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산업은 한국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분야 중 하나다. 그러나 최근 반도 산업이 ‘산업의 쌀’, ‘전략무기’로 부각되며 반도체 기술력 경쟁이 기업간에서 국가간 경쟁으로 심화되고 있다. 이에 우리나라는 지난 5월 산업통상자원부를 중심으로 ‘K-반도체 전략’을 내놓았다. 우리가 익히 알아온 반도체 한국 신화와 올 들어 부각된 관련 산업의 위기 사이에 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전자제품의 데이터 입력 및 저장을 담당하는 반도체다. 처리 속도는 빠르지만 전원을 차단하면 저장된 데이터가 휘발하는 D램, 전원을 꺼도 데이터가 남아 있지만 처리 속도는 느린 낸드플래시로 나뉜다.
우리 기업인 삼성전자가 ‘세계 반도체의 제왕’으로 불리는 이유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평정했기 때문이다. 공장 하나를 새로 짓기 위해 15조~20조 원이 들어가는 시장으로 수준 높은 기술력과 양산 능력 없이는 웬만한 대기업도 버텨내지 못한다. 1980년대만 해도 수십 개에 달하던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은 수차례의 치킨게임을 반복하며 시장에서 퇴출됐다. D램을 최초로 개발해 메모리 반도체라는 산업을 창조한 인텔도, 삼성전자에 반도체 기술 일부를 전수한 일본 NEC도, 독일 인피니언도 차례차례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접었다. 오늘날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들이 관련 시장의 70~80%를 장악해 사실상 과점체제를 구축했다. D램에서는 미국 마이크론, 낸드플래시에서는 일본 도시바 정도이다.
시스템 반도체라고도 불린다. 기억을 담당하는 메모리 반도체 이외의 모든 반도체를 포괄한다. PC에 사용되는 중앙처리장치(CPU)부터 전력 변환, 동작 감지에 사용되는 아날로그 반도체까지 품목은 수만 가지에 달한다. 절대시장 규모만 놓고 보면 비메모리 반도체가 메모리 반도체의 1.5배 정도 크지만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는 이유는 단일상품 시장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세분화돼 있어서다.
인텔이 PC에 들어가는 CPU에서 최근까지 독주해왔으며, 스마트폰에서 비슷한 역할을 하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는 퀄컴과 애플이 지배적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과 달리 한번 시장을 개척한 업체들이 오랫동안 시장을 주도하는 특징이 있다. 올 들어 비메모리 반도체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세계적인 차량용 반도체 품귀 현상 때문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공포가 줄어들면서 자동차 생산량이 늘었지만 차량용 반도체가 제때 생산되지 못해 완성차 제조까지 지장을 받게 됐다. 비메모리 반도체의 개발과 생산에 한국을 비롯해 세계 주요 국가가 발 벗고 나서는 이유다.
비메모리 반도체산업을 이해하려면 특유의 구조도 살펴봐야 한다.
생산시설 없이(Fabless) 반도체를 설계만 하는 팹리스 기업과 팹리스 기업들이 가져온 설계도에 따라 반도체를 위탁생산하는 파운드리 기업으로 나뉜다. 파운드리 기업 대부분은 자체 설계 능력 없이 생산 능력 향상에만 매진한다. 이처럼 독특한 산업구조가 만들어진 것은 앞서 살펴본 비메모리 반도체의 특수성 때문이다. 종류가 수만 가지에 달하다 보니 개별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매출은 크지 않다. 각각의 팹리스가 생산공장을 설립해 수익을 낼 만한 규모의 경제가 갖춰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막대한 설비투자를 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리스크다. 모바일 AP 시장을 제패한 퀄컴도 팹리스로 남아 있는 이유다. 이 같은 팹리스 기업이 늘어나면서 파운드리 시장의 규모도 커졌다. 오늘날 비메모리 산업에서 팹리스와 파운드리는 한쪽이 사라지면 다른 쪽도 존재할 수 없는 공생 관계다. 한국의 관련 산업은 팹리스를 기준으로는 2%, 파운드리 시장에서는 20% 안팎의 세계 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세계 파운드리 시장의 5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세계 최초의 파운드리 기업으로 모리스 창이 1987년 세웠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평정한 삼성전자가 비메모리 반도체를 새로운 사업 영역으로 삼고 관련 투자를 확대하면서 본격적인 경쟁관계를 맞게 됐다. 새로운 반도체 생산을 위해 자신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설계도를 넘겨야 하는 팹리스 기업 입장에서는 관련 기술 유출이 걱정될 수밖에 없다.
생산 능력을 갖춘 파운드리 기업은 반도체 설계까지 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TSMC는 팹리스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모토로 파운드리 기업의 본질을 보여주며 30년 이상 관철해왔다. 반도체사업부 내에 팹리스와 파운드리를 모두 거느리고 있는 삼성전자가 두 조직을 철저히 분리시켜놓은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자율주행차부터 빅데이터, 스마트그리드까지 최근 세계 산업의 특징은 모든 제품의 전자제품화다. 데이터를 저장하고 정보를 주고받는 것이 핵심이 되면서 개별 제품이 채용하는 반도체의 수와 종류는 갈수록 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에는 미국과 유럽연합(EU), 일본까지 나서 반도체 국산화를 천명하고 있다. 반도체산업의 전략적 특수성에 더해 코로나19로 상처 입은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한 대규모 투자처로 반도체를 주목한 것이다. 코로나19 이전 반도체 굴기를 내세운 중국 정도만 기존 기업들의 패권에 도전했던 것과 비교하면 구도가 완전히 변했다. 정부의 ‘K-반도체 전략’은 이 같은 맥락에서 도출됐다. 각국이 발 벗고 관련 산업을 지원하는 가운데 기업에만 내버려두기는 어렵다.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에서 한국 기업들이 새로 개척해야 할 영역도 넓다. 한국 반도체가 이번 정책 지원을 통해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을지 관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