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사진 한경DB
세계무역기구(WTO) 제7대 사무총장에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가 3월 1일 취임했다. WTO 사상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이면서 첫 여성 사무총장인 그는 모국인 나이지리아에서 재무장관을 두 번 역임하고 외교장관까지 지낸 인물이다. 또한 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워싱턴D.C.에 소재한 세계은행에서 25년 동안 근무하면서 총재 다음 서열인 전무이사에도 올라 국제적 인맥을 두루 쌓았다. 이러한 인맥과 협상력으로 WTO의 주요 현안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나 현재의 국제정치 환경으로 보았을 때 해법은 많아 보이지 않는다.
2020년 WTO 사무총장 출마 직후 중국과 일본이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의 지지를 선언했고, 아프리카와 유럽 국가도 그를 밀었다. 미국 국적을 갖고 있지만 이번 경선에서 미국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화려한 경력을 바탕으로 오콘조이웨알라는 2012년 세계은행 총재에 출마했으나 미국이 밀었던 한국계 김용 전 총재에 석패한 바 있다. 또한 세계무역을 관장하는 WTO 수장으로서 국제통상 경력이 전무하다는 이유로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사실상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선출이 몇 개월 지연되었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거부권을 철회한 것은 다수결을 인정해야 한다는 국제적 분위기에 떠밀린 것이지 결코 지지로 돌아선 것은 아니다. 오콘조이웨알라가 세계적인 인맥, 정치력과 협상력을 활용해 WTO를 결속시키고 주요 현안에 대한 해법을 모색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현재의 국제정치 상황에서 실질적인 진전을 볼 수 있는 이슈가 많지 않다.
지난 3월 1일 오콘조이웨알라는 취임 당일 열린 WTO 일반이사회에서 기존 방식으로는 더 이상 WTO 가치를 유지할 수 없다며 단기적으로는 결과 도출이 가능한 분야에 집중하고 논란이 큰 이슈에 대해서는 장기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수산보조금 협상 등 WTO 통상 현안 타결, 상소기구 정상화와 분쟁해결기구 개혁, 오는 12월로 예정된 12차 WTO 각료회의(MC12)의 성공적 개최, 개도국을 위한 코로나19 백신 지식재산권 포기(특허공유) 등 굵직한 글로벌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으나 최소 3가지 이슈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아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든다.
첫째, 2001년 시작된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WTO 수장이 의도적으로 DDA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현재의 국제통상환경에서 DDA를 되살리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즉 그의 표현대로 단기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는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전 세계적인 보호무역주의 차단 및 무역자유화 추진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보호무역 추세가 강화되고 있고, 지난해 코로나 검역조치로 발동된 보호무역 조치가 아직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셋째, 미국이 제안했고 현재 WTO에서 협상이 진행 중인 다자간 디지털 통상 규범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미국의 관심사항을 일부러 피하려는 의도가 있지는 않겠지만, 디지털 통상 규범에 대해 대부분의 개도국이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 크게 고려되었을 수 있다. 이 이슈 역시 선진국 간에도 미세하게 입장 차이가 있고, 중국이 극렬히 반대하고 있어 합의 가능성이 낮다. 참고로 미국은 비즈니스 활용 차원에서 디지털 통상 규범 설정을 주장하는 데 비해 유럽 국가들은 개인정보 보호에 역점을 두고 있다. 중국은 인터넷 및 데이터 국가주의를 주장하고 있어 미국과의 간극이 크다.
오늘날 WTO 위상이 추락한 배경에는 미국의 WTO 정책 변화가 가장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세계 금융위기 극복 과정에서 중국 위상이 국제적으로 급부상하자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를 대외정책 기조로 내세우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을 시작하면서 중국 견제가 본격화되었다. 그사이 중국은 WTO 회원국 지위 덕을 톡톡히 보면서 세계 최대 무역국으로 발전했고 미국 다음의 경제대국 G2가 되었다.
2016년 미국은 중국의 시장경제지위(MES; Market Economy Status)를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WTO 가입 당시 중국이 약속한 시장경제화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불인정 이유다. 반면, 중국은 가입 16년 차에 MES 인정은 WTO 가입의정서에 명시된 중국의 권리라고 맞서고 있다. WTO 가입의정서에는 향후 15년 동안 중국을 비시장경제국가로 규정하되 16년 차에 시장경제국가로 전환한다고 되어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WTO 회원국은 2016년 이전에 중국의 요청에 따라 중국을 시장경제국가로 인정했으나 미국, 유럽연합(EU), 일본 등 선진국은 중국의 요청을 끝까지 수락하지 않았다.
