한국은 ‘수출 주도 성장’을 양적 확대에서 질적 고도화로 전환해야 한다. 단기적으로 세가지 축이 중요하다. 첫째,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등 첨단산업의 공급망 안정화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영향을 분산하고 핵심 소재와 부품 자립도를 높여야 한다. 둘째, 전통 제조업의 친환경·스마트 전환이다. 조선, 자동차, 기계 산업은 탄소 저감 기술과 AI 융합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셋째, 수출시장 다변화다. 미국과 중국 중심에서 벗어나 아세안, 인도, 중동, 중남미 등 신흥 시장으로 확장해야 한다. 정부도 공급망, 통상, 기후 정책을 연계한 경제 안보형 통상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한국은 기술혁신과 시장 다변화를 가속해 세계 교역 둔화 국면을 수출 모델 업그레이드의 기회로 바꿔야 한다.”
허정 “무엇보다 반도체와 자동차 산업 안정화가 중요하다고 본다. 반도체는 메모리 중심에서 벗어나 AI 반도체와 패키징 등 고부가 공정의 출하를 확대해야 한다. 자동차는 전기차, 배터리, 소프트웨어, 전자 부품 중심으로 수출 포트폴리오를 재편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금융·세제 지원을 신속히 집행하고, 무역보험 확대와 원산지·환경 인증 대응, 물류비 완화 등 현장 중심 지원책을 강화해야 한다. 특히 중소·중견기업이 새로운 규제나 인증 절차에 막히지 않도록 효율적 수출 지원 체계를 가동해야 한다. 지역 다변화와 시장 포트폴리오 조정도 병행돼야 한다. 미국은 여전히 큰 시장이지만 규제와 관세 리스크가 크다. 유럽의 친환경 수요, 아세안의 인프라, 중동의 전력 및 에너지 프로젝트 등의 수요가 늘고있다. 모두 한국이 기술력과 신뢰를 바탕으로 경쟁할 수 있는 분야다. 새해 핵심 과제는 ‘얼마나 많이 수출하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어떻게 안정적으로 수출하느냐’에 달려 있다.”
새해 미·중 무역 갈등이 완화될 가능성은.
박기순 “그럴 가능성은 작다. 양국 관계가 단순한 무역 불균형을 넘어 기술, 안보, 산업 주도권을 둘러싼 구조적 경쟁으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미국은 반도체, AI, 양자 기술 등 전략 분야에서 수출 통제와 투자 제한을 강화하고 있고, 중국은 희토류와 배터리 소재 등 전략물자의 공급 통제로 맞서고 있다. 특히 두 나라의 AI 경쟁은 ‘기술 응용 대 자원통제’라는 비대칭적 공급망 패권 전쟁으로 확산하고 있다. 다만, 양국 모두 경기 둔화와 공급망 불안이 장기화하면 자국 경제에 부담이 커진다. 미국은 대선 이후 경기회복 압력, 중국은 내수 부진과 청년 실업 리스크에 직면해 있다. 결국 정치보다 경제 현실이 협상의 계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공급망 안정화, 기후 기술 협력, AI 윤리·안보 협정 등 비정치적 협력 의제가 대화의 실마리가 될 수 있으나, 그 가능성은 제한적이다. 또 하나의 변수는 유럽과 아세안의 역할이다. 이들이 균형자 혹은 중재자로서 다자 협력 플랫폼을 복원한다면, 미·중이 국제 규범 기반의 협상 구조로 복귀할 여지도 있다. 결국 미·중 갈등의 향방은 경제 현실과 글로벌 질서의 압력이 결정할 것이다. 한국은 특정 진영에 치우치기보다 공급망 다변화, 기술 동맹 강화, 경제 외교 확장으로 대응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다.”
