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이슈 팩트 읽기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서 기회 찾는 K-소부장 두 갈래로 쪼개진 통상 환경, AI·첨단 제조 접목해 새 시장 연다
국내 소부장 기업이 새로운 시장을 찾아 나서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과 중국에서 벗어나 유럽과 대만 등에서 새로운 파트너를 찾고 반도체와 자동차를 벗어나 수출 품목 다변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이 9월 2일(현지시각) 중국에서 반도체 공장을 운영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해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1) 자격을 부여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미국 정부는 바이든 정부 시절 대(對)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 체제를 강화하면서 노광 장비 등 미국 기술을 활용한 중요 반도체 장비를 중국에 반출하려면 건별 심사를 통해 허락받도록 했다. 하지만 VEU로 지정된 기업의 경우 별도의 개별 수출 허가를 받지 않더라도 장비를 반입할 수 있도록 허용해왔다. 

당시 한미는 협의를 통해 중국에 사업장을 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VEU로 지정했다. 그 결과 두 회사는 미국 정부로부터 별도 개별 심사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반도체 장비를 사업장에 반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이번 결정에 따라 앞으로 국내 기업은 중국 내 기존 생산 설비는 유지 보수가 가능하지만, 증설이나 업그레이드는 할 수 없게 됐다. 이번 일은 최근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에서 이뤄지고 있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보여준 하나의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중국 역시 공급망 재편을 진행하고 있다. 중국은 최근 반도체 생산에서 자국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자급률을 70%까지 끌어올리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유럽도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적용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이 국내 소부장 기업에 꼭 불리하지만은 않다고 평가한다. 중국에 밀려 시장을 잃어온 한국 소부장 기업이 반사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고 분석한다. 미국 주도하에 중국을 제외한 새로운 글로벌 산업 생태계가 등장하면 한국이 그 대체 수요를 확보하는 데 유리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소부장 기업도 새로운 시장을 찾아 나서고 있다. 미국과 중국에서 벗어나 유럽과 대만 등에서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 나섰고, 반도체와 자동차를 벗어나 수출 품목 다변화도 추진하고 있다.

정부는 최근 소부장 기업의 해외 진출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9월 24~25일 경주에서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비즈니스 파트너십’ 행사가 열렸다. 10월 말 경주 APEC 정상회의 개최를 한 달여 앞두고 열린 이 행사는 K-소비재와 인프라는 물론, 국내 소부장 기업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한 자리로 마련됐다. 행사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애초 목표보다 두 배 많은 국내외 500여 개 기업이 행사에 참여했고, 행사 기간 중엔 총 35건, 3000만달러 어치 수출 계약도 성사됐다. 소부장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통한 수출 지원도 확대하고 있다. 올해 반도체 등 첨단산업 중소·중견기업을 대상으로 1300억원 규모의 투자 재원을 마련했다. 특화 단지를 통해 소부장을 중심으로 하는 수출 경쟁력이 있는 산업 생태계 구축도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2021년 충북 오창을 이차전지 소부장 특화 단지로 선정한 데 이어, 2023년에는 이차전지 분야의 국가 첨단 전략산업 특화 단지로 선정해 K-배터리 산업의 성장을 이끌 주요 소부장 거점으로 육성하고 있다. 수출 효자 산업으로 떠오른 K-방산에서도 반도체, 로봇, 드론 등 차세대 소부장 핵심 기술 자립화에 주력하고 있다.

정부는 9월 16일 AI 기반의 세계 4대 제조 강국 실현에 나선다고 발표했다. 기계 부품, 바이오헬스, 로보틱스 등 새롭게 생태계가 조성되고 있는 분야는 한국 소부장 기업에도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01년 ‘가마우지 구조’ 극복이라는 대의명분을 걸고 본격화한 한국의 소부장 산업 육성 정책은 양적·질적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가마우지 구조란 한국이 반도체 등 첨단 제품을 수출해도 핵심 소부장의 대일 의존도가 높아 한국의 수출 이익이 일본에 더 많이 돌아가는 것을, 길든 가마우지가 물고기를 잡아와도 주인 어부에게 물고기를 빼앗기는 상황에 빗대 하는 말이다. 정부는 ‘부품·소재 전문 기업 등의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 이후 2019년까지 약 5조4000억원의 연구개발(R&D) 자금을 투자해 국내 소부장 업계 생태계가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2019년 일본의 반도체 수출규제는 한국 소부장 기업이 다시 한번 체질 개선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 이 과정에서 정부 지원하에 일본 의존도를 낮추는 데 일정한 성과를 냈다.

하지만 소부장 업계는 최근 전례 없는 변화를 맞고 있다. 각국은 산업 주도권과 친환경 경쟁력 확보를 위한 첨단·저탄소 소부장 투자도 확대하고 있다. 공급망과 탄소 중립을 양대 축으로 빠르게 산업 지형이 재편되고 있다. 미·중 무역 전쟁과 공급망 분할은 가장 큰 변화다. 미국은 첨단산업지원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유럽연합(EU)은 핵심 원자재법(CRMA)으로, 중국도 기술수출 금지 목록에 희토류 영구자석 재료를 포함하며 맞대응에 나섰다. 공급망 블록화와 전략물자와 기술 무기화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대규모 대미 투자 요구로 한국 소부장 생태계는 양적·질적으로 공백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중국의 첨단 제조 도약은 한국 소부장에 더욱 심각한 위협으로 떠올랐다. 

미국은 최근 중국과 완벽히 분리된 새로운 글로벌 산업 생태계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당장 인공지능(AI) 산업에선 새로운 반도체칩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새로운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소부장 기업이 혁신의 기회로 보고 있다. 특히 제조와 결합한 AI는 파급력이 클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9월 16일 AI 기반의 세계 4대 제조 강국 실현에 나선다고 발표했다. AI 팩토리, 휴머노이드 등 AI 확대로 제조업을 혁신해 2030년까지 산업 AI 활용률 70%를 달성하고 바이오 파운드리 구축과 첨단 의료 기기 상용화로 바이오·헬스 분야 수출을 35% 이상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방산 강국으로 도약하는 기반을 닦겠다는 시간표도 내놨다. 이는 국내 소부장 기업의 수출 활로 개척과 수출 품목 다변화에서 새로운 기회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AI와 바이오헬스, 로보틱스 등 새롭게 생태계가 조성되고 있는 분야는 한국의 소부장 기업에도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용어설명
  • 1검증된 최종 사용자(VEU)

    미국 상무부가 사전 승인된 기업에 미국 기술력이 들어간 반도체 장비의 대중국 반입을 포괄적으로 허가하는 규제. 한국은 2023년 당시 조 바이든 미국 정부로부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 자격을 얻어 중국에서 운영하는 반도체 공장이 매번 건별로 심사받아야 하는 부담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