이들은 2013년 시진핑 국가주석이 집권하면서 내건 ‘중국몽’ 실현과 이를 실현하기 위해 2015년 발표한 ‘중국제조 2025’가 중국의 비시장경제체제과 관련이 있다고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WTO 체제가 중국의 비시장경제체제를 제대로 규율할 수 없다는 것이 미국의 판단이다. 게다가 WTO 분쟁해결기구에 대한 미국의 불만이 누적되었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미국은 WTO 분쟁을 가장 많이 제기했고, 피소당한 상황이다. 게다가 미국이 패배한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분쟁해결기구에 대한 미국의 불만은 시간이 갈수록 강경해졌다. WTO는 상소기구 개혁을 가장 시급한 현안 중 하나로 보고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WTO 상소기구의 역할을 패널의 법리적 오류 판단에 한정하고자 하는 반면, EU는 무역분쟁 국제법정으로 격상시키는 것을 선호한다.
한편, 미국의 ‘불리한 가용정보(AFA)’1), ‘특별시장여건(PMS)’2) 등 무역구제 기법, 트럼프 전 대통령의 일방주의 고관세 부과,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한 ‘바이 아메리칸’ 행정명령 등 많은 조치가 이 WTO 규범과 배치될 수 있고, 이들 일부는 이미 WTO 분쟁해결기구에 제소된 상태여서 미국이 상소기구를 정상화시킬 가능성은 더욱더 불투명해지고 있다.
1) 불리한 가용정보(AFA; Adverse Facts Available): 조사 대상 기업이 조사에 비협조적이라고 판단할 경우 불리한 추론으로 판정할 수 있는 근거 규정.
2) 특별시장여건(PMS; Particular Market Situation): 조사 당국이 특정 기업이 제출한 제조원가를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재량으로 가격을 산정해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는 조치.
코로나19의 세계적 유행(팬데믹)이 여전한 가운데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올해 중후반 집단면역을 목표로 백신 접종을 진행하고 있는 반면, 다수 아프리카 저개발국과 개도국은 백신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백신 개발국의 특허 공유 문제를 제기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천문학적인 비용을 투입해 개발한 백신의 특허를 민간 제약사들이 공유할 리가 만무하다.
WTO 규범상 특허와 같은 지식재산권을 보호해야 하지만, 위기상황에서 국가가 특허를 침해할 수 있는 예외 규정이 있다. 과거 남아공 에이즈(AIDS) 치료약에 대해 예외 규정을 적용한 사례가 있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을 듯하다. 설령 현재 등록된 특허를 국가가 긴급사용하더라도 제약사가 고난도 제조기법을 제공하지 않는 한 백신 생산을 할 수 있는 국가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오콘조이웨알라 사무총장이 백신 특허 공유 문제를 제기한 것은 사무총장 인선과정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해준 아프리카 및 개도국을 의식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자신의 전공인 지역경제개발학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어떤 나라든 코로나19 팬데믹을 극복하지 않는 한 무역성장과 경제발전을 기대할 수 없으며, 보건위생 여건이 열악한 저개발국에서는 백신 접종과 집단면역 외 다른 방안을 찾기 어렵다.
신임 사무총장은 지난해 코로나 백신 공동구매·배분을 위한 국제 프로젝트인 ‘코백스 퍼실리티(COVAX Facility)’를 이끌어왔고, 많은 WTO 회원국이 코로나 백신 민족주의에 반대하며 백신 특허 공유를 주장하고 있지만, 워낙 이해관계가 크게 걸려 있는 사안이라 아무리 WTO 지식재산권협정 예외규정을 강조해도 합의 도출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신 특허 공유를 주장하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있어 보인다.
전통적으로 다자통상체제는 미국이 논의를 주도하면서 EU 등 선진국의 협조를 바탕으로 유지되어 왔다.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은 미국이 절대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던 냉전시절이었고, WTO 출범 초기에는 중국이 부상되지 않았고 WTO 체제는 신자유주의 기조와 부합함에 따라 미국은 WTO 발전을 위해 리더십을 보였다.
WTO를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WTO 정책을 변화시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미국이 빠진 WTO는 존재 의미가 취약해질 것이고, 비시장경제 규제, 개도국에 대한 특혜대우(S&D; Special and Different Treatment), 디지털 통상 등 미국이 제기한 이슈는 국제적 합의가 쉽지 않다. 코로나19 백신 특허 공유의 취지는 이해하지만, 신임 사무총장이 통상 이슈보다는 백신 특허 공유에 더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현재의 WTO 현안 해결에 장애가 될 수 있다. 백신 지식재산권 포기 주장은 백신 개발 선진국과 나머지 국가 간 대립구도를 형성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과 개도국 간 대립이 WTO 위상을 더 약화시킬 수 있고, WTO가 정치적 실험에 휩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무총장이 개도국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지지할 것이 아니라 합의 가능한 적정선을 찾아야 한다.
오는 12월 12차 각료회의는 열리겠지만, 현재로서는 의미 있는 회의가 될지 의문이다. 사무총장이 일반이사회에서 언급했듯이, 각료회의에서 다룰 이슈를 조정하고 WTO 회원국 간 분쟁을 줄일 수 있는 사안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올해 각료회의가 부실하면 4년 임기 내내 WTO는 내리막길을 걸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신임 사무총장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