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깊이 보기 특별기고 고보민 인천대 무역학부 교수 AI 시대 디지털 통상 경쟁, 인력·제도 정비해 맞서야

2010년대는 디지털 기술 발전과 함께 무역의 패러다임이 전환한 시기로 여겨진다. 클라우드 컴퓨팅, 빅데이터, 모바일 결제 등 신기술이 상용화됐고, 국가 간 데이터 이전, 전자상거래를 포함하는 새 통상 규범 필요성이 대두됐다. 일본과 영국, 호주 등이 2018년 서명한 포괄적·점진적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이 대표적이다. CPTPP는 전자상거래 챕터(chapter)를 통해 데이터의 자유로운 이전, 서버 현지화 요구 금지, 소프트웨어 소스 코드 공개 요구 금지 등 디지털 통상 규범을 의무 조항으로 도입했다. 

2018년 서명하고, 2020년 발효한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도 북미 지역의 디지털 교역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는 싱가포르와 호주, 뉴질랜드 등이 주도한 양자·지역 차원의 디지털통상협정(DTA)이 체결되기 시작했고, 이런 흐름은 2020년 싱가포르·뉴질랜드·칠레의 디지털경제동반자협정(DEPA)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2010년대에는 양자·지역 차원의 디지털 통상협정이 잇달아 서명·발효돼 글로벌 디지털 경제 규범의 초석이 마련됐다. 

미국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에서 데이터 자유 이동, 설비 현지화 금지, 소스 코드 공개 금지 등을 명문화해 개방형 디지털 규범을 주도했다. 반면 유럽연합(EU)은 일반개인정보보호법(GDPR)을 기반으로 개인정보 보호를 중심에 두고, 디지털 시장법(DMA), 디지털 서비스법(DSA) 등으로 자체 규범을 정립했다. 중국은 사이버 안보와 인터넷 주권을 앞세워 데이터 국외 이전을 강력히 제한했고, 디지털 산업에 대한 국가 주도의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설계했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정책은 각국이 디지털 통상 규범을 자국 이익에 맞게 정의하려는 움직임으로, 이후 복수국 간 DTA와 글로벌 규범 경쟁의 기반이 됐다. 2020년대에 들어서는 DTA가 양자·복수국 간 틀을 통해 빠르게 확산했다. 대표적인 예가 DEPA다. 2021년 싱가포르, 뉴질랜드, 칠레가 시작한 DEPA는 데이터 이동과 전자 결제, 디지털 신원, 인공지능(AI) 윤리 등 폭넓은 영역을 포함했다. 

한국은 2024년 5월 3일 DEPA에 공식 가입해 해당 협정의 첫 추가 회원국이 됐고, 이후 중국·캐나다·코스타리카·페루 등이 추가 가입 협상을 진행 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UAE)와 엘살바도르도 가입 의사를 표명하는 등 DEPA는 아시아·북미·중남미·중동 등을 엮는 디지털 통상 네트워크로 확산 중이다. 최근 코스타리카 가입 협상의 실질적 마무리로, DEPA는 글로벌 디지털 협력 프레임워크로서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지정학적 규범 경쟁으로 떠오른 디지털 통상

디지털 통상 규범은 글로벌 경제 질서 속에서 점차 지정학적 경쟁의 장이 되고 있다. 미국은 개방성과 혁신 생태계를 중시해 소스 코드 공개 금지와 국경 간 데이터 이동 자유를 강조한다. 반면 EU는 GDPR과 AI 법안으로 소비자 권리와 디지털 주권을 앞세운다. 중국은 국가 안보를 이유로 데이터 현지화를 고수하지만, 최근 일부 FTA에서 데이터 이전을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각국(지역) 간 이 같은 규범 편차는 다자 협상의 복잡성을 가중시키고 있다. 국가 간 관련 제도의 상호 운용성 확보가 새로운 과제로 떠오른 셈이다. 

