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적으로 비구속적이고 유연한 협력을 기초로 하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는 여전히 역내 경제통합을 실질적으로 이끌어온 가장 효과적인 장(場)이다. 페루는 주요 10대 교역국 중이자 전략적 경제 동반자인 한국과 다양한 부문에서 협력 분야를 모색할 것이다.” 파울 페르난도 두클로스 파로디(H.E.Paul Fernando Duclos Parodi) 주한 페루 대사는 “APEC은 정치·경제·전략 분야에서 상호 이익이 되는 조치를 마련할 수 있는 건설적인 공간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며 한국과 경제협력 확대 의지를 분명히 했다. APEC은 아시아·태평양(아·태) 지역의 경제성장과 번영을 공동 목표로 하는 협의체다.
최근 글로벌 공급망이 흔들리며 세계 최대 생산·무역 지대인 ‘아·태 지역’의 역할 조정이 중요해지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아·태 지역은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61%를 차지하는 핵심 공급망 허브다. 공급망 안정화 논의를 할 수 있는 실질적 협력체가 다시 필요해진 상황에서,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 APEC이라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 APEC 2025는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경북 경주에서 21개 회원국 정상이 참석한 가운데 ‘우리가 만들어 가는 지속 가능한 내일’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2024년 페루 수도 리마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페루 APEC 정상회의에서 회원국은 다자무역 질서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하는 이른바 ‘마추픽추 선언문’을 발표했다.
당시 선언문에는 “전례 없는 급속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는 동시에 위험을 최소화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며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공정하고 비차별적이고 투명하고 포용적이며 예측 가능한 무역·투자 환경 조성”을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회원국은 아·태 자유무역지대(FTAAP) 의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담은 ‘이시마(Ichma) 성명’1)도 내놨다. 지난해 APEC 의장국이던 페루에 이어 바통을 이어 받은 한국도 이번 행사는 의미가 남다르다. 두클로스 주한 페루 대사는 “지난해 페루는 APEC에서 20개의 성과 문서를 도출했으며 마추픽추 선언 등으로 고무적인 정상회의 결과를 이끌어냈다”며 “올해 열린 경주선언에서는 역내 경제통합과 FTAAP 장기 목표를 재확인했고 문화·창조 산업의 역할, 인구 변화와 인공지능(AI) 등에 대한 공동 대응 필요성을 확인하는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다음은 두클로스 주한 페루 대사와 일문일답.
국제적으로 지정학적 긴장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APEC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APEC은 1989년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2) 협상을 지원하고 보다 역동적이고 상호 연결된 지역 경제를 구축하기 위해 출범했다. 이후 현재 세계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역동적인 아·태 지역의 무역·투자 통합을 촉진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과 기술협력을 기반으로 회원국 간 경제성장을 이끄는 가장 효과적인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비구속적이고 유연한 APEC은 역내 주요 강대국이 대화를 이어 가고 경제·정치·전략 분야에서 상호 이익이 되는 조치를 마련할 수 있는 건설적인 자리를 만들 기회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APEC만의 고유한 기능과 강점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G20(주요 20개국)이나 IPEF(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 등 다른 협력체와 비교할 때 어떤 게 다른 것 같나.
“세계경제 현안을 조율하는 주요국 정상회의인 G20이나 IPEF는 글로벌 협력 기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더 나아가 APEC은 자발적·비구속적·합의 기반이라는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 페루 같은 국가에 매우 매력적이다. APEC의 전략적·경제적·정치적 유인 효과는 상당하다. 또 이는 세계 인구의 40%, 글로벌 GDP의 62%, 글로벌 무역의 약 절반을 차지하는 거대한 개방 시장 접근성을 제공한다. 나아가 공급망 연결, 물류, 투자, 기술협력을 강화하는 데도 기여한다. 디지털 전환, 혁신 네트워크, 중소기업 역량 강화, 정책 모범 사례 공유 등의 협력 기회도 풍부하게 제공한다.”
페루는 지난해 APEC 의장국을 맡았다. 당시 주도한 핵심 의제와 주요 성과는 무엇인가.
