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깊이 듣기 Interview 아누 브래드퍼드 컬럼비아대 로스쿨 석좌교수 “전략적 자율성 큰 韓, 디지털 제국이 꼭 협력해야 하는 연결 고리 돼야”
  • 박진우 기자
  •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법학 석·박사, 현 컬럼비아대 로스쿨 유럽법연구센터 소장, 전 유럽의회 법률 고문, ‘브뤼셀 효과(The Brussels Effect)’, ‘디지털 제국(Digital Empires)’ 저자

    “한국은 반도체, 배터리 등 핵심 기술 분야의 필수 공급자이자, 기술 강국이다. 이는 많은 중견국이 갖지 못한 강력한 협상 자산이다. 한국은 전략적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아누 브래드퍼드(Anu Bradford) 미국 컬럼비아대 로스쿨 석좌교수는 최근 인터뷰에서 미·중 패권 경쟁과 유럽연합(EU) 규제 사이에서 고민하는 한국의 상황과 새롭게 떠오르는 디지털 통상에 대해 이렇게 진단했다. 브래드퍼드 교수는 유럽의 규제가 전 세계 표준으로 확산한다는 ‘브뤼셀 효과(The Brussels Effect)’1) 이론을 정립한 세계적 석학으로, 최근 저서 ‘디지털 제국(Digital Empires)’에서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세계가 △미국의 시 장 주도 모델 △중국의 국가 주도 모델 △EU의 권리 주도 모델로 나뉘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브래드퍼드 교수는 ‘한국이 새로운 디지털 무역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가장 효과적인 건 ‘전략적 규제 연계’로, 맹목적으로 한쪽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안별로 한국 이익에 가장 부합하는 규범을 선택하고, 내재화하는 능동적 전략을 써야 한다”며 “한국은 사안별로 자국의 강점을 극대화하는 규제 파트너십을 선택적으로 구축해 제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가 아닌 각 거대 제국이 반드시 협력해야 하는 핵심 연결 고리(key linchpin)로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했다. 또 파편화된 규제 환경 속 한국 기업의 생존 전략에 대해서는 “비용 효율성을 위해 글로벌 단일 표준을 따르되, 규제가 충돌하는 특정 시장에서만 제한적으로 수정하는 방식을 따라야 한다”라며 “만약 맞춤형 규제 준수 비용이 너무 크다면 과감한 시장 철수도 고려해야 할 전략”이라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미·중 갈등으로 촉발된 공급망 재편이 ‘디커플링 (decoupling·탈동조화)’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아니면 더 복잡하고 다극화된 공급망을 낳는 ‘위험 완화(de-risking)’에 가까운지.

    “경제 민족주의와 보호무역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함에 따라 덜 개방적인 무역 환경으로 나아가고 있다. 기업은 외국 의존도를 줄이고 관세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공급망을 재설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리쇼어링(reshoring·생산 기지 본국 회귀) 노력은 한계가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위험 완화가 디커플링보다 우세할 것이다. 

    반도체 산업이 좋은 예다. 반도체 칩 하나가 완성되기까지 국경을 70번이나 넘나든다. 공급망 병목점을 쥐고 있는 나라도 제각각이다. 중국은 핵심 원자재, 미국은 설계, 유럽(네덜란드)은 첨단 장비, 일본은 핵심 화학물질, 대만은 제조를 장악하고 있다. 한국 역시 메모리 반도체 분야 핵심 플레이어다. 반도체를 완전히 자급자족할 수 있는 나라는 없으며, 다양한 위험 완화 전략이 주류로 남을 것이다.”

    한국은 안보와 첨단 기술은 미국에, 경제와 무역은 중국 의존이 큰 샌드위치 상황이다. 결국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인데. 

