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함께 풀기 대담 박재근·장현숙·황철주 전문가 3人 “소부장 생존 전략 세계 유일 제품, 수출 시장 다변화로 전환해야”
  • 박근태 기자
  • 미국의 상호 관세와 세계적인 공급망 재편 흐름에서 한국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이 새 활로를 찾고 있다. 국내 소부장 산업은 중국의 가격 경쟁력에 밀려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2019년 일본의 반도체 수출 규제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면서 이제는 생존의 길을 열었다. 미국과 중국의 지정학적 갈등, 글로벌 공급망 불확실성이 계속해서 커지면서 이들 기업은 수출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통상 전문가들은 향후 소부장 전략은 ‘생존’ 중심으로 설계하고 이 과정에서 해외시장 진출을 위한 협력 모델이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석학교수는 “경제 안전보장과 공급망 정책은 최근 우리나라의 경제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며 “이런 기조에 맞는 새로운 수출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현숙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신무역전략실장은 “지금이 일본 규제 이후에 쌓은 성과를 바탕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할 기회”라며 “자동차·반도체에 편중된 수출구조를 소부장 혁신으로 돌파하고, 기술 심화·시장 다각화·ESG(환경·사회·지배구조) 대응을 통해 K-소부장이 글로벌 핵심축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은 “소부장 기업이 재편되는 세계 공급망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세계 유일 제품을 생산하는 길밖에 없다”라며 “이제는 모방 경제에서 벗어나 혁신 경제 생태계를 제대로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동아대 전자공학과, 한양대 석사, 미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박사, 현 삼성전자 기술고문, 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전 지식경제부 차세대 메모리 개발 사업단장, 전 교육과학기술부 초고속·무캐패시터, 메모리 연구단장

    일본 반도체 소부장 수출 규제 이후 기업은 체질 개선이 많이 이뤄졌나.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석학교수(이하 박재근) “일본의 수출규제 이후 불화수소 국산화, 포토레지스트 국내 공장 유치, 소부장 공급처 다변화, 일본이 독점한 블랭크 마스크와 특수 가스 국산화가 잘 추진됐다. 반도체 제조사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여러 나라와 공급망을 구축했고 일부 제품은 아예 국산화했다. 소부장 특별법(소재· 부품·장비 산업 경쟁력 강화 및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특별 조치법)1)에 따라 지금도 글로벌 수준의 소부장 제품이 개발되고 있다.”

    장현숙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신무역전략실장(이하 장현숙)  “공급망 다변화와 핵심 기술 국산화로 대일 의존도가 30%에서 지금은 15~19% 수준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과제가 여전히 많다. 고순도 불화수소는 지금도 80% 이상 중국에 의존하고 있고, 중소기업은 연구개발(R&D) 역량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기술이 연구 단계에서 사업화까지 이어지는 비율이 20%대에 머문다. 연구와 생산을 더 긴밀히 연결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이하 황철주) “정부가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 이후 소부장 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다양한 제도와 전략을 추진 했지만, 아직 큰 변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모든 지식과 정보, 기술이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4차 산업 혁명 시대에서는 더 이상 모방을 통한 성장은 불가능하다. 오직 혁신을 통해서만 새로운 성장이 가능하다. 혁신 경제는 경쟁자가 없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목표이고, 모방 경제는 기존의 것을 더 좋고 더 싸게 만드는 것이 목표다. 더 좋고 더 싸게 만드는 방법은 후발국이나 개발도상국의 성장 방법이지, 선진국의 성장 전략이 될 수 없다. 새로운 성장은 새로운 기준 위에서만 가능하다.” 

    전 포스코경영연구소 환경경영연구센터 연구원, 전 대한상의 지속가능경영원 선임연구원

    미·중 경쟁으로 공급망과 무역 질서가 재편되고 있다. K-소부장은 어떤 위기와 기회를 맞고 있나. 

