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현재, 국제 통상은 ‘경제 안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논의하기 어렵다. 많은 국가가 미래 가치가 높은 산업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기술과 인재를 전략적으로 통제하고, 희소 자원을 무기화하고 있다. 그 결과 상호 호혜의 가치는 약해지고, 대신 상대국의 경제 발전을 견제하거나 기존 공급망을 흔드는 시도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미국이 중국에 대한 반도체 부품과 핵심 장비 수출을 제한하자, 중국이 이에 대응해 희토류1) 수출을 통제한 것이 그 사례다. 우리나라 역시 2019년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규제와 2021년 차량용 요소수 부족 사태를 겪으며, 특정 소재·부품·장비(소부장)를 외부에 지나치게 의존할 때 발생하는 위험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처럼 글로벌 공급망 안정화를 추구하는 모든 국가는 장기적 관점에서 신뢰를 기반으로 한 통상 정책을 수립하고 운영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경제 안보를 중심으로 통상 질서가 강화되는 흐름 속에서, 주요 국가는 자국 내 공급망의 완결성을 확보하기 위해 공급망 재편에 적극 나서고 있다. 미국과 일본, 유럽 등은 대규모 세제 혜택과 보조금을 주요 수단으로 활용해 기업 투자를 유도한다. 기술 개발과 선행 연구 지원에도 많이 투자하지만, 실제 제조가 가능한 공장 유치에 특히 공을 들이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안정적 제조 기반 확보가 공급망 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고려 요소임을 의미한다. 반도체처럼 전략적 가치가 명확한 산업에서는 정부 개입이 더욱 두드러진다. 세금 감면과 보조금을 넘어 기업 지분 인수까지 시도하는 사례도 나타난다.
중국의 1위 파운드리 기업 SMIC는 국영 펀드가 60% 이상의 지분을 보유한 최대 주주이며, 2022년 설립된 일본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에는 일본 정부가 보조금과 출자금을 합쳐 현재까지 약 1조8000억엔을 투자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정부 역시 인텔에 지급할 보조금의 대가로 회사 지분 10%를 직접 확보했다. 나아가 미국은 엔비디아와 AMD 같은 반도체 기업이 중국에서 벌어들이는 매출 일부를 수출세(export tax)로 내도록 요구했다. 첨단 전략산업 육성에 있어 정부가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강력한 산업 정책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한 것이다.
최근 동향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대한민국 소부장 산업이 글로벌 경쟁에서 중요한 위치를 선점하려면 정부의 적극적이고 주도적 역할이 필수적이다. 다만, 우리나라는 수출 중심 제조업 국가인 만큼 자국 내 공급망 완성에만 치중해서는 안 된다. 공급망의 단위는 근본적으로 ‘글로벌’한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 국가가 역내 공급망의 완결성을 추구하더라도 현실적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우리 소부장 기업은 해외로 진출해 글로벌 공급망에 편입하려는 노력을 지속해야 국제 통상 무대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자리를 지킬 수 있다.
특히 소부장 산업 해외 진출을 지원하려면 정부 지원이 더 세밀하고 촘촘해야 한다. 후속 사업화 과정이 험난하기 때문이다. 소재·부품 공급 기업은 완제품을 생산하는 수요 기업의 높은 품질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기술을 개발했더라도 실제로 채택되지 않거나 판매처를 확보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실질적인 성과 창출을 위해 기술 개발 지원뿐 아니라 연구개발(R&D) 이후의 품질 고도화, 인증 및 실증 테스트, 양산, 판매처 확보, 해외 진출, 마케팅 등 모든 과정을 균형 있게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정부는 전국의 주요 첨단산업 특화 단지와 소부장 특화 단지를 중심으로, 입주 기업이 실증하는 데 필요한 장비와 시설을 구축하고 있다. 산학연이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는 테스트베드가 활성화되면, 기업의 신뢰성 확보와 국제 인증 취득 등 글로벌 진출 역량 강화에 큰 도움이 된다. 아울러 기업과 기관 간 공동 기술 개발, 환경 규제 대응 등 유기적 협업을 촉진할 수 있으며, 기술적 애로를 해소하는 창구 기능도 수행할 수 있다.
또한 원활한 국내외 판로 확보를 위해서는 가치 사슬로 연결된 중소기업(공급 기업)과 대기업(수요 기업) 간 긴밀한 협력이 가능하도록 상생 협력 모델을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수요 기업의 실제 생산 라인에서 기술 개발을 마친 소부장 제품에 대한 성능 평가와 검증을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식이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은 지난 5년간 약 1800억원을 투입해 634개 기업의 양산 성능 평가를 지원했다. SK하이닉스, LG디스플레이, 현대자동차 등 주요 수요 기업은 자사 실증 라인을 개방해 소부장 기업이 고객사의 기술 요구에 맞춘 실전 테스트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했고, 이를 통해 7100억원이 넘는 사업화 매출을 달성했다. 지난해부터는 해외 진출과 수출 확대에 초점을 맞춘 글로벌 유형을 별도로 신설했다.
이와 더불어 주목해야 할 지원 분야는 인공지능 (AI) 활용이다. AI는 제조업의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향상할 수 있는 수단으로 주목받는다. 신소재 발굴, 부품 설계 개선, 장비 업그레이드 등 업무에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실험 과정을 가상화해 기존에 반복적으로 겪어야 했던 시행착오를 줄이고 더 빠르고 정확하게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은 현재 가상 공학 플랫폼 사업을 통해 소부장 기업의 AI 전환을 지원하고 있으며, 앞으로 지원 규모를 더 확대할 필요가 있다.
소부장 산업은 산업 기술의 핵심이자 제조업의 심장과도 같다. 우리나라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해 경제적 가치도 매우 크다. 그러나 통상 질서 변화로 인해 이제 기술 자립과 공급망 안정화는 특정 기업 혼자만으로 달성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앞으로 통상 환경의 불확실성은 더욱 커지겠지만, 산업 정책을 장기적 시각에서 수립하고 운용한다면 대응할 방법은 있다. 정부는 실증·양산 등 후속 사업화 지원과 함께, 관세 및 규제 대응 등 기업의 해외 진출에 필요한 제도적 기반을 탄탄히 마련해야 한다. 산업계 또한 초격차 기술 확보를 넘어 적극적인 글로벌 공급망 편입을 추진해야 한다. 소부장 산업의 성공적인 해외 진출을 위해, 정부와 산업계가 공존과 연대의 정신으로 원팀이 되어 전략적으로 협력해 나가기를 기대한다.
용어설명
- 1희토류(稀土類)
자연계에 드문 금속원소를 담고 있는 흙을 지칭. 이 때문에 영어권 매체에서도 ‘rare earths’라고 표현한다. 학술적 측면에서는 원자번호 57~71번에 속하는 란탄 계열 15개 원소(원자번호 57~71)와 스칸듐, 이트륨을 합친 17개 원소를 뜻한다. 최근 들어서는 이보다 많은 30여 개가 희토류로 불리고 있다. 액정표시장치(LCD), 발광다이오드(LED), 스마트폰, 전기차 배터리 등과 미사일 제어장치, 전투기 등 군용 물자에 두루 쓰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