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경상북도 경주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2025 정상회의가 열린다. APEC은 1989년 출범 이후 역내 경제 통합과 다자 협력의 중심축으로 성장했다. 한국, 미국, 중국, 일본 등 총 21개 경제체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APEC 회원국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2024년 기준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62%, 무역량은 약 48%다. 비중만 큰 게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동시에 글로벌 공급망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 APEC의 가장 큰 특징은 세계무역기구(WTO), 유럽연합(EU)과 달리 법적 구속력이 아닌 자발적 협력(voluntary cooperation)과 합의(consensus)에 기반한 협력체라는 점이다. 이런 유연성은 정치·경제체제가 다른 국가가 모여 다양한 의제를 자유롭게 논의하고, 새로운 도전에 신속히 대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에게도 APEC은 전략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한국의 무역의존도(GDP 대비 수출입 비중)는 70%가 넘는데, 2024년 기준 한국 수출액 중 약 73%가 APEC 역내로 향한다. 특히 이번 APEC은 글로벌 무역 질서가 재편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과 중국이 다자 논의의 틀을 통해 만난다는 점에서 한국의 국가적 이해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민관 교류 및 협력 플랫폼으로서 APEC
APEC의 중요한 특징은 정부 간 협의체인 동시에 기업·학계·시민사회가 참여하는 다층적 거버넌스(governance·지배구조) 구조라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APEC CEO 서밋(Summit)’이 정상회의와 병행 개최돼 회원국 정상과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가 직접 대화에 나서는 기회가 만들어진다. 이런 자리는 우리 기업에도 신흥 시장의 투자 파트너를 발굴하고, 기술협력 기회를 모색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기업·학계·시민사회가 정책 논의에 직접 참여해 목소리를 낸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경제 협력, 기술 표준 정립, 공급망 안정화 등 다양한 과제에서 민간 주체의 목소리가 제도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APEC이 단순한 외교 무대가 아닌, 산업 정책 형성과 기업 간 네트워크 구축이 동시에 이뤄지는 복합적 플랫폼이란 것이다. 당장 눈에 띄지 않더라도 큰 영향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의미다.
자유무역의 향상과 디지털 통상 규범 확립
APEC의 핵심 목표는 보고르 선언1)에서 명시된 바와 같이 역내 무역·투자 자유화를 실현하는 것이다. 실제로 APEC의 역내 평균 관세율은 1989년 17%에서 2024년에는 5% 이하로 낮아지며 큰 성과를 거뒀다. 최근에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EU·미국의 산업 보조금 확대, 공급망 블록화 같은 보호무역주의가 확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할이 다시금 주목된다. 이번 APEC 정상회의에서는 디지털 무역 규범 확립, 서비스 무역 확대, 비관세장벽의 완화가 주요 의제로 다뤄질 예정이다. 한국은 세계 3위의 전자상거래 시장과 세계적으로 위상이 높아진 K-콘텐츠 보유 국가로서 디지털 무역 규범 수립에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다. 국경 간 데이터 이전 규범이나 클라우드 서비스 시장 개방 논의가 진전되면 우리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에도 기회 요인이 될 것이다.
공급망 안정성 및 다변화를 위한 기회
APEC 2025 정상회의는 글로벌 공급망 관점에서 중요성도 크다. 미·중 패권 경쟁과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지정학적 충돌은 글로벌 공급망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세계 반도체 공급이 한국·대만·일본 등 동북아 3국에 집중돼 있고, 배터리 원료인 리튬·니켈·코발트 60% 이상이 특정 국가에 편중돼 있다. APEC은 조기 경보 시스템과 공동 비축 네트워크의 구축 등 다자적 협력 메커니즘을 신속하게 끌어낼 수 있는 최적의 장이다. 한국은 이미 반도체·배터리·조선 등에서 역내의 핵심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강점을 바탕으로 신뢰할 수 있는 공급망 파트너십(Trusted Supply Chains) 논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다.
