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방청록 한국유럽학회 회장, 한동대 교수 사진한경DB
지난해 2월 18일 EU 집행위원회는 변화하는 통상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중장기 계획으로 新통상정책(An Open, Sustainable and Assertive Trade Policy)을 발표한 바 있다. ‘개방형 전략적 자율성(Open Strategic Autonomy)’이 핵심 개념이다. EU의 새로운 통상전략은 지난 2006년 EU의 중기 통상전략으로 채택된 ‘글로벌 유럽(Global Europe)’, 2010년의 ‘무역, 성장 그리고 국제문제(Trade, Growth and World Affairs)’, 그리고 2015년의 ‘모두를 위한 무역(Trade for All)’에 이어 발표된 네 번째 통상정책이다.
지난해 유럽연합(EU)의 新통상정책은 다자주의 약화, 미·중 패권경쟁 심화, 국제경제 관계에서의 자국우선주의 경향 심화,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재편 가속화 등의 배경에서 발표됐다. 따라서 EU의 新통상정책은 급변하는 글로벌 통상환경의 배경에서 회원국 이익을 최대한 보호하려는 정책적 의지를 담고 있다고 평가된다. 이런 맥락에서 EU 新통상정책은 중기 목표 달성을 위해 세계무역기구(WTO) 개혁, 녹색 전환 및 지속 가능한 공급망 지원, 디지털 전환 및 서비스 무역 지원, EU 표준 및 규제의 영향력 강화, 인접국과의 대외관계 강화, 공정경쟁을 위한 무역협정 강화 등 여섯 분야별 주요 행동강령을 제시했다.
이번 통상전략은 2006년 EU의 첫 포괄적 통상백서 발표 이래 네 번째 발표된 전략으로, 급변하는 통상환경하에서 EU 회원국 기업의 이익 보호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기존 전략과 차별화되는 특징이다. 이는 그 명칭에 포함된 개방적(Open), 지속 가능한(Sustainable), 적극적(Assertive) 통상정책이라는 세 키워드에도 잘 나타난다.
우선 EU의 新통상정책은 개방적(Open) 무역정책으로서 WTO 개혁과 다자무역체제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EU가 새로운 통상정책의 핵심 개념으로 ‘개방형 전략적 자율성(Open Strategic Autonomy)’을 제시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방형’의 개념을 통해 다자주의 개방경제를 추구한다는 기본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전략적 자율성’의 개념을 통해 EU 핵심 산업 분야에서의 대외의존도를 낮추면서 급변하는 통상환경하에서 회원국의 이익을 최대한 보호하겠다는 전략적 의지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2020년 발표된 EU 신산업정책과 2021년 발표된 신산업전략 개편안에서도 ‘전략적 자율성’ 개념이 주요 정책 개념으로 다루어지며 핵심 소재와 기술, 식량, 보안, 인프라 등 외국에 대한 의존을 줄여 역내 생산을 확대하는 등 전략산업의 자체 공급망을 구축·강화함으로써 유럽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계획이 제시된 바 있다.
결국 EU의 新통상정책과 신산업정책이 ‘전략적 자율성’이라는 동일한 정책 개념을 기초로 연계 추진되는 상황에 있는 것이다.
또한 EU 新통상정책은 ‘지속가능(Sustainable)’ 측면에서 통상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EU의 新통상정책은 녹색 전환 지원과 디지털 전환 지원에 정책적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있다.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녹색경제로의 전환, 노동과 인권 보호의 효율적 이행, 디지털 전환에의 적극적 대응 등이 지속 가능하고 책임 있는 공급망 형성과 EU 경쟁력 강화에 중요하게 기여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EU 新통상정책은 ‘지속가능성’ 차원에서 대외통상관계에서 환경·노동·인권보호 등 보편적 가치의 수호를 통상정책의 핵심 요소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지난 2011년 발효한 한·EU FTA가 ‘무역과 지속가능 발전’의 장에 환경과 노동 관련 이슈를 포함시킨 바와 같이 新통상정책은 역외국과의 교역에서 이들 핵심적 가치가 잘 지켜지는 것이 지속 가능하고 책임 있는 관행의 확립 측면에서 중요하다는 인식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EU 新통상정책은 교역상대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으로부터 EU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의 적극적(Assertive) 무역정책으로 제시됐다. 지난 몇 년간 EU는 미국·중국 등과 높은 수준의 통상갈등을 경험한 바 있다. EU는 유럽 기업들이 제3국과의 무역에서 불공정 경쟁을 하고 있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역내 기업을 보호하고자 적극적인 대응조치를 마련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EU는 불공정무역으로부터 역내 기업을 보호하고자 반덤핑·상계관세 등 무역구제조치를 강화해 시행하고, 유럽의 전략산업 보호를 위한 ‘외국인투자심사제도’를 강화했으며, EU 시장 내 경쟁왜곡 차단을 위한 ‘역외 보조금 규제’ 등의 정책조치들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2021년 EU가 발표한 새로운 통상정책은 급변하는 글로벌 통상환경에 적극 대응하며 회원국의 이익을 보호할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정책적 의지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U가 新통상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EU의 정책 및 규제환경에 상당한 변화가 이어지며 한·EU 통상관계 역시 다양하게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서는 특히 향후 국내 산업이 상당한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기업지배구조 및 공급망 실사(Due Diligence) 의무화, ‘개방형 전략적 자율성’ 개념에 기초한 공급망 재편 노력 등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수입품에 대해 제품별 탄소배출량에 따라 EU ETS와 같은 탄소비용을 부과하는 제도다. 높은 환경기준을 따르는 유럽 기업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추진하는 환경규제이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제조업 비중이 높은 산업구조와 탄소집약도가 높은 역외국의 기업 입장에서는 수출품목에 대한 관세가 인상되는 것과 같은 부정적 효과가 발생할 가능성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특히 우리나라 대(對)EU 주요 수출품목인 철강과 알루미늄이 주로 영향을 받을 것으로 우려되고 있으며 점차 대상 품목이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이에 따라 향후 CBAM이 시행될 경우 EU 시장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국내 수출기업들에게는 추가적인 행정비용 부담이 발생하거나 새로운 무역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돼왔다.
