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듣기

2025년 을사년(乙巳年) 새해 한국과 세계경제 흐름을 좌우할 변수가 될 주요 지정학 리스크를 점검하기 위해 스티븐 블록맨스(Steven Blockmans)유럽정책연구소(CEPS) 외교정책 선임연구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CEPS는 1983년 설립된 유럽을 대표하는 싱크탱크 중 하나다. 유럽연합(EU)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에 있으며, 역내 경제·금융 관련 개발 전략과 관련 정책 연구를 맡아 진행한다. 블록맨스는 러시아와 구소련 국가 관련 외교·안보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다.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 있는 ICDS의 선임연구원을 겸하고 있다. ICDS는 구소련 국가인 에스토니아 유일의 외교·안보·방위 싱크탱크다. 다음은 일문일답.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향후 전망은.
“러시아가 무력으로 병합한 돈바스와 크림반도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내고 우크라이나의 승리로 마무리 짓는 게 최선의 시나리오일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이 갑자기 붕괴하지 않는 한 실현 가능성은 작다. 우크라이나의 민주주의 정권이 무너지고 러시아에 합병되는 게 최악의 시나리오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한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이렇게 될 경우 이미지 타격과 위상 추락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막으려 할 것이다.”
협상을 통한 종전이 유력할 수밖에 없겠다.
“그렇긴 하지만, ‘3차 민스크 협정’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러시아는 과거 소련 시절의 법률전(Lawfare·상대를 위협하거나 방해하기 위해 법적 절차를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답습하고 있다. 러시아는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를 위반한 선례도 있다. 또 다른 민스크 협정이 일시적인 평화를 가져올 수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러시아는 반드시 재무장하고 재결집해 우크라이나를 재침공할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영토를 잃어버린 상태로 평화협정을 체결한다면, 이후에는 반드시 EU회원국이 파병한 평화유지군이 우크라이나에 주둔하도록 해야 한다.”
휴전협정이 머지않다고 볼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는 춥고 어두운 겨울을 앞두고 있다. 러시아가 발전 시설을 많이 파괴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금까지 4만3000명이 넘는 우크라이나 군인이 전사했다고, 이례적으로 털어놓았다. 젤렌스키의 인기도 떨어지고 있고, 전쟁이 길어지면 더 많은 영토를 잃게 될 가능성도 있다.”

러시아의 상황도 좋다고 볼 수는 없지 않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해 소비재 물가가 치솟은 상황에서 루블화도 급락했다. 서방이 추가적인 경제 제재를 생각하기 좋은 상황이다. 러시아와 이란의 지원에 힘입어 철권통치를 해 온 시리아 알아사드 정권 붕괴로 러시아의 국제적인 위상도 약해졌다. 그런데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인적·물적 자원을 더 투입할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본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쪽 모두 지쳐가고 있는 건 분명하지만 양쪽 모두가 평화협정 외에 대안이 없다고 생각할 때까지는 종전이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미국 신행정부는 주요 변수가 될까.
“트럼프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노트르담대성당 재개관 기념식에서 보여준 모습은 다른 생각이 들게 했다. 우크라이나 국기를 온몸으로 구현하려는 듯 평소와 달리 푸른색 슈트와 노란 넥타이를 착용한 것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을 향해 ‘협상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주문한 것, 또 푸틴 대통령에게 ‘협상해야 한다’고 촉구한 것 등이 종전을 위한 트럼프 역할에 기대를 걸게 하는 대목이다.”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휴전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헤즈볼라는 이스라엘 공격으로 힘이 많이 빠졌다. 헤즈볼라의 주요 후원자인 이란도 그로 인해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이란의 지원을 받았던 시리아의 알아사드 정권도 무너졌다. 그렇다고 헤즈볼라가 치명상을 입은 건 아니다. 예멘에서는 이란을 등에 업은 후티 반군이 여전히 활동 중이다. 반면 미국은 지난 몇 년 동안 중동에서 외교적인 기반을 많이 상실했다. 중동에는 너무 다양한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섣불리 예측하기 어렵다.”
미국 신행정부가 중동 정세에 미칠 영향은.
“이스라엘은 바이든 정부의 무기 지원 등을 통해 이익을 많이 봤다. 그런 부분은 미국 신행정부에서 유지되거나 더 강해질 것으로 본다.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이전까지 사우디·이스라엘 외교 정상화도 상당히 진행됐는데, 미국 신행정부 취임으로 다시 속도가 붙을 가능성이 있다.”
경제 어려움이 커지면서 궁지에 몰린 중국이 대만을 무력 침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유감스럽게도 그럴 가능성이 커 보인다. 중국 경제 상황이 계속 나빠질 경우 해외에서 군사력 사용을 ‘(국민이 지도자 중심으로 결집하는) 국기 결집 효과’를 위해 고려할 수 있다. 대만 침공을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 국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카드로 만지작거릴 가능성이 있다.”
PLUS POINT
민스크 협정과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정전협정인 ‘민스크 협정’은 1차 협정과 2차 협정으로 나뉜다. 러시아는 2014년 9월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했고, 그해 9월 양측은 포로 교환, 인도적 지원, 중화기 철수 등 12개 조항에 합의했으나 이내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 2015년 2월 우크라이나와 도네츠크·루간스크 반군 지도자, 러시아,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는 △즉각적이고 완전한 휴전 △전투 지역에서 중화기(heavy weapons) 철수와 50㎞ 안전지대 설정 △OSCE를 통한 휴전 및 무기 철수 감시 △분쟁 지역의 사회·경제적 링크 복원 △돈바스 지역으로부터 모든 외국군 및 무기 철수 등 13개 조항에 합의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프랑스, 독일 정상이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에 모여 지지를 선언하면서 ‘2차 민스크 협정’으로 명명했다. 하지만 이 또한 2022년 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효력을 상실했다.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는 1994년 12월 5일 우크라이나·벨라루스·카자흐스탄이 구 소련으로부터 이어받은 핵무기를 포기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미국·영국·러시아가 이 3개국 각각에 독립, 영토 보전, 주권, 안전을 보장한다고 다짐한 문서다. 하지만 당시 각서는 2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