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정호 명지대 경제학과 특임교수
우리 인류가 여타 동물과 다른 개체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축적’의 기술 덕분일 것이다. 선조들이 남긴 여러 경험과 지식을 누적해 이를 계승하고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축적이 가능했던 것은 단연코 ‘종이’의 발명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종이의 발명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 105년 후한의 채륜이 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원전 2500년경부터 사용했다는 이집트 파피루스는 식물성 섬유를 가공하는 단계까지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종이라고 규정짓기 어렵다. 중국의 제지술은 4세기경 우리나라에 전파됐는데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384년 백제에 불교를 전한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에 제지술도 가르쳤다는 내용이 있다. 이후 7세기 초 고구려 승려 담징이 일본까지 전파했다.
한국, 중국, 일본 등 3국에서 비교적 일찍부터 제지술이 발달한 것과 달리 유럽은 중세시대까지도 양가죽이나 파피루스를 사용해 기록물을 보관했다. 제지술이 유럽에 전파된 결정적 계기는 751년 이슬람 세계와 당나라 간에 벌어진 탈라스 전투(Battle of Talas)였다. 전투에서 승리한 이슬람군은 당나라군 포로를 잡아갔는데 그중에 제지 기술자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당시 탈라스 전투를 이끈 당나라 원정군 사령관이 고구려 유민 출신의 고선지 장군이었고 포로도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기 때문에 서방에 전파된 제지술은 고구려 제지술이라는 주장도 있다. 제지술이 중동지역과 유럽대륙을 지나 영국에까지 전파된 것이 15세기였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까지 전파된 것은 17세기 말엽이었으니 중국에서 시작된 제지술이 서구 전역에 전파되기까지 무려 150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린 셈이다.
종이를 만드는 제지업(Papermaking)은 종이(Paper)의 주원료인 펄프(Pulp), 폐지(고지) 등을 이용해 기계적·화학적 처리를 거쳐 용도에 맞게 각종 지류와 골판지, 백판지, 상자 등을 제조하는 산업활동을 지칭한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0번째로 종이 사용량이 많은 국가이면서 생산량 세계 5위를 차지하고 있는 종이 대국이다. 종이 및 판지 생산실적을 살펴보면 2017년 우리나라는 1,160만 톤의 종이 및 판지를 생산하며 이 중 수출은 298만 톤, 수입은 126만 톤, 소비는 991만 톤에 달한다. 제지업은 인터넷 등 정보화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급격한 성장률을 기록한 산업이었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인터넷 등으로 정보화 시대가 도래한 1990년대~20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정보 습득이 용이해지면서 다양한 정보를 출력해야 할 요인이 늘어나 종이 사용은 오히려 더더욱 증가했다. 특히 1990년대는 가전·식품·농산물 포장산업의 발달, 높은 신문 보급률 등으로 국내 제지산업의 성장기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점차 화면상에서 열람하는 것이 익숙해지면서 제지업은 대표적인 사양산업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저성장 기조 속에 있던 제지업이 다시금 주목받게 된 것은 택배산업의 발달과 관련이 있다. 2000년대에는 홈쇼핑과 인터넷 쇼핑몰의 급성장으로 택배산업이 급속히 성장함에 따라 골판지와 백판지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며 해당 분야가 성장했다. 국민 1인당 종이 및 판지 소비량은 2009년 171.6kg에서 2013년 184.7kg, 2016년 192.4kg, 2018년 189.2kg으로 증가 추세를 보이다 최근에 다소 주춤한 상황이다.
국제 교역에서 미국의 보호주의 공세가 드센 가운데 2018년 미국이 신문용지 재료인 캐나다산 갱지에 대규모 관세 부과 판정을 내려 양국 간 분쟁이 발생한 적이 있다. 미 상무부는 미국 제지업체의 요청에 따라 캐나다 업체들의 보조금 및 덤핑 수출 실태를 조사해 상계관세를 부과한 데 이어 반덤핑관세까지 부과하게 된 것이다. 미 정부의 이 같은 결정은 2017년 캐나다 항공기 제조업체 봄바디어에 300%의 ‘관세 폭탄’을 부과키로 해 양국 간 첨예한 무역분쟁을 일으킨 데 이어 나온 조치였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나라와 인도네시아 간에도 종이 분쟁이 발생했다. 2003년 우리 정부가 인도네시아 종이 수출업체에 대해 반덤핑관세를 부과하자 인도네시아 정부는 부당하다며 2004년 9월 세계무역기구(WTO)에 우리 정부를 제소한 바 있다. 1년 4개월에 걸쳐 지루하게 이어지던 인도네시아와의 종이 무역분쟁은 한국의 승소로 일단락됐다.
일부 선도적인 제지회사들의 경우 기존 제지사업(Paper & Pulp)은 실적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으나 이미징(Imaging)과 특수소재(Specialty Materials) 부문에 대한 투자는 늘리고 있다. 일례로 사용자의 신체 움직임으로 생산된 전기를 저장 가능한 휴대용 자기충전 종이배터리라든가, 수첩에 메모 즉시 앱과 연동되는 스마트 수첩, 정밀 반도체 회로를 종이로 만든 얇은 칩 위에 전사하는 방식의 ‘종이 반도체’ 개발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최근 첨단 제지업계의 이 같은 노력을 보면, 어쩌면 종이는 우리 인류가 고대문명 시절 발명해 21세기까지 계속해서 사용해오고 있는 마지막 발명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