둘째, EU의 기업 공급망 실사(Due Diligence) 의무화 관련 법안이다. 이미 서술하였다시피 ‘지속가능성’은 EU의 기본정책 방향이자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핵심 가치로 인식돼왔다. 이에 EU의 다양한 정책분야에 걸쳐 지속가능성 관련 가치와 규범이 반영되는 경향이 나타났고, EU의 대외경제통상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과 관련해서도 분류체계 규정(Taxonomy), 지속가능 금융공시 규정, 비재무 정보보고 지침 등과 같이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정책이 계속 확대·수립되는 가운데 있다. 이런 배경에서 특히 주목받는 정책이 EU의 ‘기업지배구조 및 공급망 실사’ 의무화 법안이다. 현재 EU집행위원회에서 이른바 공급망 실사 의무화 법안 초안을 마련 중이다. 향후 유럽의회 등의 동의를 거쳐 법안이 시행되면 기업의 전 공급망 내에 인권과 노동과 환경, 거버넌스 등에 대한 위반 여부 확인 및 개선의무가 부여되며, 미준수 기업과 기업인에 대해서는 벌금 부과와 피해보상 요구 등 제재조치가 부과될 수 있다. 이에 따라 실사 이행의 대상이 되는 기업들은 글로벌 공급망 전반에 걸쳐 환경·인권·거버넌스 상황 등에 관한 세심한 주의와 통합적 관리책임 의무가 부과된다는 점에서 유럽 시장으로 진출하는 기업에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한다.
셋째, EU는 ‘개방형 전략적 자율성’의 정책 추진에 따라 유럽 전략산업 분야에서의 자체 공급망 구축에 적극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EU의 공급망 재편 추진 노력은 EU 전체 수업 중 60%가 가공재로 해외 수입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은 상황에서 코로나19 팬데믹 등으로 주요 물자 수급에 극심한 어려움을 경험하게 되면서 역내 공급망의 취약성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는 배경에서 그 필요성이 강조된 바 있다. 이러한 노력은 EU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전략에 따른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EU 회원국 기업의 리쇼어링(Reshoring)이 촉진되면서 글로벌 공급망이 약화되는 등 자국 우선주의가 확산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역시 제기돼왔다.
EU는 우리나라의 주요 교역대상국이자 핵심 투자파트너다. 그동안 한·EU FTA 등을 기초로 양자 간 경제적 협력을 강화하며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발전해왔다. 하지만 최근 급변하는 글로벌 통상환경의 배경에서 新통상정책 발표와 더불어 구체화되고 있는 일련의 무역정책조치와 규제들로 인해 점차 대외적으로 보호주의 경향이 강화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는 가운데 있다.
그동안 EU는 거대한 단일시장을 기초로 녹색 전환, 디지털 전환, 가치적 측면의 규범 등 다양한 역내 규범과 규칙들을 마련하고 이를 글로벌 규범으로 발전시키고자 노력해왔다. 실제로 EU가 국제통상 분야에서 담당하는 이른바 규범 제정자(Rule Setter)로서의 역할이 상당한 성과로 이어졌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처럼 EU를 통해 추진되는 글로벌 규범이 확대되는 현실을 감안할 때 우리 정부와 기업들은 EU 新통상정책의 시행 이후 추진되는 EU 정책변화와 규제강화 움직임에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문제는 최근 EU가 추진하는 통상 관련 법안과 규제들이 매우 다양해서 각각의 세부 내용과 그 영향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조차 쉽지 않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산업 분야별로 추진 중인 EU의 통상 관련 법안과 규제들에 대해 면밀히 파악하고 민관학 차원의 긴밀한 공조로 체계적 대응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더 나아가 WTO 개혁과 다자주의 강화, 탄소저감 노력 등과 같이 정책적 이해관계를 가지는 분야에 대해서는 정부 차원의 대화와 협력을 통해 우리의 정책적 의지와 노력 그리고 성과가 EU 측에 충분히 전달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지속가능성’ 측면과 관련해서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ESG 경영이 기업의 중장기 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요소로 인식되고 있음이 글로벌 추세라는 점을 고려해 기업 차원에서도 환경(E), 사회적 가치(S), 기업 거버넌스(G) 등의 개선을 위한 노력에 계속 힘써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향후로도 EU 新통상정책에서 주목하는 녹색 전환, 디지털 전환, 글로벌 공급망 재편 등에 중장기적으로 대응하는 근본적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