    박재근 “미국은 중국을 배제한 글로벌 공급망을 구축하려고 한다. 전략물자 통제를 통해 반도체 소부장 제품의 중국 수출을 규제하고 있다. 한국 소부장 기업의 중국 수출도 통제받고 있다. 여기에 중국이 반도체 장비를 빠르게 자립화하면서 국내 기업의 대중 수출도 줄고 있다. 한국 소부장 업체는 글로벌 최고 수준의 소부장 제품을 개발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미국의 수출 통제가 지속된다면 국내와 해외 반도체 회사에 공급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장현숙 “공급망 분할이 가장 핵심적인 변화다. 미 상무부(BIS)는 2025년 9월 2일(현지시각) 중국 내 VEU(검증된 최종 사용자) 승인 철회를 예고했다. 기존 설비의 유지·보수는 허용하되 증설·업그레이드는 제한하는 정책 기조를 명확히 한 것이다. 유럽연합(EU)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2)를 통해 ESG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기업은 중국 대체 수요 확보와 미국 배터리 공급망에서 입지를 확대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다만 일부 소재·성숙 공정 분야에서 중국 내 가동률이 70%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발생하는 전환 비용이 단기적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황철주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천연자원을 수입해서 가치를 창출하고 다시 좋은 조건으로 수출하는 모델로 성장했다. 세계 강국의 정책 변화로 자국 우선주의와 자원이 무기가 되고 시장은 양분되면서 한국 소부장 기업의 환경은 더욱더 어려워지고 있다. 어느 한쪽으로 관계를 기울이기보다 오히려 강대국이 한국을 편으로 둘 수 있도록 ‘세계 최초, 온리 원(Only One·세계 유일) 가치 창출’의 혁신 기술에 더 집중해야 한다. 경쟁자가 없는 제품을 만들고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 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글로벌 협업 시스템을 주도해야 한다.”

    최근 제조와 소부장에서 한일 협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얼마나 현실적인가. 

    박재근 “일본은 반도체 장비와 소재 분야에 글로벌 최고 수준을 보유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들 일본의 소부장 제품을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일본 제품 의존성이 높아질수록, 국내 반도체 칩 제조 업체의 공급망은 불안정해지고 제조 경쟁력을 약화하게 될 것이다. 일본 소부장 기업의 국내 생산 기지나 반도체 연구소를 확장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국내 소부장 업체가 필요한 부품 및 기술에 대한 생태계를 확보할 수 있어, 국내 소부장 업체도 이 생태계 활용을 통한 발전이 가능하다.”

    장현숙 “한국은 반도체 기술에서 미국과 0.8년 기술 격차가 있다. 일본은 0.4년인데, 두 나라 간 격차가 크지 않다는 점은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상호 보완적 협력은 충분히 현실적이다. 가령 차세대 배터리 분야에서는 일본의 전해액 첨가제 기술과 한국의 코팅·양산 기술을 결합해 고용량 전지 개발이 가능하다. 종합적으로 한국은 공정·양산·메모리·배터리 분야에서 강점이 있고, 일본은 정밀 소재·계측·장비에서 우위가 있는 만큼,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구조로 협력 잠재력이 매우 크다.”

    황철주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은 인공지능(AI)이 확산하면서 상상을 초월한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AI 산업을 선도하려면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1%의 기술이 필요하며 산·학·연·관이 같은 목표와 철학을 공유하는 협업 시스템이 필요하다. 일본은 산·학·연·관이 같은 목표를 가지고 함께 AI 시장을 준비한다. 한국은 아직 명확한 목표 설정과 협업 시스템이 부족한 편이라 협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인하대 전자공학과, 전 한국 ASM 연구원, 제9대·제10대 벤처기업협회 회장, 전 한국청년기업가정신재단 이사장

    소부장 기업의 수출 품목, 수출국 다변화가 필요하다고 한다. 

    박재근 “미국, 중국, 유럽, 대만 반도체 기업까지 수출 대상을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 한국 반도체 회사에서 품질 인증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증명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제품을 향후 5년간 50개가량 만들어 국내에서 인증받는다면 해외에서 충분히 경쟁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 수출은 어려울 것으로 전망한다.” 

    장현숙 “자동차·반도체 중심 수출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성장 품목과 새로운 거점을 함께 발굴해 수출구조의 위험을 분산해야 한다. 이차전지 소재가 가장 유망하다. 실리콘 음극재는 세계시장에서 연평균 약 30% 성장률이 예상되는 핵심 신소재다. 자기공명영상(MRI) 장치의 가드와이어 같은 바이오 의료 기기는 고부가가치 분야로 주목받는다. 베트남과 태국은 전기차 부품 허브로서 유망하다. 인도의 ‘메이크 인 인디아(Make in India)’3) 정책을 활용해 반도체 검사 장비 수출을 확대해 볼만하다.”

