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말 경상북도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이하 APEC 2025)는 한국이 의장국으로 주도하는 중요한 외교 무대다. 세계 통상 질서가 급변하는 현시점에서 열리는 이번 회의는 단순 의례적 행사에 그치지 않고, 한국의 전략적 입지를 확인하는 무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중 전략 경쟁이 장기화하고, 디지털 전환, 에너지전환 같은 새로운 과제가 더해진 APEC 2025가 다룰 의제는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무겁다. APEC은 전통적으로 자유무역 확대와 경제협력을 지향했다. 그러나 최근 보호무역주의와 경제 안보 이슈가 부각하면서 회원국 간 협력은 쉽지 않아 보인다. 한국은 APEC 2025 의장국으로서 ‘조정자’이자 ‘의제 제안자’ 역할을 동시 수행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급변하는 세계 통상 질서 속에서 APEC 2025의 의의와 의장국 한국이 펼치게 될 외교·산업적 전략, 이를 통해 기대할 국익은 무엇이며, 한계는 무엇인지 이주관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APEC연구컨소시엄 사무국장과 박정수 한국APEC학회 학회장, 이종은 세종대 경제학 교수에게 물었다.

APEC 2025에서 한국이 의장국으로서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는.
이주관 KIEP APEC연구컨소시엄 사무국장(이하 이주관) “지정학적 갈등이 심해지고, 그 중심에 APEC 회원국이 얽혀 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수많은 정상을 한자리에 모아 ‘역내 평화와 번영’이라는 하나의 목소리를 공동선언문에 성공적으로 담아내는 것이다. 갈등 속에서 협력 메시지를 명확하게 보여줘야 한다.”
박정수 한국APEC학회 학회장(이하 박정수) “트럼프 관세정책과 글로벌 지정학 갈등으로 세계무역기구(WTO), 자유무역협정(FTA)이 힘을 잃은 지금 시점에 무역과 투자 자유화의 챔피언인 APEC 정상회의는 세계경제 질서 정상화를 위한 건설적인 로드맵을 제시해야한다.”
정부와 기업이 APEC 2025를 대비해 준비해야 할 핵심 과제는.
이종은 세종대 경제학 교수(이하 이종은) “중동 전쟁,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종식 후 복구와 관련된 핵심 과제로 중동·인도양·동아시아를 잇는 지역에서 항행의 자유, 북극항로 개발, 인공지능(AI)과 암호화폐 도입을 둘러싼 많은 논의가 있을 것이고, 기업 활동과 산업에도 변화가 올 것이다. 현재를 상호 연결성의 무기화, 경제이슈 안보화로 표현하곤 하는데, 결국 필수재인 식량과 에너지가 안전하게 공급되지 못할 수도 있는 인간 세계의 불완전함을 보여준다. 이 불완전함을 돌파하는 게 핵심 과제다. 이를 건조하게 표현하면 공급망 회복, 디지털 규범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주관 “다행히 APEC 회원국은 한국에 대한 기대가 크고, 한국이 준비한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마음이 열려 있다. 8월 14~15일 인천에서 열린 제3차 고위관리회의(SOM 3)가 좋은 예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고위 관리들은 다 함께 한국 프로 야구를 관람했다. APEC에서 처음 시도되는 문화 산업 고위급 대화로, ‘한국적인 것’과 ‘한국 산업의 힘’을 보여준다면, 좋은 반응을 얻게 될 것이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K-컬처 열풍이 불고 있고, 방산· 조선·반도체·원자력과 민주주의 시스템까지, APEC 2025 정상회의를 통해 한국이 잘하는 것을 적극 보여주고 세일즈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정부와 기업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한국의 매력을 보여줄 구체적 전략을 준비해야 한다.”
한국 기업이 APEC 2025를 기회로 삼을 수 있지만, 동시에 어떤 제약이나 한계에 직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박정수 “반도체, 배터리, 수소 등 한국의 기업 경쟁력이 높은 산업의 경우 AI가 주도하는 환경 변화와 인구구조 변화가 가져올 사회 변화에 대한 APEC 회원국 간 협력, 역내 경제 회복과 성장을 위한 기업 참여와 역할 분담이 APEC 2025의 주요 의제라고 할 때 중국과 경쟁, 미국의 자국우선주의가 (기업에) 제약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종은 “한국 기업은 반도체·배터리 산업에서 경쟁력이 있고, 기술 격차도 벌리고 있지만, 희토류를 포함한 원자재에 대한 수출 통제나 보조금을 받는 외국 기업과의 경쟁에서는 불리한 입장이다. 이런 업스트림 컨트롤(upstream control·상류 통제)에 대해 한국 기업은 원자재 공급망 다변화와 다운 스트림 협력(downstream cooperation·하류 협력)으로 대응하고 있다. 할 수 있고, 하고 싶은데,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유로 자제하는 건 개인 차원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국가 차원에선 거의 없다.”

APEC 2025를 통해 한국이 확보할 구체적 이익은 무엇인가.
이주관 “글로벌 통상 환경이 매우 불확실한 지금, 가장 큰 이익은 ‘규칙에 기반을 둔 국제 질서’를 다시 굳건히 세우는 일일 것이다. 도로에 교통법규가 있어야 모두가 안전하듯, 국제무역에는 공통의 규칙이 중요한데, 최근 WTO 같은 전통적 시스템이 약해지고, 특정 국가의 관세정책이 기존 약속을 무력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APEC은 매우 중요하다. 강제성은 없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회원국이 모여 국제 질서 방향을 자유롭게 고민하고 합의할 수 있다. 이번 정상회의를 통해 한국이 ‘믿을 수 있는 중재자’로의 리더십을 보인다면, 한국에 유리한 통상 환경을 조성하고, 글로벌 갈등을 완화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 부수적으로는 한국의 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여, 장기적으로 한국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신뢰와 관심으로 이어지는 매우 구체적인 국익을 얻을 수 있다.”
박정수 “한국은 가장 전향적이고 적극적인 APEC 의장국으로서, 회원국이 AI 디지털화 같은 새로운 기회를 포용하는 동시에 인구구조 변화, 기후 위기 등 공동 과제에 대응하기 위해 협력할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의장국으로서 한국이 제안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디지털 혁신 촉진과 역내 인구구조 변화 대응은 미들 파워(강대국과 소규모 국가 중간 수준의 경제력과 외교력이 있는 나라)로서 한국의 역량을 만방에 보여주는 기회가 될 것이다.”