    “외교적으로 샌드위치라는 비유는 널리 쓰이는 것이지만, 그것은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과한 표현이다. 한국은 단순히 세력 사이에 낀 수동적 국가가 아니다. 특히 반도체, 배터리, AI 애플리케이션(응용프로그램·이하 앱) 같은 핵심 기술 분야에서 한국은 필수 공급자이자, 기술 강국이다. 이는 많은 중견국이 갖추지 못한 강력한 협상 자산이다. 따라서 한국의 딜레마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이슈별로 어떻게 그리고 어느 수준까지 미·중 양국과 전략적으로 연대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다. 한국은 분명한 전략적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저서 ‘디지털 제국’에서 미국과 중국, EU의 규제 모델 경쟁을 설명했다. 생성 AI(Generative AI)의 급격한 부상이 경쟁을 어떻게 변화시키나.

    “생성 AI의 숨 가쁜 발전은 AI 경쟁과 전 세계적인 기술 패권 다툼을 가속했다. 기술 기업과 국가가 AI 지배력과 연계한 막대한 기술적·경제적·지정학적·군사적 이득을 확보하려 하면서 다양한 전선에서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AI는 미·중 기술 전쟁의 가장 중요한 전선이다. 두 나라 모두 AI 민족주의로 기울고 있고, 수출 통제 같은 제한 조치로 자국 AI 역량을 키우고, 상대방 발전은 늦추려 한다. 특히 미국은 AI 혜택을 강조하고 해악은 축소하는 ‘시장 주도 모델’에 베팅하고 있다. 각국은 AI 개발 속도를 높이기 위해 미국 모델을 모방하면서도, 안전장치를 도입해 EU의 인권 주도 모델을 따르고, 동시에 수출 통제와 투자 제한으로 복잡한 항해를 하고 있다.”

    지금 가장 주목해야 할 브뤼셀 효과는 무엇인가.

    “실행 단계에 돌입한 EU의 AI법(AI Act)2)이다. 유익한 AI 혁신은 촉진하되 규제되지 않은 AI의 해악을 제한하는 안전장치를 둔, 이를테면 세계 최초의 포괄적이고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경제 전반에 걸친 법이다. 오픈AI, 마이크로소프트(MS), 알파벳 (구글) 등 주요 AI 개발사는 이미 EU의 AI 규범에 서명, AI법 준수 의사를 밝혔다. 이들이 규제 준수 정책을 다른 국가로 확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브뤼셀 효과가 될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가 초기 AI 규칙을 얼마나 강력하게 집행할지 그리고 그 법과 집행이 EU 법과 얼마나 닮아 있을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EU는 AI법으로 포괄적 입법을, 미국은 혁신 중심 접근을, 중국은 국가 통제를 지향한다. 한국은 어떤 방식을 표준으로 삼아야 할지. 

    “나는 세 모델 중 어느 하나가 단독으로 AI 환경을 지배할 것으로 보지 않는다. 모든 정부는 AI 혜택을 활용하면서 부작용을 줄여야 한다는 복잡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 기술 자립을 추구하다 보면 중국의 국가 주도 모델을 일부 따르게 되고, 혁신을 촉진하려다 보면 미국의 시장 주도 모델을 닮게 되며, AI 리스크를 우려하면 유럽의 인권 주도 모델을 기준으로 삼게 된다. 중요한 건 AI 규제가 반드시 혁신 저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적절한 규제가 예측 가능성을 만들고 AI 안전에 대한 사용자 신뢰를 높여 시장 수용성을 확대할 수 있다. 다만 AI가 지정학적 경쟁과 군사력의 핵심인 만큼, 각국 정부는 군사적 활용을 포함한 핵심 AI 자원 접근성을 확보하는 데 깊이 관여할 것이고, 미국, 유럽 모델과 더불어 중국 모델의 유효성이 지속될 수 있다.” 

    데이터 거버넌스(governance·지배구조)에 대한 미·중·EU의 근본적인 견해 차이가 향후 디지털 무역협정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으로 보는가. 

