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다시금 2차 반도체 회의를 소집했다. 인텔, 삼성전자, TSMC뿐 아니라 GM, 포드, 구글, 아마존 등 자동차와 플랫폼 기업들까지 불러들였다. 바이든 대통령이 웨이퍼를 한손으로 흔드는 사진을 보면서 많은 국민이 세계 반도체산업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해 강한 궁금증을 가지게 됐다.
최근 자동차용 반도체의 부족으로 자동차 생산이 지연되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미국은 지난 4월 12일 세계 19개 반도체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을 불러 화상으로 반도체 대책회의까지 가졌다. 이번 사태의 중심에는 미국이 반도체를 안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전략물자로 간주하는 데 있다.
AMD, 애플, 엔비디아, 퀄컴 등 미국 내 팹리스 업체들은 칩을 대만의 TSMC나 삼성전자에 위탁해 생산하고 있다. 그런데 TSMC는 중국으로부터 불과 117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삼성전자는 휴전선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 국제 상황 변화에 따라 미국의 안정적인 반도체 수급에 문제가 발생하게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미국은 안보적으로, 산업적으로 그 가치가 중요해지는 반도체의 안정적인 자급과 미·중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반도체산업 지원을 획기적인 수준으로 계획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 자국의 반도체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반도체지원법안(CHIPS for America Act)’과 ‘미국 파운드리법안(American Foundries Act)’ 등을 의회에서 발의한 데 이어 올해에는 바이든 대통령이 웨이퍼를 손에 들고 “반도체가 인프라다”라고 외치면서 반도체산업에 총 500억 달러 지원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발맞추어 인텔도 애리조나에 파운드리 팹을 건설하기 위해 2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했으며 TSMC도 같은 애리조나에 5nm(나노미터)와 3nm 공정 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36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삼성전자도 170억 달러를 투자하여 파운드리 공장을 세우겠다고 공식화했다. 그러나 미국이 자국 내에 생산시설이 없어서 반도체 기업들의 투자를 독려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미국은 전 세계 반도체 팹의 33%를 가지고 있는 팹 최다 보유국임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반도체 파운드리 팹을 자국 내에 짓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런 투자가 진행된다면 미국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반도체 생산시설을 보유하게 되어 자국의 팹리스 기업이 안정적인 반도체 칩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은 절대 강자로서 미국의 반도체산업 위상을 확고하게 하면서 차후 중국과의 기술경쟁에서도 우위를 지키게 할 것이다. 강력한 국제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미국은 반도체산업의 지속적인 우위를 놓지 않을 것이므로 향후 미국과 중국은 반도체 분야에서 첨예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다. 이는 반도체가 국가의 기술경쟁력 및 산업경쟁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한국도 이런 세계적인 반도체산업의 재편에 발맞추어 장기적이고 세밀한 반도체산업의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중국은 반도체산업에서 미국과 세제와 자금지원 경쟁을 벌이고는 있지만 진짜 문제는 기술 봉쇄다. 현재와 같은 실리콘 기반의 원판 위에 반도체 칩을 만드는 한 중국은 소재, 부품, 장비, 소프트웨어 모든 분야에서 미국의 기술제재를 벗어나기 어렵다.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 시절에 화웨이와 SMIC에 대한 반도체 기술의 대중국 봉쇄를 시작했고 바이든 정부 들어서도 극자외선(EUV; Extreme UltraViolet) 장비는 물론이고 기술수준이 한 단계 낮은 심자외선(DUV; Deep UltraViolet) 장비의 대중 수출금지, 슈퍼컴퓨터용 반도체 기업 제재 등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미국의 반도체 기술 제재에 대응해 중국도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반도체 소재와 장비 국산화에 투자를 늘리고 미국의 제재를 피할 신반도체 개발에 올인하고 있다. 중국은 28nm 이하의 기술 보유업체에 대해 10년간 25%의 법인세를 면제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고, 반도체 장비 수입에 대해 2030년까지 관세를 면제해주는 정책도 동시에 실시하고 있다.