미·중 갈등이 심화하고 있는데, APEC이 실질적 중재 공간이 될 수 있을까. 두 나라의 힘겨루기에 휘둘릴 위험이 큰 건 아닌지.
이종은 “APEC 회원국 간 국력 차이는 큰 편이고, 정치 체제의 범위도 넓다. 때문에 이번 APEC 2025 참석국과 충실히 논의하면 힘겨루기와는 다른 차원의 가치가 만들어질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번 APEC 2025 정상회의를 통해 ‘자유’라는 가치를 관통하고, 확산할 수 있는 나라로써 시대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 세계인이 한국의 문화, 역사에 열광하는 본질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주관 “APEC 정상회의는 경쟁이나 시장 개방을 요구하는 협상 공간이 아니다. 미·중 갈등의 핵심인 관세나 디지털 이슈와 관련해 지난 5월 통상장관회의와 8월 디지털·AI 장관회의에서 모두 한국 주도로 공동선언문을 이끌어낸 일이 있다. 치열한 사전 논의를 통해 서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확인하고, 동시에 협력할 부분을 찾아낸 결과였다. 202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APEC 정상 회의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참석해 당시 양국 관계를 풀 실마리를 확인했다. 2026년은 중국이 APEC 정상회의 의장국이니, 중국은 미국은 물론 APEC 내에서 우호적 분위기를 유지하길 원할 것이다. 각자의 이해관계 속에서 APEC은 갈등을 관리하고 협력의 실마리를 찾는 중요한 공간으로 기능할 것이다.”
APEC 2025에서 글로벌 공급망 협력 논의가 실제 성과로 이어질지, 혹 선언적 합의에만 그치는 건 아닌가.
박정수 “세계경제는 현재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연결의 힘은 약해지고, 세계 여러 지역에서는 파편화가 심해지고 있다. 지정학적 갈등, 기술 패권 경쟁 심화, 자원 무기화로 세계경제의 블록화 재편은 가속 중이다.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으로 부각된 공급망 위험은 트럼프 관세정책으로 자유무역에 의존해 발전해 온 아시아· 태평양 경제에 위협이 되고 있다. 디지털 경제의 무한한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국경 간 데이터 흐름과 창출되는 가치는 아직 시장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세계경제가 활력을 되찾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계속하기 위해선 APEC이 연결성의 가속화를 주도해야 하지만, 미·중 양국의 힘겨루기 연장선에서 실질적 글로벌 공급망 협력 논의는 이뤄지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종은 “APEC 2025를 전후로 중동 전쟁,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종식하자는 논의가 진전을 보이면, 공급망 협력 논의가 성과로 이어지는 것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한국이 성공적인 의제 관리와 합의를 끌어낼 경우, 향후 다른 국제 무대에서 어떤 긍정적 파급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주관 “성공적으로 APEC 2025 정상회의를 개최한다면 세계에 한국의 외교·문화·정책·산업적 역량을 확실하게 각인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복잡한 국제 현안에 대해 합의를 끌어내는 ‘의제 설정 능력’과 ‘중재 능력’을 전 세계에 보여주는 한편, AI, 인구 변화 이니셔티브를 통해 글로벌 정책 공조를 구상하는 역량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향후 G7(주요 7개국) 확대 정상회의나 G20(주요 20개국) 등 다른 중요한 국제 무대에서 한국의 발언권과 영향력을 한층 강화하는 긍정적 효과로 이어질 것이다.”
이종은 “한국은 물리적으로 강대국이 아니지만, APEC 2025는 한국이 가치를 가지고 인지적 권위를 가진, 리더십이 있는 나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렇게 신뢰가 확보되면 향후 첨예한 국제 이슈에서 한국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APEC 2025를 계기로 한국은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어떤 외교·산업 전략을 가져야 하나.
박정수 “앞으로 미국의 경쟁력이 향상되고, 수출이 자력으로 늘어나게 되면 한국을 비롯해 미국과 중국, 러시아가 참여하는 소위원회를 가동해 그동안 뒷전이었던 APEC 자유무역협정(FTA) 논의를 다시 시작하는 등 미들 파워로서 위상을 공고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APEC 2025를 계기로,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서를 공유하고 일관된 리더십을 통해 세계경제가 활력을 되찾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어 가기 위해 연결성의 가속화를 주도하는 것을 외교·산업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
이주관 “트럼프 미국 정부와 관세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건 미국의 가려운 곳을 정확하게 긁어준 덕분이다. APEC 2025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을 포함한 회원국이 고민하는 공동의 문제를 함께 해결할 솔루션을 제공해 불확실한 국제 질서를 안정시키는 데 한국이 기여해야 한다. 이번 정상회의는 한국 정부의 실용주의와 문화, 제도가 가지는 포용성을 외교적으로 확대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국제 질서 속에서 우리만 이익을 독점하려는 전략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서로 이기는 윈윈 전략을 바탕으로 상생하는 외교와 산업 전략이 한국이 나아가야 할 길이고, 불균형·불평등·불신을 해소해 국제 질서 회복에 기여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