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심종석 대구대 무역학과 교수, 경영학 박사·법학 박사
편향된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수많은 과일 중에 바나나만큼이나 기구한 팔자를 타고난 과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바나나로 촉발된 전쟁의 역사가 오늘날 현대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중미 지역에서는 권력찬탈에 바나나가 관련되어 ‘바나나공화국’이 생겨난 것을 필두로 1993년에는 미국과 유럽연합(EU) 간 이른바 ‘바나나 전쟁’을 시작하여 무려 16년간이나 지루한 싸움이 이어졌다.
‘바나나 전쟁’은 제1차대전을 전후해 미국의 중미 지역(쿠바, 푸에르토리코, 온두라스, 니카라과, 아이티 등) 군사 개입을 칭하는 용어였다. 당시 미국은 자국의 다국적 농산물 기업(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치키타, 돌 등)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그 기업들과 결탁한 현지 부패 권력을 혁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군대까지 동원했다. 명분은 혁명세력으로부터 자국의 다국적 기업을 보호하겠다는 것이었다. 이후 현지 혁명세력에 맞서고 있던 이들 국가의 독재자들은 미국의 묵시적인 비호 아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되나 그것도 화무십일홍이라 오래가지 못하고 때마다 권좌가 뒤바뀌곤 했다.
왜냐하면 미국의 다국적기업들이 거대자본을 통한 강력한 로비력으로 미국 의회를 폭넓게 장악하고 있던 까닭에 매번 등장하는 독재자들은 일개 꼭두각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들 독재자는 이윤극대화를 위한 다국적기업 경영정책 향배에 따라 때마다 권좌반납을 밥 먹듯 해야 했다. 이러한 반복적인 전횡 때문에 미국의 다국적기업들은 국제사회에서 ‘국가 위의 국가’로 불리게 되고 이들 국가 또한 그들 기업의 지배하에 예속된 이른바 ‘바나나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한편 1975년 2월 유럽의 유럽공동체(EC) 국가들은 과거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카리브해 연안, 태평양 지역의 국가(African, Caribbean and Pacific States·이하 ACP)와 동반자적 협력관계를 내용으로 하는 로메(Lome)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ACP에서 수입되는 바나나 등 대다수 농식품에 대해 무관세 혜택이 적용되었다. 이후 1992년 12월 유럽연합(EU) 출범을 앞두고 개별적으로 운영되던 바나나 수입정책을 EC 공동정책으로 개편하면서 지역별로 차별적인 할당관세를 적용하게 된다. 이러한 조치는 미국의 분노를 촉발한다. 당시 미국의 농산물 다국적기업은 다수의 남미 국가에서 바나나를 수입한 후 부가가치를 높여 재수출하는 가공무역을 주로 했는데 이들 남미국가는 ACP가 아니어서 어떠한 특혜도 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가격 경쟁력 상실로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나나 전쟁’ 발발의 이유가 되었다.
촉발된 전쟁의 양상은 그야말로 뒤집고 메치는 형국으로 전개된다. 당초 미국은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여 승소판결을 받아냈지만 그럼에도 지극히 미온적인 EU 태도에 급기야 EU에서 수입되는 일체의 사치품에 고율의 보복관세를 부과하면서 선전포고에 임한다. 이에 EU는 노후된 미국 항공기의 EU 영공 통과를 금지하는 맞불을 놓고, 또다시 미국은 EU 항공기의 취항을 불허하고, 재차 반격에 나선 EU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전면 봉쇄하는 초강수로 대응한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미국과 EU의 바나나 전쟁은 승자 없이 쓰라린 상흔만을 남긴 채 16년이 지난 2009년에 이르러서야 전격적 합의로 종전을 고한다. 어이없게도 기치에 내건 종전합의라는 것이 고작 EU는 ACP 및 남미에서 수입되는 바나나 관세를 형평에 맞게 조정한다는 것과 미국은 EU 수출품에 대한 보복관세를 없앤다는 것이 전부였다. 바나나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바나나 쌈박질이라 불릴 만한 사건이었다.
1970년대 한국에서는 애호박 크기에도 미치지 못한 바나나의 1개 값이 당시 명절 선물로 가장 선호하던 5kg짜리 설탕 1포대와 버금한 시절이었다. 당시 바나나는 늘 한 입 베어 물고도 목 뒤로 넘기기가 아까웠을 만큼 귀하고 비쌌지만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었다. 바나나 한 송이 값이 고작 애호박 1개 값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푸념이 들리니 격세지감이다. 하지만 과일의 실재적 가치는 변함이 없다. 특히 바나나에 많이 함유된 ‘세로토닌(Serotonin)’은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물질이다. 항우울제의 핵심성분으로 작용한다고 하니 유치한 쌈박질 대신 코로나 창궐의 시대 코로나블루를 극복할 ‘바나나 소비전쟁’의 촉발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