허정 “단기적으로는 갈등을 완화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현재 미·중 통상 갈등은 개별 품목 경쟁을 넘어 인프라와 기술 표준을 둘러싼 통제 경쟁으로 진화했다. 과거에는 반도체와 배터리 등 특정 품목에 대한 관세 부과가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전력망, AI 인프라, 조선, 항만, 물류, 디지털 네트워크 등 기반 시설과 안보 분야로 확산하고 있다. 통상의 무게중심이 ‘상품’에서 ‘시스템’으로 이동한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기술·공급망 주도권을 통한 제조 기반 복원, 중국은 핵심 소재 수출 통제로 대응하며 ‘인프라 전쟁’ 단계에 들어선 상태다. 물론 협상 여지는 있다. 양국 모두 물가 상승, 제조 비용 증가, 공급망 단절의 부작용을 체감하고 있다. 완전한 타협은 어렵지만 경제적 피로가 임계점에 이르면 제한적 협력을 시도할 수 있다. 협력 가능 분야는 두가지다. 첫째, 에너지와 전력 인프라로, 갈등이 심화하면 상호 피해가 커 실용적 조정이 불가피하다. 둘째, AI와 디지털 기술 표준 협의로, 표준이 완전히 분리되면 세계시장이 양분돼 모든 국가가 피해를 보게 된다. 결국 새해 미·중 관계는 ‘갈등 완화’가 아니라 ‘갈등 관리’ 국면이 될 것이다. 전략적 경쟁을 유지하되 실익이 있는 분야에서 제한적 협상을 병행하는 현실적 접근이 이어질 전망이다.”
+ 세계 무역 성장률 전망치 내린 WTO
새해 한국의 무역수지 전망은.
허정 “새해에도 무역수지 흑자는 유지되겠지만 그 폭은 점차 줄어들 것이다. 최근 흑자 확대는 경기 회복보다 반도체 업사이클의 일시적 효과가 컸다. 2025년 8월 흑자도 메모리와 AI 반도체 수출이 대부분이었다. 반도체 가격 조정이나 글로벌 정보 기술(IT) 수요 변동이 생기면 흑자 폭은 쉽게 줄어들 수 있다.”
박기순 “2025년 경상수지 흑자는 반도체 경기회복과 국제 유가 안정세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올해는 그 흐름이 이어지기 어렵다. 미국의 대중국·대한국 관세 강화, 글로벌 경기 둔화, 중동 리스크로 인한 에너지 가격 변동성이 동시에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단기적으로는 흑자 기조가 유지되겠지만 구조적 안정성은 불확실하다. 한국의 경상수지는 여전히 주력 산업 수출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반도체, 석유화학, 자동차, 선박 등 네 가지 품목이 흑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반도체 가격 조정이나 미국의 고율 관세가 수출에 영향을 미칠 경우 흑자 폭은 빠르게 줄어들 수 있다. 다만 반도체 경기회복에 대한 낙관론은 긍정적 요인이다.”
그렇다면 이를 타개할 방법은.
박기순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첨단 제조업 중심의 수출구조 고도화다. 반도체는 시스템 반도체, AI·에지 컴퓨팅 칩, 차량용 반도체 등 고부가 제품으로 확장해야 한다. 배터리 산업도 원천 기술 확보와 핵심광물 공급 안정이 필수다. 둘째, 서비스 수출과 디지털 무역 확대다. 콘텐츠·금융·의료·소프트웨어 등은 경쟁력을 갖췄지만, 비중이 작다. 특히 AI, 클라우드, 데이터 분석, 디지털 헬스케어, K-콘텐츠 지식재산권(IP) 수출이 새로운 흑자 원천이 될 수 있다. 즉,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 지속성은 가격보다 기술·혁신 중심의 품질 경쟁력에 달려 있다.”
허정 “수출 모멘텀 확보에 달려 있다. 새 성장 동력은 기존 산업의 기술 고도화와 신산업 확장의 균형에서 나온다. 반도체는 AI 서버, 고성능 메모리, 자동차는 전동화, 소프트웨어 통합으로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다. 동시에 전력 및 데이터 인프라 산업이 부상하며 에너지저장장치(ESS)1)와 변압기, 냉각 시스템 등이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있다. 또한 방산, 조선, 원전, 바이오가 중장기 수출 기반으로 주목된다. 방산은 유럽과 중동 수요, 조선은 미국의 조선업 부활, 원전은 에너지전환 협력, 바이오는 신약과 의료 기기 수출로 성장세를 이어간다. 결국 무역수지 흑자 지속 여부는 기존 산업의 경쟁력과 신산업 성장 속도에 달려 있다. 주력 산업이 버티고 신산업이 확장돼야 흑자 기조가 유지될 것이다.”
용어설명
- 1에너지저장장치(ESS)
생산된 전기를 ‘전력 계통(Grid Energy Storage)’에 저장했다가 전기가 가장 필요한 시기에 공급해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시스템. 태양광·풍력발전 등 신재생에너지 전원과 결합해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 전기 요금이 싼 시간에 저장한 전기를 피크타임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