반도체 공정기술로 보면 대만, 한국, 미국은 7~5nm급 기술을 상용화하고 있지만 중국은 3세대 이상 뒤진 14nm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미국의 기술봉쇄로 중국은 당황해하고 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중국의 ‘판을 바꾸는’ 반도체 국산화 전략이다. 중국은 지금 미·중 반도체 전쟁을 중·소 냉전시대 핵폭탄 개발 사례와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중국은 소련의 첨단기술이 빠진 상태에서 맨땅에 헤딩하면서 핵개발을 시작한 지 5년 만인 1964년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다. 중국은 이번 미국과의 반도체 전쟁도 획기적인 발상으로 ‘판을 바꾸는 방식’을 도입, 미국의 기술봉쇄를 뛰어넘을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중국은 반도체 기판을 실리콘이 아닌 새로운 첨단소재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중국은 2025년에 끝나는 14차 5개년 계획에서 실리콘카바이드(SiC)와 갈륨나이트라이드(GaN·질화갈륨) 소재의 제3세대 반도체 개발에 목숨을 걸고 있다. 실리콘 반도체에서는 미국 기술이 절대적이지만 제3세대 반도체에서는 아직 절대강자가 없기 때문이다.
서방의 반도체 회사는 투자수익률이 중요하지만 정부 주도의 중국은 무한대의 자금을 정부가 우회 지원하고 기술이 될 때까지, 제품이 나올 때까지 적자를 신경 쓰지 않고 돌진한다. 맨땅에 헤딩하면서 원자폭탄, 항공모함, 우주선, 우주정거장을 만들었던 정신과 독기 이상으로 중국은 차세대 반도체 국산화에 올인하고 있다. 미·중의 반도체 전쟁으로 한국이 단기적인 수혜자일 수 있지만 중국의 차세대 반도체 국산화가 성공하면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한국은 제3세대 반도체 개발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지금은 중국이 미국의 반도체 제재에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보이지만, 맹수가 우리를 탈출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
반도체 시장 점유율 1위를 자랑하던 일본 반도체산업은 PC라는 새로운 시대적 흐름을 간과하면서 저성장 국가의 늪으로 빠져든 반면 대만은 2021년 현재, 반도체 관련 ‘글로벌 슈퍼갑(甲)’이 되어 세계 반도체 공급사슬의 축을 이루고 있다.
1980~2000년대 세계를 석권한 일본 반도체산업은 시대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하면서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결정적 원인은 고성능·고품질에 대한 신앙적 기술 집착으로 변화하는 산업적 흐름을 간파하지 못한 것이 주원인이다. 최근 일본은 정부가 나서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에 관한 중장기 전략’ 모색을 주도하고 있다. ‘반도체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라는 판단 아래 미국 등 우방국과 반도체 제조 분야에서 협력하는 방안과 함께, 일본이 강점을 지닌 반도체 소재·장비 분야 경쟁력 제고 방안에 주력하고 있다. 일본 업계와 정부는 기술력의 우수성을 유지하면서 미래산업에 대한 상황판단과 대처능력을 중시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과거 기술적 우위에 따른 ‘일본이 만들면 팔린다’에서 ‘세계가 원하는 것을 만든다’로 사고의 전환과 더불어 특히 국제적 분업을 통한 생산력 증가에 노력하는 분위기다.
세계 반도체 업계의 최대 관심사는 삼성전자와 TSMC의 맞대결이다. 최후 승자가 누가 되느냐는 향후 외교적 지정학적 지도까지도 바꿀 수 있는 변수를 지닌다. 1980년대 후반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세계 반도체 업계가 구조적 지각변동을 할 때, TSMC는 란체스터 전략(Lanchester Strategy: 적의 방어망 일부에 모든 전력을 집중하여 승리하는 전략)을 장착하고, 미국 반도체 업계가 팹리스에 주력하는 트렌드를 간파하고는 파운드리(위탁생산)라는 새로운 사업모델을 창안해낸다. 이후 “고객과는 경쟁하지 않는다”는 모토 아래 고객의 신뢰와 초격차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계 파운드리의 절대강자로 성장한다. TSMC는 초기 경쟁자가 없는 상태에서 설계업체의 생산물량을 모아 처리하면서, 규모의 경제를 형성하고 투자의 선순환에 성공한다. 최근 반도체 대란을 통해 TSMC는 글로벌 슈퍼갑(甲)이 됐다.