세계무역기구(WTO)는 최근 보고서에서 AI 기술이 생산성 향상과 무역 촉진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디지털 격차와 새로운 비관세장벽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국경 간 데이터 이동 제약은 AI 혁신의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AI 기술은 언어 장벽 해소, 물류 자동화, 소비자 행동 예측 등에서 무역 효율성을 비약적으로 높일 것으로 여겨지나, 알고리즘 훈련용 데이터의 지식재산권(IP) 문제, 개인정보 침해 가능성, 플랫폼 독점 등 부작용도 있다. 이에 따라 각국은 디지털 통상 규범에서 AI 윤리와 기술 신뢰성을 담보하는 조항을 적극 수용하고 있다. EU가 2024년 8월 세계 최초로 채택한 ‘AI법(AI Act)’은 고위험 AI에 대한 사전 심사와 투명성 의무를 명문화했다. 특히 AI 시스템을 위험 수준에 따라 ‘금지’ ‘고위험’ ‘제한적 위험’ ‘최소 위험’ 등으로 분류하고, 고위험 AI에는 엄격한 위험관리, 데이터 품질, 투명성, 인간의 감독, 견고성 등 구체적 의무를 부과했다. 또 사회적 신뢰와 책임성을 높이기 위해 고위험 AI 시스템의 정보를 EU가 구축하는 공공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하도록 해 시장과 시민 모두가 해당 시스템의 특성과 위험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DTA, 기술협력 촉매로 작용

DTA는 단순한 무역자유화 수단을 넘어, 국제 기술 협력의 촉매이자 제도화된 플랫폼으로 기능한다. 특히 DEPA, 한·싱가포르 디지털동반협정(KSDPA) 같은 양자·복수국 간 협정은 AI, 핀테크(fintech· 금융과 기술의 합성어), 디지털 신원, 사이버 보안등 신기술 분야에서 공동 정책 실험과 표준 정립을 가능하게 한다. 또 △국경 간 데이터 이동 자유화 △전자 결제, 전자 문서 상호 인정 △공통된 개인 정보 보호 △사이버 보안 기준 등으로 기술협력의 신뢰를 강화한다. DTA는 국가 간 디지털 통상 정책을 조율하는 대안으로도 주목받는다. 각국 간 디지털 규범 차이로 인한 통상 마찰을 완화하고, 산업계와 연구 기관이 공동 연구개발(R&D) 프로젝트를 추진할 제도적 틀 로 작동하는 것이다. 세계무역기구(WTO)는 AI 기술이 생산성 향상과 무역 비용 절감에 기여하는 반면, 디지털 격차와 비관세장벽을 심화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러나 국가 간 기술협력 필요성은 인정한다. 궁극적으로 DTA는 각국의 정부·산업·학계를 바탕으로 디지털 분야 기술 표준화와 신뢰 기반 확산을 촉진하며, 디지털 시대의 포용적 성장을 위한 제도적 인프라로 진화하고 있다.

韓, 디지털 통상 선도하려면 

한국 정부는 현재 DEPA 가입, 한·EU DTA 추진, WTO 전자상거래 공동 성명 이니셔티브(JSI) 참여 등으로 다층적 디지털 규범 협력에 나서고 있다. 이와 함께 AI 산업 발전을 위해 데이터 개방과 컴퓨팅 인프라 확충, AI 인재 양성을 중심으로 한 ‘AI 정책 로드맵’도 제시했다. 기술 주권을 확보하면서도 글로벌 규범과 정합성을 유지하려는 전략적 선택이다. 그러나 디지털 통상은 단순한 기술 무역 지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국가 산업 정책, 산업 윤리, 경제 안보, 시장 질서가 교차하는 복잡하고, 입체적인 영역이다. 따라서 한국은 규범 선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세 가지를 병행해야 한다. △첫째, 민관 협력을 통한 디지털 규범 실험과 정책 조율 △둘째, 디지털 규범 전문 인력 양성 및 법·제도 정비 △셋째, 국내 산업계의 규범 적응력 제고를 위한 지원 시스템 구축이다. 이 같은 전략은 한국이 글로벌 디지털 경제 질서 재편 과정에서 실효성 있는 리더십을 확보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구축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