    “유럽의 ‘데이터 보호’ 강조와 미국의 ‘보호 저항’ 사이에 명확한 정책적 분열이 최근까지 있었다. 그러나 미국 국민은 온라인 플랫폼의 데이터 활용 방식에 불편을 느끼면서 미국 내에서도 데이터 보호 강화 압력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캘리포니아주 같은 경우에는 개인정보 보호와 관련한 강력한 법률을 만들었다. 이렇게 많은 나라가 데이터의 자유로운 흐름에 제한을 두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중국식 통제를 따라가고 있는 셈이다. 최선의 방법은 양자, 지역, 다자간 무역협정에서 데이터 흐름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국경 간 데이터 이동은 보장하되, 적절한 개인정보 보호 장치를 마련하고, 민감 데이터 이전에 대한 예외 조항을 두는 방식의 합의가 필요하다.”

    지금처럼 복잡한 환경에서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고, 새로운 무역 질서에서 승자가 되기 위한 한국의 디지털 통상 전략은. 

    “한국 같은 선진 경제국은 자국 이익과 가치를 반영한 규칙을 제정할 좋은 위치에 있다. 다만 그 규칙을 다른 나라에 강제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은 과거 GDPR(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일반개인정보보호법)3) 이나 최근의 AI법 등 EU의 디지털 규제를 모방하는 것을 자주 봐왔다. 이는 정책적 공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 기업이 규제 보호 수준이 높은 EU 시장 등에 대한 접근성을 유지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의 과제는 여러 수출 시장에서 ‘서로 상충하는 규제 요구’에 직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 정부가 한국의 디지털 법이 미국 기업에 불리하다며 관세 등으로 압박할 경우 이 문제는 심각해질 수 있다. 

    트럼프 정부의 공격적인 전술을 경험한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는 이제 더 대담하게 한국이나 유럽 같은 해외시장의 주권적 규제에 반발하고 있다. 가장 효과적인 것은 ‘전략적 규제 연계’다. 맹목적으로 한쪽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안별로 한국 이익에 가장 부합하는 규범을 선택하고, 내재화하는 능동적 전략이다. 이런 전략에는 큰 틀에서 두 가지 축이 있다. 

    첫째, 디지털 및 AI 규범에 있어 인권과 민주적 가치를 공유하는 EU와 미국과 보조를 맞춰야 한다. 이는 중국의 국가 통제 모델과 한국을 차별화하는 명확한 기준이 된다. 

    둘째, 공급망 안보에 있어서는 미국의 안보 논리에 협력하며 핵심 파트너 지위를 공고히 해야 한다. 이처럼 한국은 사안별로 자국 강점을 극대화하는 규제 파트너십을 선택적으로 구축해, 샌드위치가 아닌 각 거대 제국이 반드시 협력해야 하는 핵심 연결 고리로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현시점 한국의 다국적기업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수출 시장마다 제품과 서비스를 다르게 하는 것은 비용이 매우 많이 든다. 기업은 ‘글로벌 단일 표준’을 따르되, 그 표준이 규제 위반을 초래하는 측정 시장에서만 제한적으로 수정을 가하는 방식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 만약 특정 시장에서 점유율은 낮은데, 맞춤형 수정 비용이 너무 크다면, 시장 철수도 고려해야 한다. 지속적인 시장 접근의 가치가 제한적이고, 맞춤형 규제 준수 비용이 높을 때는 철수가 오히려 매력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

    거대 AI 플랫폼 부상과 ‘디지털 제국’의 전략은 향후 반독점 및 경쟁 정책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AI 시대에서) 기업 집중화는 놀라울 정도로 심화하고 있다. AI 경쟁은 AI 모델, 훈련 데이터, 그리고 이를 구동하는 컴퓨팅 및 클라우드 서비스까지 전체 AI 스택을 장악한 소수 빅테크가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최고 인재까지 독식하며 격차를 벌린다. 전통적인 경쟁법(반독점법)은 이런 시장 지배력을 억제하는 데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조사는 너무 느리고, 막대한 벌금조차 빅테크는 ‘사업 비용’ 정도로 치부하고 있다. 

    전 세계 반독점 규제를 주도해 온 EU조차 권리 중심 모델을 구체적인 시장 성과와 경쟁 활성화로 연결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EU 등 일부 국가는 ‘디지털시장법(DMA)’4) 같은 사전 규제로 이동하고 있다. 이런 법은 거대 플랫폼의 근본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타깃으로 하기 때문에 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이는 시장 경쟁을 촉진하고, 소비자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줄 수 있을 것이다.”