“2024년 11월 16일 채택된 APEC 정상회의 마추픽추 선언은 2년 만에 도출된 합의문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여성 경제, 무역, 관광, 에너지, 식량 안보, 보건, 중소기업, 광업, 금융 등 핵심 분야 장관회의의 합의를 하나로 묶어냈다. 특히 페루가 주도한 ‘청정·저탄소 수소 정책 프레임워크’ ‘식품 손실·폐기 감소 원칙’ 그리고 ‘공식 경제, 글로벌 경제’로 전환을 촉진하기 위한 ‘리마 로드맵’3)이 채택되며 생산성·포용성·회복력 강화를 목표로 한 페루의 구상이 반영됐다. 또 기후변화 대응, 에너지 안보 전환, 녹색 공급망, 식량 안보 강화, 불법 어업 근절, 부패 대응 등 부문에서도 성과를 냈다.”
지난해 선언문에는 ‘WTO를 핵심으로 하는 규범 기반 다자 무역 체제’에 대한 지지가 명시됐다. 이는 어떤 의미이며 페루는 이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APEC 2024의 주요 성과 중 하나는 페루가 제안한 이시마 성명이다. 이는 FTAAP 논의를 새롭게 조망한 것으로, 복잡한 국제 환경 속에서도 장기과제를 지속적으로 진전시키기 위한 구상이다. 구체적으로는 아·태 지역 경제통합, 무역과 투자 촉진 등을 통해 새로운 국제무역 이슈에 대처하기 위한 노력 중 하나다.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과 최근 글로벌 혼란으로부터 교훈을 바탕으로 WTO를 중심에 둔 새로운 아·태 무역 비전을 형성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동시에 다자주의 체제를 강화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APEC 2025 정상회의 이후 공급망 회복, 디지털 무역 규범, 기후·환경 의제 등 무역 환경에 어떤 변화가 뒤따를 것으로 전망하나.
“APEC은 비구속적이고 자발적 협력체다. 이에 따라 글로벌 공급망 이슈, 디지털 무역, 기후 관련 의제는 각 회원국의 의지에 따라 점진적으로 진전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APEC은 공동 원칙과 접근 방식을 마련하는 공간이다. 이는 단기적인 성과라기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시간이 흐르며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질 것으로 본다. 각 분야 담당자의 역할도 중요하다. 장기적으로는 공동 관심사에 대해 예측 가능한 규범을 만들고 시너지를 도출하는 것이 목표가 돼야 한다.”
올해 의장국인 한국은 전 의장국 페루, 차기 의장국 중국과 ‘트로이카 체제’를 구성했다. 페루는 APEC 트로이카에서 어떤 역할을 했나.
“페루는 올해 협상 과정에서 한국과 긴밀히 협력해 여러 복잡한 의제에 대한 합의를 이끌었다고 본다. 또 의장국 시기에 채택된 이니셔티브의 이행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페루는 ‘APEC for the People’처럼 시민사회 참여 확대를 위한 프로그램을 의장국인 한국과 공유하며 협력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미국(2023), 페루(2024), 한국(2025)으로 이어지는 의장국 순번은 어떤 정책적 연속성을 보여준다고 평가하는가.
“페루는 2024년 2년간 중단됐던 합의를 복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한국의 APEC 2025에서도 이어져 궁극적으로 경주선언으로 결실을 냈다고 평가하고 싶다. 경주선언은 역내 경제통합과 FTAAP 장기 목표를 재확인했고 문화·창조 산업의 역할, 인구 변화와 AI 등 새로운 도전에 대한 공동 대응 필요성을 명시했다. 이러한 성과는 1994년 보고르 목표(Bogor Goals), 푸트라자야 비전(Putrajaya Vision) 2040, 아오테아로아 행동 계획(Aotearoa Plan) 등 APEC의 오랜 비전 위에서 구축된 것이다.”
한국과 페루는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이후 경제 협력을 꾸준히 확대해 왔다. APEC 틀에서 양국 간 새로운 협력 분야는 무엇이 있을까.
