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정준 강남대 글로벌경영학부 교수
맑게 정제된 투명한 물, 생수. 그 생수의 유통기한이 엄격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그리고 그 기간이 얼마인지를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리고 지금의 생수 유통기한이 어떻게 정해지게 된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더욱 없을 것이며 그 과정에 통상분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마 더더욱 없을 것이다.
1986년부터 1994년까지 이어진 다자간 무역협상, 우루과이라운드(UR; Uruguay Round)의 성과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그중에서도 1995년 1월 1일 세계무역기구(WTO; World Trade Organization)를 출범시키고 이후 20여 년 이상 조직의 핵심 기능으로 역할해 온 국가 간 무역 분쟁해결제도(DSM; Dispute Settlement Mechanism)를 마련한 것은 세계 경제사(史)에 하나의 획을 그은 그야말로 대사건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제도가 첫발을 내디딘 지 불과 10개월 만인 11월 8일 우리가 캐나다로부터 제소를 당한 것은 다소 민망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심지어 이에 앞서 두 번이나 다른 건으로 제소를 당했는데, 이는 비밀 아닌 비밀로서 WTO 분쟁해결제도 초창기에 벌어진 우리 나름의 흑역사다.
일명 한국과 캐나다 간 생수 분쟁(DS20)으로 잘 알려진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선 간단하게나마 국내 생수산업의 역사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금이야 생수가 매우 흔하지만, 우리나라는 1988년 서울 하계올림픽을 계기로 생수가 처음 상품화되었다. 국내 수돗물 위생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고 선수들과 올림픽을 보기 위해 방한한 외국인에 한하여 생수 판매를 허용했던 것이다. 문제는 올림픽 폐막과 함께 “물을 돈 주고 사 먹는다”는 빈부격차성의 사회 내 위화감을 방지하고자 이전 한시적으로 허용했던 생수 판매 관련법을 폐지하면서 발생했다. 생수업체들의 헌법소원으로 “생수 판매금지는 국민의 행복추구권에 반한다”는 판결이 나오는 내홍 끝에 생수 판매가 재허용되었고, 이를 위하여 1995년 1월부터 5월까지 ‘먹는 물 관리법’과 ‘먹는 샘물(생수)의 기준과 규격 및 표시기준 고시’가 제정되었다.
국내에서의 문제가 해결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이 생수 관련 국내법이 이번에는 외국과의 WTO 통상분쟁에 빌미를 제공했다. 캐나다는 우리 국내법이 상기 고시 제3조와 제8조를 통해 국내 판매를 위한 생수의 ①생산방법(정확하게는 살균을 위한 처리방법)과 ②유통기한을 지나치게 제한한다고 주장했다. 우선 당시 국내법은 생수의 생산과정에서 침전, 여과, 폭기, 자외선을 이용한 광학적 살균 등 최소한의 물리적 처리만을 살균방법으로 허용했는데 이는 캐나다를 포함한 주요 국가들로부터 ‘화학적으로 오존 처리된 생수’가 수입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지나치게 엄격한 이 위생기준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던 오존 처리를 불허하고 이것이 곧 생수 무역에 대한 과도한 보호막이자 무역기술장벽(TBT; Technical Barriers to Trade)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캐나다의 주장이었다. 또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유통기한을 정하는 것은 제조업자였고 그 기간은 2년 정도인데 우리나라는 정부가 유통기한을 정했을 뿐만 아니라 그 역시 6개월로 제한하고 있었다. 국제적인 생산방법(오존 처리)과 국제적인 유통기한(2년)을 제시하며 우리나라를 WTO에 제소한 캐나다에 맞서 우리나라는 분쟁해결제도의 1심인 패널로 회부되기 전인 1996년 4월 합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패널심까지 진행하더라도 결코 유리한 판결이 나올 것 같지 않다는 우려가 크게 작용했다.
이후 우리나라의 생수 수입 및 유통환경이 크게 변화했다. 우리나라는 오존 처리된 생수의 수입과 판매를 허용했다. 현재 상기 고시 제3조는 “최소한의 물리적 처리와 오존을 이용한 처리”를 인정하고 있다. 또한 유통기한에 관한 제8조는 여전히 생수의 유통기한을 제조일로부터 6개월 이내로 명시하고 있지만 이를 초과한 기간 중에도 제품의 품질에 변화가 없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몇 가지 구비서류를 환경부장관에게 제출하여 승인을 받으면 국내에서 판매하는 데 제약을 주지 않는다. 현재 국내에서 여러 국가로부터 수입된 생수를 쉽게 찾을 수 있고 그들의 유통기한이 6개월에서 24개월까지 다양한 배경이다. 통상분쟁을 통해 우리 소비자의 생수 선택권이 다양해졌지만 오래 보관 중인 생수를 마시기 전에는 그 유통기한이 6개월인지, 24개월인지 한 번 더 확인해야 하는 약간의 수고가 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