    + PLUS POINT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 한국에 기회

    2030년 AI 반도체 질서는 미국이나 중국, 어느 한쪽이 독식하는 구조는 아닐 것으로 전망된다. 기술과 자본, 시장이 복잡하게 얽힌 ‘다층적 균형 체제’로 진화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한국은 이 거대한 판의 변화 속에서 단순 제조 기지를 넘어 ‘제3의 패권’을 쥘 국가로 여겨지고 있다. 

    남은영 동국대 글로벌무역학과 조교수는 향후 반도체 패권이 세 개의 축으로 재편될 것으로 봤다. △엔비디아와 빅테크가 주도하는 미국의 ‘기술 기반 패권’ △거대 내수 시장과 국가 주도 투자를 앞세운 중국의 ‘체제 기반 패권’ △이 둘 사이에서 공급망의 안정을 설계하는 한국 등 기술 중견국의 ‘조정 패권’이다. 

    미국은 AI 플랫폼과 원천 기술의 표준을 선점하고, 중국이 국가·산업 일체형 모델로 자국 내 공급망 통제력을 강화할수록, 역설적으로 양측을 연결하고 완충할 ‘중재자’의 가치는 높아진다. 남 교수는 “두 거대 축 사이에 한국은 새로운 중재적 권력으로 부상할 수 있다”라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 TSMC 등 서방 공급망의 핵심 파트너면서 중국 내 반도체 장비, 소재의 주요 공급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남 교수는 “앞으로 AI 반도체 경쟁은 ‘누가 가장 빠른 칩을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누가 기술·정책·데이터의 생태계를 잘 설계할 수 있는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시점에서 한국의 목표는 특정 진영의 하청 기지보다 AI 반도체 생태계의 윤활자이자 조율자가 돼야 한다”며 “기술 패권과 체제 패권 사이의 균형 설계자로서 글로벌 질서 속 새 중심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했다.



    용어설명
    • 1브뤼셀 효과

      EU가 만든 규제가 사실상 세계 표준이 되는 현상. EU 집행위원회와 유럽 의회가 있는 브뤼셀에서 만든 법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까다롭다고 알려진 EU 규제를 만족하면 개별 시장 규제를 만족할 수 있으므로 제품 생산·판매가 더 효율적이다.

    • 2AI법(AI Act)

      EU의 포괄적 AI 규제법. AI 기술을 위험도에 따라 ‘허용 불가능’ ‘고위험’ ‘제한적 위험’ ‘저위험’의 4단계로 분류해 차등 규제한다. 사람의 안전이나 기본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는 ‘고위험 AI’에 대해서는 엄격한 품질 관리와 투명성을 요구하며, 이를 위반할 경우 막대한 과징금을 부과하는 등 AI 거버넌스의 글로벌 이정표로 평가받는다. 핵심 조항 적용 시기를 2026년 8월에서 2027년 12월로, 16개월 연기했다.

    • 3GDPR(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일반개인정보보호법)

      2018년부터 시행된 EU의 개인정보 보호 법령으로,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정보 보호 규제다. 기업이 어디에 있든 EU 거주자의 정보를 다루면 무조건 적용되는 ‘역외 규정’ 성격을 띤다. 위반 시 전 세계 연간 매출의 4% 또는 2000만유로 중 더 높은 금액을 과징금으로 부과해, 구글·메타 등 빅테크가 개인정보 정책을 뜯어고치게 했다.

    • 4디지털시장법(DMA)

      거대 플랫폼 기업의 시장 독점을 막기 위해 EU가 제정한 강력한 ‘사전(ex-ante) 규제’ 법안으로, 2024년 3월 도입됐다. 구글, 애플 등 지배력이 막강한 기업을 ‘게이트키퍼(Gatekeeper)’로 지정해 자사 서비스 우대 금지, 타사 앱 스토어 허용, 메신저 상호 운용성 보장 등을 의무화했다. 위반 행위 발생 후 처벌하는 기존 경쟁법과 달리, 불공정 행위를 미리 차단하는 것이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