반도체 대전의 승부는 ‘초격차 기술’이라는 화력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반도체 설계기술에 변곡점이 나타나고 있다. 시스템 반도체를 예로 들면 이종 집적(Heterogeneous Integration)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현재 유니버설 프로세스라는 범용 칩에서부터 시작하는 설계는 자신들의 제품과 특정 서비스에 최적화된 솔루션을 제공하는 데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패키징 기술의 대전환이 필요한데 우리 정부는 첨단 패키징 기술을 국가 핵심기술로 지정하여 보호 육성하고 있다. 정부는 자국 산업에 정면 승부를 걸어 성공할 분야의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 산학연이 연계되는 인재육성 시스템과 생태계 구성은 산업의 생사가 달린 문제다. 한국 반도체산업의 대전환은 기술인재 육성에 달려 있다.
유럽연합(EU)의 반도체산업은 자동차용 시스템 반도체 제조 중심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중 인피니언(13.4%, 독일)과 NXP(11.3%, 네덜란드)가 1, 2위를 다투고 있다. ASML(네덜란드)은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부문에서 독점을 누리고 있는 등 EU는 기초과학 기술력을 바탕으로 반도체 생산 장비와 소재 부문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EU의 반도체산업은 시장점유율에서 단일 국가인 미국, 한국, 일본에 미치지 못한다. EU 내에서도 독일,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 몇몇 국가에만 시장이 형성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시장을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은 부족한 상황이다. 현재의 반도체 시장은 크게 보면 미국과 EU 및 유럽에서 반도체를 설계해 아시아에서 생산하는 분업 구조로 되어 있다. 이 같은 글로벌 반도체 분업 구조의 취약성이 이번 차량용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를 통해 드러났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특히 자국 내 변변한 생산 기반이 없는 인피니언(독일), NXP(네덜란드),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스위스) 등 주요 차량용 반도체 업체는 TSMC와 UMC 등 대만 파운드리 업체에 대부분의 생산을 맡기다 보니 대만 기업의 반도체 생산량 증대만을 학수고대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고자 EU는 유럽 내 반도체 공급망을 세우기 위해 다양한 대안을 찾고 있다. 반도체산업 경쟁력 향상을 위해서 EU 공동 관심분야 주요 프로젝트(IPCEI; Important Project of Common European Interest)를 통해 약 500억 유로(약 68조 원)를 투자, 전체 반도체 생산 중 EU 비중을 현재 10%에서 20%로 증가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반도체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현재 EU까지 가세한 반도체산업 긴장감은 자국의 반도체 경쟁력이 곧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는 인식에서 초래됐다고 볼 수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 실현될 5G·사물인터넷·인공지능/빅데이터·자율주행 등 신기술의 핵심이 반도체 설계 및 생산능력이고, 이 기술을 확보한 국가가 세계의 패권을 쥐게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국제 정세가 우리나라에는 위기이자 기회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전 세계에 초미세 반도체 생산능력을 갖춘 기업은 삼성전자와 대만의 TSMC밖에 없어서 미국, 중국에 이어 EU까지 반도체산업 투자를 확대하는 상황에서 국내 기업에 대한 각국의 투자 유치 요청은 불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반도체 분업 구조에서 한국 기업이 담당하는 것은 사실상 대량생산 공장의 역할이 크다. 하지만 국내 기업은 시장 규모 면에서 시스템 반도체 분야의 1/2 수준인 메모리 반도체 산업에 역량이 집중되어 있고, 지금은 이마저도 중국의 도전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 자동차용 반도체 부족 사태를 기회로 삼아 시스템 반도체 개발을 위한 협력은 미국과 하고, 반도체 소재·생산 장비 개발과 자동차용 반도체 개발은 EU와 협력관계를 강화하는 투 트랙 전략을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