    황철주 “한국 산업은 모든 산업에서 중국과 치열하게 맞서고 있으며, 단순한 가격과 규모 경쟁만으로는 더 이상 성장은 어려운 시대다. 여기서 혁신과 1등, 성공은 위험을 넘고 속도와 시간의 변수를 극복해서 얻어진 결과다. 모든 것을 잘하려고 하지 말고, 남들이 생각하지 않은 1%에 모든 역량을 쏟아야 한다. 신시장 창출을 위해 기술혁신에 집중이 필요하고, R&D 투자와 산업 생태계 강화를 병행해 대학과 연구 기관, 기업 간 협업 시스템과 핵심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혁신은 부족함이 있어도 경쟁자가 없어서 만든 사람이 가격을 결정할 수 있다. 만든 사람이 가격을 결정할 수 있을 때, 경제적 여유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혁신과 협업 시스템을 통해 경쟁자가 없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한다면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국내 소부장 기업이 글로벌 공급망에서 진정한 ‘슈퍼 을’이 되려면. 

    박재근 “국내 소부장 기업이 글로벌 공급망에서 슈퍼 을이 되려면 무엇보다 최고 수준의 실력과 신뢰성을 갖춰야 한다. 슈퍼 을이 되려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제품을 글로벌 반도체 회사에 팔아야 한다. 최근 AI가 주목받고 있는데 AI 반도체와 메모리, 회로 소형화에 필요한 기술을 확보하고 국내 제조사와 협력을 통해 조기에 시장에 진출해야 슈퍼 을이 가능하다. 슈퍼 을이 5년 내 50개 제품만 내놔도 한국은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에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장현숙 “매출의 5% 이상을 R&D에 의무 투자하고, 특허 분쟁에 대응할 수 있는 전용 펀드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고부가가치화를 위해서는 현재의 사업 모델 자체를 전환해야 한다. 지금처럼 단일 부품만 공급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서, 모듈화 전략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 마진을 두 배 이상 높일 수 있다. EU에선 규제가 쏟아지고 있는데 시장 진출을 위해서는 재생 소재 사용률을 50%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필수다. EU에선 지금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와 디지털제품여권(DPP)4) 같은 규제가 쏟아지는데 앞으로 생산관리 시스템과 연동해서 제품 출하 조건에 자동으로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 현재 기술 상용화 성공률이 20%인데 초기 기술 개발부터 대량생산까지 단계별로 연결되는 금융 지원 체계를 만들 필요가 있다. 미국, 유럽은 물론이고 인도, 멕시코, 베트남 같은 새로운 시장에 동시에 진출할 필요가 있다.” 

    황철주 “모방 경제정책과 혁신 경제정책은 차별화 되어야 한다. 모방은 경쟁을 시켜 가격을 내리고, 혁신은 육성과 보호를 통해 세계 유일 제품을 만들어 최고 가치를 창출한다. 이제는 세계 유일 제품이 있어야 슈퍼 을이 되는 시대다. 혁신 경제의 생태계를 구축하는 방법밖에 없다.”



    용어설명
    • 1소부장 특별법

      일본의 반도체 수출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2019년 12월 제정된 ‘소재·부품·장비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특별 조치법’. 소부장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해 경제 안보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 2탄소국경조정제도 (CBAM)

      역내에 물품을 수출할 때 수출국의 탄소 비용을 고려해 일종의 관세를 부과하는 제도. EU가 2023년 10월 최초로 시범 도입했다.

    • 3메이크 인 인디아 (Make in India)

      해외 기업의 제조 공장을 인도에 유치해 제조업을 활성하자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의 경제개발 프로젝트.

    • 4디지털제품여권 (DPP)

      제품의 전체 수명 주기를 디지털로 연결한 것을 의미한다. 원자재 출처, 생산, 유통, 재활용 가능성 등 핵심 정보를 신뢰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기록하고 공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