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경주에서 폐막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2025 정상회의가 ‘경주선언’을 채택하며 막을 내렸다. 이번 APEC 정상회의는 2005년 부산에 이어 20년 만에 개최되며 역내 연결, 혁신, 번영의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됐다.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이 심화하는 가운데, APEC의 근간이던 ‘자유무역’에 대한 명시적인 지지 표현은 최종 선언문에 담기지 않은 채 다자 무역 질서의 약화를 확인하는 자리였지만, 한편으론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 무대로 적극 활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은 실제로 기간에 90억달러, 원화로 약 13조원 규모의 글로벌 기업의 투자를 유치한 것 외에도 미·중·일 등 주요국과 연쇄 정상회담을 통해 핵심경제와 안보 현안에 대한 실질적인 성과를 도출했다. 아울러 인공지능(AI)과 ‘문화창조산업’이라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의제에 편입시키는 등 통상 외교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APEC 기간에는 7개 글로벌 기업의 90억달러 한국 투자 발표가 이뤄졌다. 아마존웹서비스(AWS)의 AI 데이터센터 투자에 이어, 르노의 전기차 생산 설비 확대, 유미코아·코닝·에어리퀴드 등 소재·부품·장비 기업의 증설 계획이 발표됐다. 이는 일회성 유치가 아니라 반도체·배터리·바이오 등 핵심 산업 공급망을 한국에 구축하겠다는 뜻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세계 시총 1위 기업 엔비디아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는 APEC 기간에 열린 CEO 서밋에서 “한국은 AI 생태계 3대 핵심 역량을 모두 갖춘 국가”라고 언급해 세계 산업계 주목을 모았다. 이번 APEC에서는 양자 간 협상이 눈에 띄는 성과를 남겼다. 중국과는 희토류·핵심광물 공급망 협력 채널을 상시화하기로 했고 한국 새만금과 중국 옌타이 산업협력단지에 양국 투자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합의했다. 일본과는 핵심광물·에너지 공급망 공조를 포함한 경제 안보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베트남과는 재생에너지 분야에 진출한 한국 투자 기업이 겪는 애로와 관련해 애초 계약대로 기존 단가를 유지해 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양국 간 교역·투자 확대 방안, 원전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인도네시아와는 SNI(인도네시아 국가표준제도) 인증, 액화천연가스(LNG) 계약 이행 문제 등 구체적 애로 해결을 논의했다. ‘경주선언’에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무역’ 같은 APEC의 핵심 가치를 넣지는 못했지만, “아시아·태평양 자유무역지대(FTAAP)를 포함해 시장 주도적인 방식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경제통합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는 문구를 넣어 현실적 접근을 시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처음으로 문화창조산업이 신성장 동력으로 명문화된 점은 주목할 만하다. K-컬처를 아시아·태평양 지역 내 경제적 가치 창출 동력으로 공식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트럼프 정부의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는 더는 일시적 현상이 아닌 구조화된 대외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세계무역기구(WTO) 중심의 규범이 사실상 무력화됐다는 점을 의미하며 자국 이익을 우선하는 ‘각자도생’의 통상 환경이 도래했음을 상징한다. 한국으로서는 예측 불가능한 통상 압력에 대비하기 위해 양자 간 ‘딜(deal)’을 통한 위험 관리가 필수적인 생존 전략이 됐다. 미·중 간의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하고 반도체, AI 등 첨단 기술이 안보와 직결되면서 통상 논의도 ‘경제 안보’의 영역으로 편입됐다. 한국이 AI 이니셔티브와 원자력 추진 잠수함 건조 동의를 얻어낸 것은 기술 동맹을 통해 경제적 가치와 안보적 실익을 동시에 확보하려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한국은 이번 APEC을 통해 미·중 양측 모두에게 중요한 기술 파트너로서 위상을 활용해 협력의 공간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이번 APEC을 통해 국제 사회의 신뢰를 회복하고 경제 회복의 모멘텀을 찾았다는 평가도 받는다. 행사 기간에 경제적 성과와 외교적 역량을 보여줌으로써 대외 신인도를 제고했다는 분석이다.
한국의 통상 외교는 APEC 2025를 기점으로 다자주의 약화에 대응하는 새로운 전략을 구체화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APEC 회원국이 K-컬처를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인정한 만큼, 문화 콘텐츠와 연계된 소비재와 서비스 수출을 아시아·태평양 전역으로 확대할 기반이 마련됐다. ‘APEC AI 이니셔티브’를 통해 한국이 주도적으로 제안한 아시아·태평양 AI 센터 설립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역내 AI 정책 및 표준 논의를 선도해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작은 규모의 다자 협력을 강화해야 하는 것도 숙제로 남았다. 중국과 협력 강화가 필요한 동시에, 인도네시아·호주·칠레·아프리카 등으로 다변화 전략도 이어져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이번 회의에서 마련된 한·미, 한·중 간 대화 채널을 상시 가동하고, 한·미·일 등 핵심 파트너와의 경제 안보 협력 틀을 더욱 공고히 해서 외부 충격에 대한 방어력과 회복력을 높여야 한다고 공통적으로 말한다. 정부는 이번에 얻은 실질적인 성과를 토대로 예측 불가능성이 커진 통상 환경에서 리스크 관리와 지속 가능한 성장 동력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숙제를 떠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