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정준 강남대 글로벌경영학부 교수
‘자동차를 만든다’는 것은 천지 차이의 의미를 가진 두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생산의 모든 공정을 수행하여 자동차를 조립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 자동차의 엔진과 각종 부품 등을 하나하나 디자인하여 자동차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후자처럼 자체 기술력을 가지고 자동차를 처음부터 만들 수 있는 국가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지난해 우리나라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자동차 생산 5위를 탈환, 기염을 내뿜었다. 1~4위는 각각 중국, 미국, 일본, 독일로 자동차 자체 기술력을 확보한 몇 안 되는 국가들이다. 자동차산업은 국가 기간산업으로 협력업체까지 고려하면 국가 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크다. 특히 고용에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할 뿐 아니라 수많은 부품이 하나의 자동차가 되어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예술적 공산품인 만큼 해당 국가의 산업 수준을 대변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많은 국가가 자국 자동차산업 개발에 뛰어드는데 1990년대 인도네시아 역시 그중 하나였다.
인도네시아는 1993년에 자국 자동차산업 육성정책을 도입했다. 자동차 생산과정에서 인도네시아산 부품을 일정 비율 이상 사용하는 경우, 나머지 부품의 수입에 대해서는 일부 관세를 저율로 해주거나 면제해주고, 특정 비율 이상 자국산 부품을 사용해 만든 자동차의 사치세(Luxury Tax) 역시 낮춰주는 정책이다. 이어 1996년에는 국민차 프로그램(National Car Program)을 통하여 자국 자동차 회사가 인도네시아 내 자국 기업 소유 생산시설에서 자동차를 생산하고 최종적으로 ‘인도네시아’ 브랜드를 부착하면 그 회사에는 ‘국민차 회사’라는 지위(일명 ‘Pioneer 지위’)를 부여하기로 했다. 이 경우 해당 자동차에 들어가는 수입 부품의 관세와 자동차에 부과하는 사치세를 면제해주는 파격적인 대우까지 약속했다. 당시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킨 회사는 PT 티모르푸트라나쇼날(TPN; Timor Putra Nasional)이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바로 이 TPN사에서 생산하려던 인도네시아의 국민차 ‘티모르(Timor)’가 당시 우리나라 기아자동차의 첫 고유모델이던 ‘세피아(Sephia)’ 차종을 기본 모델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는 우리나라 기아차가 티모르 생산에 합작투자로 참여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자동차 자체 기술력을 가진 유럽과 미국, 일본은 이러한 인도네시아의 정책이 세계무역기구(WTO) 무역 관련 투자조치(TRIMs; Trade-Related Investment Measures) 협정에 불합치한다며 1996년 협의를 요청했고, 1997년 1심 절차가 시작되었다. 이 분쟁에 이해관계가 컸던 우리나라 역시 제3국 자격으로 참여했는데 1998년 판결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의 패소였다.
인도네시아 정책에 따라 최대한 국산화된 경우에만 특혜를 제공하는 것은 투자국을 차별 없이 대하는 TRIMs 협정상 내국민대우 원칙(제2.1조)을 위반하며, 외국산 자동차와 국산화된 자동차에 차별 과세하는 것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내국민대우(제3.2조)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다른 WTO 회원국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특혜가 한국(기아자동차)에 주어지면서 GATT 최혜국대우(제1.1조) 역시 위반한다고 결론 내렸다.
우리에게 ‘IMF 위기’로 잘 알려진 1997년의 동남아시아 외환위기가 바로 이즈음 발생했다. 인도네시아 역시 국제통화기금(IMF)과 합의로 이뤄진 경제개혁 프로그램에 따라 국민차 프로그램을 폐지했다. 기아차와의 협력 역시 연기되고 말았다. 이미 WTO 판결로 예상된 행보였으나 외환위기까지 겹친 후폭풍은 매서웠다. 해외사업의 호기를 놓친 기아차는 결국 1999년 현대자동차에 인수되기에 이르렀고, 지금 동남아시아에서 자동차 자주국 지위는 인도네시아가 아닌 말레이시아가 가지고 있다.
참고 : <통상분쟁 속의 한국>(공수진 외, 2006), <WTO 통상분쟁 판례해설(I)>(김승호, 2007), <국제경제법 기본조약집>(박덕영, 2010) 및 인터넷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