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최근 수년간 약화해 온 다자 협의체 기능을 다시 환기하며 아시아·태평양(이하 아·태) 지역 경제협력의 흐름을 새롭게 조정한 계기가 되었다. 글로벌 공급망 불안, 인구 고령화, 기술 패권 경쟁 등 복합 위협이 가속되는 시대에 APEC 2025는 아·태 지역 국가가 공통의 도전에 대해 협력 필요성을 재확인하는 중요한 무대가 되었다. 특히 이번 정상회의에서는 APEC 최초 인공지능(AI) 공동 비전 채택, 아·태 AI 협력 센터 설립 합의, 포괄적 인구 협력 이니셔티브 출범, 기술·기후·공급망 분야 협력 심화 등이 이루어졌다. 개최국인 한국은 이번 회의를 통해 국제무역 질서 규범 창조자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으며 전통문화·관광·K-콘텐츠 등 국가 브랜드를 다층적으로 알리는 기회를 얻었다. 다음은 김계환 산업연구원(KIET) 선임연구위원과 일문일답.
APEC 2025 개최가 한국 경제와 통상 환경에 미칠 가장 큰 영향은 무엇이라고 보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의 번영을 뒷받침해 온 규칙 기반 다자 체제가 붕괴하는 상황에서 APEC이라는 다자 협의체를 통해 글로벌 무역 불균형, 기술 발전, 인구 고령화 등 아·태 지역이 공통으로 직면한 도전 과제와 APEC의 유용성과 장기 비전을 다시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주요 경제 현안에 대한 협력 필요성을 공유하고 아·태 지역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개최국 한국은 APEC을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소프트 파워로서 위상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국제무역 질서의 규범 창조자(rule-maker)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한국의 전통문화, 관광자원, K-콘텐츠 등이 참가국 정상 및 기업 리더에게 소개되어 소프트 파워를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APEC 정상회의 의제 중 한국이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APEC 2025의 핵심 어젠다 중 하나인 AI 혁신에서 APEC 최초로 AI 공동 비전을 도출해 글로벌 AI 협력 기반을 마련하고 한국이 AI 분야 논의를 주도할 리더십을 확보했다. 우리 정부의 비전인 ‘AI 기본 사회’를 합의 문서에 반영하며 비전을 국제사회로 확산하는 계기도 마련했다. 또한 구체적인 협력 사업으로 아·태 AI 협력 센터 설립에 합의함으로써 역내 AI 전환에 기여하고 우리 기업의 글로벌 진출 기회를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APEC 최초로 포괄적 인구 협력 이니셔티브를 출범한 것도 중요한 성과다. 고령화는 아·태 지역 다수 국가가 직면한 도전으로 사회보장, 재교육, 노동정책 등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 이번 이니셔티브는 청년 고용, 산업구조 변화 대응 역량 강화, 보건·돌봄 분야 기술 혁신, 고령 친화 산업 육성 등을 제시하며 인구구조 변화의 위기를 새로운 성장 기회로 전환하자는 데 합의했다.”
한미·한중 등 주요국 경제협력 구도에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나.
“APEC 2025를 계기로 주요국과 양자 회담이 이루어진 것은 중요하지만, 이를 극적인 협력 전환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미 오래전부터 진전되어온 협력 구조 재편 속에서 한국의 포지셔닝을 한 단계 구체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APEC을 통해 다자 체제의 유용성을 재확인했고 한미는 투자·기술·공급망 등 협력이 강화될 것이다. 특히 반도체·AI·에너지·디지털 규범 중심 협력이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중 관계는 그동안 악화했던 흐름을 일부 회복하며 실용적 협력 확대로 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본다.”
글로벌 공급망 불안 속에서 APEC 공급망 협력은 어떤 실질적 효과를 낼 수 있나.
“국가 간 상호 의존이 강화해 공급망 협력 필요성은 확대되고 있으나, 공급망이 안보 이슈가 되면서 협력이 어려워지는 딜레마가 있다. 때문에 당분간은 안보와 직결되어 국가 간 합의가 어려운 영역보다 비교적 쉽게 합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성과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각국의 재난·전쟁·물류 차질 정보를 조기 공유하는 시스템 구축, 공동 공급망 리스크 평가 보고서 발간 등 실행 가능한 협력이 가능하다고 본다.”
동북아 경제협력 구도에 어떤 변화가 나타날 것으로 보나.
“미·중 전략 경쟁의 최전선인 동북아는 경쟁과 협력이 공존하는 구조에서 경쟁이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한·미·일 사이에는 반도체, 배터리, AI, 양자기술, 방위산업 등에서 협력이 심화할 전망이다. 한중 간 전략 분야에서는 신중한 접근이 계속되지만, 기후, 보건, 농식품, 디지털 무역 등 비전략 분야에서 실용적 협력이 확대될 것이다. 또한 세 나라는 아세안·인도 등 신남방 지역과 협력을 확대해 생산 네트워크 재편을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APEC 이후 한국이 추진해야 할 최우선 통상·산업 정책은.
“통상 정책에서는 공급망-기술-시장의 3축 연계를 통한 새로운 통상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 현재 국제무역 질서는 구조적 변곡점에 있으며, 미국·유럽 등 글로벌 노스는 과거 간접적 시장 상호작용만으로는 전략산업의 안정과 기술 우위가 보장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과거 교역 중심 협력은 약화하고 산업·기술·공급망 파트너십이 국제경제협력의 중심축이 되고 있다. 한국은 수출 중심 전략에서 벗어나 현지 투자-공동 생산-기술 협력 기반의 신(新)시장 접근 전략으로 전환해야 하며 산업부·외교부·기재부 간 분절된 정책 대응을 통합하는 ‘경제 안보 사령탑’ 중심의 거버넌스 개편이 필요하다. 또한 AI·디지털·탄소 규범 등 미래 무역 질서 형성에 적극 참여하며 글로벌 규범 형성에 주도적으로 기여해야 한다. 산업정책 측면에서는 AI 등 혁신 자원의 전국 확산, 전략산업 허브 지역을 중심으로 복수의 국가대표 산업 생태계를 육성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기업 차원에서는 이번 APEC 논의를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해야 할까.
“비즈니스 모델과 무역 규범 변화라는 두 축에서 근본적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수출 중심 전략에서 벗어나 공급망·현지 생산 중심으로 전환하고 미국·아세안·호주 등 주요 시장별로 생산·조립·패키징 기반 투자를 강화해야 한다. 공급망 다변화는 필수이며 특정 국가 의존도를 줄이는 구조가 필요하다. 또한 AI·디지털·탄소 규범 등 새로운 무역 규범에 대비해 기업 내부 시스템을 정비하고 규범을 ‘수용하는 전략’에서 ‘활용해 경쟁력을 확보하는 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 중소기업·스타트업은 전자 무역, 통관 표준화, 디지털 인증 등을 통해 해외시장 진입 비용을 낮출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