미래 기술혁신 및 협력의 제도적 기반
APEC은 기술협력의 플랫폼이기도 하다. 회원국 간 기술력과 시장 규모는 상호 보완적이다. 미국은 인공지능(AI) 알고리즘과 그래픽처리장치(GPU) 생태계, 한국과 대만은 반도체, 일본은 첨단 소재·장비, 동남아는 인적자원과 광물자원에서 경쟁력이 있다. APEC이 이런 보완성을 체계화한다면 공동 연구개발을 통해 혁신의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21세기 경제 패권을 좌우하는 핵심 기술이자 공동 협력 효과가 큰 AI, 첨단 반도체 기술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은 2023년 ‘글로벌 AI 지수’에서 세계 6위를 기록하며 AI 3대 강국 진입을 목표로 삼았다. 세계 반도체 파운드리 시장에서 한국은 2024년 기준 18%를 점유하고 있으며,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는 압도적인 점유율과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의 기술 스타트업은 헬스케어, 금융, 자율주행 등에서도 빠른 성장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분야는 인구 고령화 등 각국이 처한 공통적 문제에 대처하고 상호 연계와 협력을 통해 높은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APEC 2025 정상회의에서 한국은 ‘AI·반도체 공동 연구 펀드’ 조성, ‘청년 과학기술인 교류 프로그램’ ‘데이터 공유 원칙’ 수립 제안을 통해 협력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 나갈 필요가 있다.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필요한 노력
이렇게 의미가 다양한 APEC 정상회의가 한국에서 열리는 건 20년 만이다. 정부는 많은 준비를 해왔지만, 이번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역점을 둬야 할 부분을 꼽으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민관 협력 플랫폼 제도화에 노력할 필요가 있다.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 스타트업이 함께 APEC 논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APEC 기업 지원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가령 코트라(KOTRA)와 연계한 ‘APEC 스타트업 피치 데이’ 같은 구체적 행사 추진도 도움 될 것이다. 두 번째, 공급망 신뢰 구축의 리더십을 확보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한국은 희토류를 포함한 핵심 광물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APEC 차원의 ‘공동 광물 비축 기구’ 설립, ‘재활용 소재 공동 연구’를 제안한다면, 공급망 허브 국가로서 위상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기술 인재 교류 확대에 힘쓸 필요가 있다. 회원국 간 청년 과학자 교류, 공동 석·박사 프로그램, 인턴십 네트워크 등을 마련하면 장기적 기술협력의 토대가 될 것이다. 한국은 이미 한·아세안 AI 청년 아카데미2) 운영 경험이 있다. APEC 차원의 확대도 검토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국내 정책과 연계 강화가 필요하다. APEC 정상회의에서 합의된 내용이 산업 정책과 무역 전략에 반영되는 구조가 필요하다. 한국판 공급망 전략, AI 국가 전략과 APEC 정상회의 의제의 교차점을 찾고, 이를 바탕으로 후속 실행 로드맵을 만들 필요가 있다.
용어설명
- 1보고르 선언 (Bogor Declaration)
1994년 인도네시아 보고르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선언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무역 및 투자 자유화 관련 내용이 담겼다. 보고르 선언은 지역 경제 통합을 달성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만큼 APEC의 중요한 목표이자 지향점으로 평가받는다.
- 2한·아세안 AI 청년 아카데미
한국과 아세안의 젊은 인재가 AI 분야에서 교류하고 협력하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다. 2023년 9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한·아세안 AI 청년 페스타’의 일환으로 시작해 △디지털 인재 양성, △일자리 창출 및 연계, △생태계 활성화, △디지털 격차 해소를 목표로 한다. 한·아세안 AI 청년 아카데미는 아세안 국가와 협력을 통해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으며, 향후 AI 및 디지털 분야 인재 양성과 혁신적인 서비스 개발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