“APEC은 페루가 경제 개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2011년 한·페루 FTA 체결에도 중요한 기반이 됐다. 이후 양국 교역은 약 60%이상 증가했고 한국은 페루의 10대 교역국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페루는 아보카도·망고·아스파라거스·포도·유기농바나나·수산물 등 고품질 농수산물을 한국에 공급하고 있다. 한국은 가전, 차량, 전자 제품, 배터리, 산업 장비 등 첨단 제조업 제품을 페루에 수출하고 있다. 양국 경제는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한다. APEC은 새로운 협력 분야를 계속 모색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서 앞으로도 그 역할을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될 것이다.”
최근 한국·페루 간 경제·통상 관계에서 우수 사례는 무엇인가.
“APEC 정상회의 참석과 함께 한국 대통령의 페루 공식 방문이 이루어졌고 이 기간에 양국 공동선언이 채택됐다. 이는 양국의 중장기 정책 방향을 이끄는 핵심 문서가 되고 있다. 공동선언에서는 페루가 한국 제조업의 핵심 원료인 구리·아연·몰리브덴 등 전략 광물의 신뢰할 수 있는 공급국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으며 페루 농수산업이 한국의 식량 안보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향후 한국과 페루는 어떤 방식으로 협력을 더 확대할 것으로 보는가.
“양국은 2023년 수교 60주년을 맞은 성숙한 전략적 파트너다. 2011년 FTA, 2012년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등을 축으로 협력을 확대해 왔다. 정기적인 정치협의회와 경제·과학·기술협력위원회를 통해 새로운 협력 수요를 발굴하고 관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특히 방산·안보 협력은 해군함정·장갑차 공동 생산, 군용 항공기 가치 사슬 참여 등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기후변화 대응, 기술협력 등에서도 잠재력이 크다.”
APEC의 중장기 비전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여기에서 페루는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
“APEC의 중장기 비전은 ‘푸트라자야 비전 2040’과 ‘아오테아로아 행동계획’에 담겨 있으며, 2026년 재검토될 예정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무역과 투자, 공동 관심 분야의 협력을 강조하는 이 원칙은 페루와 한국이 깊이 공감하고 또 공유하는 가치다. 한국이 2025년 제시한 것은 연결성 강화(물리·디지털·인적), 혁신, 포용적이고 지속 가능한 번영 등이 있다. 이는 APEC과 페루의 장기 목표와 잘 맞닿아 있다. 앞으로도 페루는 APEC이 개방적 대화와 신뢰 구축, 공동 대응의 장으로서 기능하도록 적극적으로 돕고 기여하고 싶다.”
용어설명
- 1이시마(Ichma) 성명
APEC 2024 의장국인 페루가 제안해 채택된 통상·경제협력 문서로, 아·태 자유무역지대(FTAAP) 논의를 재정비하고 새로운 글로벌 환경에 맞는 경제통합 방향을 제시한 전략적 성명이다. 고대 리마 지역 문명 ‘이시마’에서 이름을 따와, 페루가 역내 경제통합 의제를 주도했다는 상징성을 담았다. 이는 팬데믹 이후 공급망 충격, 기후변화 등 경제·지정학 환경이 급변하는 가운데 APEC이 추진해야 할 경제통합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 핵심이다. 성명은 먼저 중단됐던 FTAAP 논의를 다시 활성화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역내 무역·투자 자유화의 기본 방향을 유지하되 디지털 전환, 공급망 회복력, 녹색 전환 등 현대적 통상 이슈를 포괄해야 한다는 입장을 담았다.
- 2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세계무역에서 관세와 각종 장벽을 낮추고 자유무역을 확대하기 위해 1947년 체결된 다자간 무역 규범 체계다. 냉전기부터 1990년대 초까지 세계무역 질서를 이끌었던 핵심 협정으로,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기 전까지 사실상 세계무역의 ‘헌법’역할을 했다.
- 3리마 로드맵
비공식 경제의 공식 경제 전환을 촉진해 생산성과 포용성을 높이자는 APEC의 핵심 정책 로드맵이다. 2024년 APEC 의장국인 페루가 주도해 채택된 로드맵이다. 공식 경제는 합법적인 틀 안에서 이뤄지는 경제활동을 뜻하는 것으로, 이른바 ‘지하 경제’나 미신고 가사 노동 등을 통칭하는 비공식 경제의 반대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