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정준 강남대 글로벌경영학부 교수
1995년 4월 4일 미국이 자국산 자몽의 검역과 관련한 통관지연을 이유로 우리나라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일방적으로 제소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제소 사흘 전인 4월 1일 이미 미국 정부에 '선통관 후검사'를 도입하여 통관 일정을 앞당기겠다고 통보했음에도 불구하고 벌어진 일이다.
자몽은 비타민C가 풍부하고 감기예방, 피로해소에도 좋으며 자몽청으로 만들어져 음료 재료로도 인기가 좋은 편으로 카리브해 서인도제도의 자메이카가 원산지로 알려져 있는데, 포멜로(Pomelo)를 재배하기 위해 동남아시아에서 들여온 종자가 자메이카의 오렌지 종자와 교접되면서 18세기에 우연히 등장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과연 동식물연구가 겸 성직자인 그리피스 휴스(Griffith Hughes)에 의해 ‘금단의 열매(Forbidden Fruit)’라고 불릴 만한 탄생 일화다.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기 이전의 국제통상 체제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하에서 관할됐고 GATT 체제에서의 농업 분야는 ‘금단의 열매’와도 같았다. 그 민감성 때문에 국제통상규범으로 적절히 다루지 못하고 수많은 예외를 인정받았던 것이다. ‘예외 없는 자유무역’을 지향한 1986년부터 1994년까지의 우루과이라운드(UR; Uruguay Round) 협상 과정에서 본격 논의된 결과, 1995년 WTO 출범과 함께 ‘농업에 관한 협정(AA; Agreement on Agriculture)’이라는 독립 국제규범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1995년 1월 1일 WTO의 공식 출범은 곧 국제적 농업규범의 발효를 의미했다. 그리고 WTO의 세 번째 분쟁으로 자몽과 관련된 우리나라의 농산물 시험 및 검역 관련 조치가 도마에 올랐다.
미국은 우리나라의 농산물 시험 및 검역 관련 조치가 복잡하고 불필요한 검역을 포함해 시간도 많이 걸린다며, 당시 통관 지연으로 우리나라 부두에서 부패하고 있던 플로리다산 자몽을 문제 삼았다. 우리나라는 앞서 미국의 요구로 일단 수입된 해당 농산물을 우선 통관시키고 이후 표본조사 과정에서 문제가 발견되면 회수하는 이른바 ‘선통관 후검사제’를 1995년 4월 3일 발표했고 이틀 먼저 미국에 통보했음에도 공식 발표 하루 만인 4월 4일 미국이 우리나라를 WTO에 제소한 것은 굉장히 놀랍고 씁쓸한 처사였다. WTO체제가 출범한 지 불과 3개월 만의 일이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WTO체제 출범 이전까지 양자 방식의 통상 압박을 펼치던 미국이 WTO라는 다자무대를 분쟁해결의 장(場)으로 선택했다는 것과 오히려 우리가 양자협상을 원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미국은 자신들 주도로 만들어진 WTO라는 국제기구의 분쟁해결기능을 시험해보는 동시에 자몽 분쟁에 대한 승소를 확신했을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다자 방식의 분쟁해결 경험이 일천했던 시기다.
어쨌든 미국은 한국이 검역조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주장, 부패과일 선별제도, 캘리포니아산 과일에 대한 항온기 배양검사를 폐지하도록 요구했다. 항온기 배양검사란 과일 속에 잠복해 있는 과실파리의 알이나 유충을 확인하기 위해 항온기 속에 3~4일 보관하면서 부화유충을 검사하는 것으로 그동안 캘리포니아 주변 지역 과일은 지중해과실파리가 간헐적으로 발견돼왔다.
농산물은 부패가 빠르기 때문에 신속처리절차에 따라 분쟁해결이 진행되고 마무리되어야 하는 압박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원래부터 WTO 출범에 맞춰 잔류농약의 검사기준, 낙후된 검역기법 등 국내 농산물 검역제도를 국제수준에 맞춰 1996년 말까지 정비해나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제소는 개선의 계기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중 미국이 이의를 제기한 내용을 중심으로 캘리포니아산 과일에 대한 항온기 배양검사는 1996년 10월 21일 폐지했고, 일반 병해충에 대한 검역처분 제외, 부패과일 선별제도는 같은 해 12월 폐지했다. 자몽 분쟁을 통한 검역조치의 교훈을 일찌감치 경험한 덕분일까? 지금도 우리나라의 검역체계는 촘촘하면서도 합리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참고 : <국제경제법 기본조약집>(박덕영, 2016), <국제농업통상론>(이용기, 2016) 및 인터넷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