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정준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국제통상전략센터 선임연구원
새해의 여명이 채 가시기 전인 2007년 1월 8일 오전 9시 41분.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아이팟, 전화, 인터넷 통신기기’를 하나로 합친 1세대 아이폰(iPhone)이 공개된 그날은 인터넷 중심의 3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중심의 4차 산업혁명의 가교가 된 역사적 한 장면이다.
정보기술(IT) 무역사의 첫 페이지는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와 휴대전화가 발명된 때로 돌아간다. 무려 50여 년 전이다.
“컴퓨터 칩의 성능이 18개월마다 2배씩 향상된다”는 ‘무어(Moore)의 법칙’이나 “네트워크의 규모가 커지면서 비용 증가는 줄지만 자체의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메트칼프(Metcalfe)의 법칙’처럼 정보통신(IT)에 기반한 기술의 진화는 인간에 의해 빠르게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그사이 시나브로 인간 역시 바로 그 IT에 의해 진화했고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ce)’에서부터 디지털 시대의 신인류인 ‘호모 디지쿠스(Homo Digicus)’와 모바일 시대의 신인류인 ‘호모 모빌리언스(Homo Mobilians)’가 됐다. 인간이 진화시킨 IT에 의해 다시 인간이 진화한 격이다.
IT기기로 분류되는 제품의 종류는 실로 다양할 것이지만 그 중심에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있다. 17세기 초 독일에서 기계식 계산기가 발명된 것은 시작이고, 사실상 최초의 컴퓨터라고 불리는 ‘마크원(Mark-1)’은 미국에서 하버드대 수학자 하워드 에이컨(Howard Aiken)이 IBM사의 후원으로 1944년 제작했다. 영화 <아이언맨>에서 토니 스타크(Tony Stark)와 물리학자 호 인센(Ho Yinsen)이 만든 최초의 아이언맨 슈트와 같은 그 이름 맞다. 물론 개인용 컴퓨터는 1970년대 말부터 보편화됐다. 스마트폰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휴대전화 역시 미국 모토로라의 마틴 쿠퍼(Martin Cooper) 연구원이 1973년 발명했다. 석탄, 석유, 철과 전기에 힘입어 영국이 주도하고 또 패권국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던 1·2차 산업혁명의 여운이 두 차례 세계전쟁과 함께 사라지고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3차 산업혁명의 시기가 도래했을 때 미국이 새로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발돋움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현재 진행형인 미·중 무역전쟁의 한가운데에도 IT가 자리 잡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로 시작된 양국 간 숨 막히는 대결의 이면에는 ‘중국제조 2025’로 대변되는 중국의 제조업과 결합한 IT굴기에 대한 미국의 경계심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10년 전인 2010년에는 일본과 중국 간 센카쿠 열도 또는 댜오위다오 영토 분쟁이 이슈였다. 이는 IT기기의 원료로 매우 중요한 희토류에 대해 중국이 수출 제한의 경제보복으로 맞대응하면서 WTO분쟁으로 발전했고, 종국에는 중국이 2015년 최종 패소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지난해 일본이 우리나라에 IT기기 핵심 부품인 반도체의 생산 공정에 필요한 주요 소재의 수출을 규제한 것을 떠올리면 이제 IT 중심의 무역전쟁은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나라가 세계무역기구(WTO)를 중심으로 한 자유무역의 수혜를 가장 크게 입은 나라 중 하나라는 사실은 결코 비밀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우리 경제발전과 무역성장에서 과거와 현재에도 가장 고마운 분야는 바로 IT산업이다. WTO는 회원국 중 약 40개국(IT분야 세계 점유율 90% 이상)이 합심해 1996년과 1997년 각각 체결하고 발효시킨 정보기술협정(ITA; Information Technology Agreement)을 통해 반도체와 컴퓨터, 통신장비와 전자부품 등 총 7개 품목군, 203개 품목에 대하여 관세를 철폐하기로 약속했다. 1996년 우리나라의 IT 수출액이 263억 달러였지만, 2014년 1,366억 달러까지 증가하고 현재에도 반도체 수출이 전체 수출의 4분의 1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우리나라가 IT강국으로 부상한 원동력에서 WTO의 ITA 역할을 무시해선 안 된다.
이어 2015년에는 WTO 제10차 각료회의를 계기로 기존 ITA 적용대상에 TV, 라디오, 의료기기, 그리고 GPS 등 계측기기까지 총 12개 품목군, 201개 품목이 추가되고 2016년부터 점진적으로 이들의 무관세화가 이뤄지면서 다시 한 번 IT분야 수출과 신(新)성장 동력 마련의 동기부여가 날개를 달았다. 이처럼 WTO에서의 약속은 우리 미래의 약속으로 이어졌던 사례가 있다. ‘그린 뉴딜(Green New Deal)’과 함께 ‘한국판 뉴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디지털 뉴딜(Digital New Deal)’에 ITA I과 II를 겪으며 강해진 우리 IT 경쟁력이 다시 한 번 장밋빛 약속으로 이어지길 기대할 수 있는 이유다.
여담이지만, WTO ITA I과 II 사이인 2008년부터 2009년까지 우리 IT무역에서 그야말로 ‘웃픈’ 에피소드가 있었다. 당시는 TV나 GPS에 대한 무관세화 논의가 시작되기도 전이었는데, 우리나라가 독일에 DMB폰을 수출하면서 사건(?)이 발생했다. 2008년 4월 독일의 세관당국이 이를 당시 무관세 대상이던 휴대전화가 아닌 GPS 또는 TV로 분류하여 3.7~14%의 고율관세를 부과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DMB폰이 TV 수신과 GPS 기능이 단순 부가된 휴대전화라는 입장. 2009년 EU 집행위원회가 DMB폰을 휴대전화로 분류해야 한다는 결정을 최종적으로 내리면서 우리는 안도할 수 있었다. 만약 이때의 결정이 반대로 나왔다면 올해 1분기 애플(점유율 32%)과 화웨이(점유율 13%)를 제치고 당당히 유럽시장 스마트폰 점유율 1위를 차지한 삼성(점유율 35%)을 찾아볼 수 있었을까.
※참고: <일곱 가지 상품으로 읽는 종횡무진 세계지리>(조철기, 2017) 및 인터넷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